〈 48화 〉 여자친구(?)들과 삼자대면(3)
* * *
적반하장.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도리어 역정을 내는 행위를 뜻한다.
은근히 자주 쓰이는 방법 중 하나로 치정싸움에서 꽤 유용하게 사용된다.
왜, 흔히들 있지 않는가?
먼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야! 그럴 거면 헤어져!’ 라든가 먼저 바람을 펴놓고 ‘네가 날 외롭게 만들었잖아!’ 라고 뻔뻔하게 지껄이는 사례가.
놀랍게도 꽤 유효한 방법이다.
물론 조금 얼토당토 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렀든 아니든,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윽박을 지르면 사람들은 으레 ‘아?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또한 평소에 화를 내지 않는 채 고분고분했던 사람이 짜증어린 표정과 함께 욕설을 내뱉는다면? 십중팔구 자신의 행동을 한 번 돌이켜볼 것이다. 잘 화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냈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준아?”
“선생님?”
성난 표정으로 연기한 게 잘 먹혀 들어간 것 같다.
지현이와 예린이 역시 퍽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깜빡 거리고 있다.
그녀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긴장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엎치락뒤치락 말다툼을 벌렸던 그녀들은 입술을 앙 다물고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볼 뿐이었다.
“……쯧.”
나는 짜증 섞인 얼굴로 혀를 찼다.
그 순간 지현이와 예린이의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노골적으로 짜증을 표현한 적이 별로 없었던 만큼, 더욱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녀들의 얼굴을 몰래 흘겨보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깐 채 으르렁거리듯 말한다.
“……그냥 내가 아주 우습지? 그렇지?”
뒷목을 벅벅 긁적이며 거칠게 쏘아붙이자 그녀들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이 도통 이해되지는 않지만 계속 화를 내고 있자 ‘내가 좀 잘못한 건가?’ 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불과하다.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잠시 머뭇거리는 것뿐.
곧 있으면 ‘아차’ 하면서 정신을 차릴 게 뻔하다.
“잠깐만.”
바로 이렇게.
“서준아. 왜 네가 화를 내?”
“…….”
응당 맞는 말이다.
내가 화낼 상황이 아니니까.
나는 지금 양다리에 대하여 추궁을 받고 있다.
그러한 주제에 오히려 화를 내고 있으니까 지현이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 양다리에 대해 할 말 없으니까 괜히 말 돌리는 거 아니야?”
창졸간에 지현이는 추궁하듯 쏘아붙인다.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던지라 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너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데?”
“…….”
지현이는 금방 눈치를 챘다.
오랫동안 사회경험을 했던 만큼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했는지 쉽게 예상한 듯 싶다.
“서준이 너 괜히 화난…….”
“야.”
그래서 다행이다.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그냥 말 돌리려고 화난 척 했다, 그거야?”
지현이가 이렇게 행동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뭐?”
“하 씨발 진짜.”
갑작스레 걸쭉한 욕지거리를 툭 뱉었다.
원색적인 욕지거리를 들은 지현이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지현이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행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 너?”
“야 이지현.”
지현이의 거뭇한 눈동자에서 혼란이 느껴졌다. 확실히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그것은 예린이도 마찬가지. 우리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린이 역시 다소 식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뒷목을 박박 긁었다. 뒷목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과장된 행동에 지현이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지현. 너 진짜 나를 개 병신으로 봤구나? 어이가 없네. 네가 말하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는데 이렇게 나오겠다, 그거지?”
“한서…… 준?”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어깨를 들썩거리자 지현이는 낯빛이 점점 안 좋게 바뀌어갔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뻔뻔하다,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지현이는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챈 듯 싶었다.
“무슨 소리를 하긴.”
한 번 피식 웃어본다.
지현이는 그 웃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지만,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는지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아미를 이지러뜨렸다.
나는 지금까지 알맹이를 쏙 뺀 채 이야기했다.
의도적으로 짜증 섞인 표정으로 무섭게 분위기만 잡았을 뿐 이렇다 할 말은 꺼내지 않은 채 계속 지현이가 나를 쏘아붙이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줘야지 지현이에게 죄책감이라는 감정과 조금 더 덧씌울 수 있을 뿐더러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을 좀 더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이 없으니까 아주 그냥 가지고 놀기 좋지?”
머리를 짚은 채 강렬하게 말하자.
“어?”
“아?”
지현이와 예린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손을 꽉 오므리는 것이 상당히 놀란 듯 보였다.
“너, 설마 기억을?”
“선생님?”
“그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이와 예린이가 식은땀을 흘린다.
기억이 났다는 말은 그녀들에게 있어서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들 말이야. 기억났어.”
물론 거짓말.
대부분은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다.
하지만 나와 그녀들과의 관계를 유추하기에는 충분하다.
“서, 서준아. 그게, 그러니까…….”
지현이는 퍽 당혹스러운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읊조렸다. 도독이 제 발 저린 것 마냥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 본인의 잘못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지현. 너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아.”
“우리 사귄 적 없잖아.”
“그게.”
내 거칠게 따지고 들자 지현이는 머뭇머뭇 거리기를 반복할 뿐.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쏘아붙이는 언동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거짓말을 들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래, 뭐. 좋아 이지현.”
나는 살짝 여지를 주는 듯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반쯤 사귀는 것 마냥 상당히 가깝게 지낸 것은 맞으니까.”
지현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린다.
“흔히 말하는 썸 탄 사이라고도 할 수 있지.”
“어, 응.”
“그렇지만.”
나는 손바닥 뒤집듯 조금 강한 어조로 말한다.
“기억을 잃어서 힘들어하는 상대에게 연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좀 아니잖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원망하듯 읊조리자 지현이는 우물쭈물 할 수밖에 없었다.
“왜 거짓말을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너는 몇 달 동안 기억을 잃어 허둥지둥하고 있는 나한테 그러고 싶어?”
사실 지현이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게 전부니까.
오히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려고 했다.
지현이에게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손해 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 지현이의 거짓말을, 큰 잘못으로 명명한 채 좀 더 추궁할 필요가 있었다.
“그, 서준아. 그건 말이…….”
“그리고 류예린!”
지현이가 변명을 하기 직전, 그녀의 말을 무시하듯 휙 고개를 돌렸다.
변명을 듣기 시작하면 지현이의 페이스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을 원천봉쇄하지 않으면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웠다.
“아…….”
지현이의 짧은 탄성이 귓전을 두드렸다.
내 기세에 밀려서 변명을 하지 못한 채 입을 꽉 다물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과 노기어린 나의 모습에 평소처럼 당당히 행동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류예린. 너!”
“네, 네!”
나는 재빨리 류예린을 쏘아봤다.
예린이는 겁먹은 토끼마냥 움찔거렸다.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그 반응이 조금 과한 구석이 있어서 마음 한 켠이 찌릿찌릿 아파왔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계속 그녀들에게 휘둘리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하게 마음을 먹기로 다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제가요.”
“변명하지 마.”
“……선생님.”
예린이는 반쯤 울먹인 채 부들거렸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것이 처량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까, 뭐? 연인이라고? 바로 거짓말을 하네? 야, 무섭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진짜.”
“죄, 죄송해요. 선생님.”
“기억상실증을 걸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가지고 노니까 좋아?”
“가지고 놀다니요? 아, 그, 그런 게 아닌데. 아니에요, 서, 생님.”
“시발! 그게 가지고 논 거지! 네가 곁에 있어 달라면서 나한테 뭔 짓을 했는지 기억 안나?!”
“으으, 으.”
예린이는 뒷걸음질을 쳤다.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내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보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예린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린이 역시 이 상황이 무척 당혹스럽고, 힘들어 보였다.
“와…… 너희 둘 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는 감정선을 강하게 잡으며 그녀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다소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과 함께 원망어린 눈빛을 하니까 그녀들은 몸을 떨 뿐이었다.
좀 과하게 행동한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일단 밀어 붙일 때였다.
“그냥 아주 재밌지? 기억을 잃은 병신한테 연인이라고 거짓말하면서 가지고 노니까? 응?”
사실 그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거짓말을 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장난삼아 혹은 우스갯소리로 연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겠지.
지현이와 예린이의 마음은 단연코 진심이었다.
거짓부렁으로 연인이라고 속삭였다고 한들 그 마음까지 거짓으로 치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녀들에게 접근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 이유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녀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들이 나에게 연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반쯤은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면 쌍방과실, 정도 되려나?
하지만 지금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서 꼭 해야 될 행동이 있었으므로 나는 다소 뻔뻔하게 그녀들을 밀어 붙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약해지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그, 그런 게 아니야. 서준아. 난 정말 너를…….”
“선생, 님.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 그런 생각으로 선생님을…….”
“시끄러.”
나는 그녀들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숨을 헙, 하고 들이키는 지현이와 예린이.
별안간 쯧, 하고 다시 혀를 차고 말을 잇는다.
“나는 말이야. 너희들을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 병신 같지 않아?”
“으.”
“내가 양다리를 걸친 개새끼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너희 둘을 만날 때마다 맨날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응? 그런데 뭐? 거짓말?”
“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럴 생각이 아니면 뭔데!”
“아, 으, 저, 그러니까. 그게…….”
원망과 분노 섞인 표정으로 째려보자 지현이와 예린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왜 너희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곧이곧대로 믿었지?”
“…….”
“그만큼 너희들을 신뢰했다는 건데. 어떻게 너희들이 나한테 이래?”
“…….”
적반하장 방법을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분노.
두 번째로는 죄책감이다.
이 두 가지를 교묘하게 이용해야한다.
너무 과하게 화내서도 안 되고, 너무 과하게 죄책감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하아…… 나만 열 내니까 좀 꼴이 우습긴 하네.”
잠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쯤하면 되었을까?
좀 더 지껄이면 오히려 반발 작용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슬슬 마무리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후우. 그래. 애들아.
“서준아.”
“선생님.”
커다랗게 한숨을 내뱉은 후 씁쓸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쓰게 말한다.
“인간관계는 말이야. 기본적으로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잖아. 이렇게 뻔뻔하게 연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너희들을 내가 뭘 보고 이제 믿어야하는데?”
지현이와 예린이가 살짝 입술을 깨문다.
“또 무슨 거짓말을 할 줄 알고? 안 그래?”
“미안해. 미안하니까 제발.”
“됐다.”
나는 지현이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 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내가 너희들을 잘 몰랐나봐.”
“아?”
“나도 좀 지친다.”
착잡하게 한 번 중얼거린 후.
“우리 그냥 다 끝내자.”
툭, 하고 폭탄을 떨어뜨린다.
……물론 방금 그 말은 거짓말이다.
그녀들에게서 주도권을 확실히 붙잡고 앞으로의 협상을 위해 내뱉은 거짓부렁일 뿐.
“야, 너? 한서준?”
“선, 선생님! 그게 무슨?”
하지만 당황하는 그녀들을 보자 마음 한 구석이 아릿했다.
아니, 그런데 나 말이야.
너무 쓰레기 같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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