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사랑의 방정식(5)
* * *
조금 뜬금없을 수 있지만 박규성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연락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다. 서윤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아.’
솔직히 말해서 박규성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좀 께름칙하다.
아니 상당히 찝찝하다. 그도 그럴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짝사랑했던 서윤이의 연인이 된 나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박규성 입장에서는 내가 상당히 미울 터. 어쩌면 거무죽죽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박규성은 시그니처 클랜의 A랭크 능력자.
한 개의 클랜에서 에이스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괴수를 토벌하여 실전 경험 역시 매우 많다.
만약 박규성이 악의를 품고 이상한 짓을 한다면?
속된 말로 좆 될 게 분명하다.
‘물론 박규성이 정말로 이상한 짓을 벌일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박규성의 성격을 생각했다.
그는 붙임성이 좋고 친절한 성품을 가졌다.
쓸데없는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만큼 이성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시발. 맨날 뉴스에서 길가다가 눈 마주쳤다고 사람을 폭행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성추행으로 신고하고, 반말했다고 보복성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
항상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솔직히 박규성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한데…….’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박규성의 상황이 살짝 안타까웠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만약 내가 박규성의 입장이었으면 정말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아. 서준 씨.”
그때. 카페 의자에 앉아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조금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듣기 좋은 음량과 톤이었던지라 문뜩 여자들이 좋아할법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훈훈하게 생긴 훈남이 나를 흘끗 쳐다보고 있었다.
이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서윤이의 소꿉친구인 박규성이다.
“안녕하세요 규성 씨.”
나는 천천히 인사를 건넸다.
박규성의 온몸을 쓱 하고 훑어봤다.
깔끔한 차림의 옷이었지만 핏이 살아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널찍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볼 때마다 느끼는 거였지만 정말 드라마 속 인물 같다. 능력 있는 부잣집 도련님의 표본이라고 할까? 박규성이 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알 수밖에 없다.
“서, 설마 박규성?”
“와! 나 진짜 팬인데.”
갑작스러운 박규성의 등장으로 온 카페는 들썩들썩 거렸다.
마치 유명한 연예인과 팬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알바생, 손님, 여자들 할 것 없이 박규성을 향해 시선이 한껏 쏠렸다.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왕왕 귓전을 두드렸다.
“어머어머 잘생긴 거 봐…… 멋지다아아아…….”
“싸인 해달라고 할까?”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누구지?”
“응?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박규성과 함께 앉아있는 나에게 쏠렸다. 파팍! 하고 꽂히는 눈발을 느꼈다. 날 알아볼 수 있을까? 나도 요즘 좀 유명해지긴 했는데.
“어? 한서준 아니야?”
“한서준? 확실히 닮은 것 같기도?”
“S랭크 여자들하고만 친하게 지낸다는 한서준?”
아니, 뭐?
왜 내 소문이 저 따위로 퍼진 걸까.
그것 말고 좋은 말도 좀 있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여자만 밝히는 놈이라며 숙덕숙덕 거릴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서준 씨. 확실히 카페는 사람들의 이목이 좀 신경 쓰이네요.”
“아, 네.”
“하지만 서준 씨께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랑 단 둘이 있는 것은 좀 불편하시겠죠.”
박규성은 훔쳐보고 있는 사람들을 곁눈질 하더니 슬쩍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박규성과 함께 있는 것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카페를 약속 장소로 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꼭 그것 때문에 여기를 약속 장소로 잡은 건 아니에요.”
나는 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박규성과 이곳에서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위함이다. 일이 잘못 될 경우 박규성이 이곳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남았나?’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별 것 아니다.
괴수사냥. 이곳에 출현할 괴수를 죽일 생각이다.
미래의 꿈속을 통해 오늘 이곳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조금 기억이 흐릿하였지만 아마 이곳에서 높은 확률로 괴수가 출현할 것이다.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았고 지현이와 서윤이에게 조언을 구했어. 나 혼자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박규성을 바라봤다. 박규성은 A랭크 능력자. 만약의 경우 상당한 도움이 될 터.
‘역시 보험을 들어놓는 게 낫겠지. 나는 실전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
미래의 꿈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꿈속의 체험이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 그러니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보험은 꼭 필요하다.
‘박규성을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게 되지만 뭐, 일단은 박규성의 부탁으로 만남을 가져주는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나는 마음속으로 자기합리화를 시전 했다. 어차피 박규성 정도의 실력자라면 별로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꿈속을 통해 어떤 종류의 괴수가 등장하는지 알고 있으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괴수 사냥은 헌터의 본분이잖아? 사람들을 위해 괴수를 토벌하는 거니까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에게 괴수가 출현할 거라고 경고하고 싶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그럴게 미리 말해봐야 믿을 리 없으니까.
어쩌면 미치광이 취급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꿈속 내용이 항상 100% 적중한 것은 아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괴수가 출현하지 않으면 어떡할까?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이곳은 CCTV도 많고 목격자들도 많으니 이번에 제대로 괴수를 토벌하게 되면 지현이 클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인맥 때문이었다는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겠지?’
드디어 E랭크 짐꾼나부랭이라는 별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마음 같아서는 승급심사를 봐서 헌터 랭크를 높이고 싶지만 실적이 너무 부족했다.
4계층의 비밀 던전을 공략한 이후 클랜 하우스에서 훈련만 받았으니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지현이하고 서윤이 그리고 예린이가 말하길, 강력한 능력일수록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느 정도 선까지는 힘을 키운 후에 밝히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그녀들이 언급한 힘을 넘었다.
이 정도 힘이라면 슬슬 언론에 알려져도 괜찮단다.
“제가 이곳에서 만나자고는 했지만 대화를 나누기가 좀 그렇기 하네요.”
“아, 걱정마세요.”
박규성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별안간 무형의 결계가 우리 두 사람을 감쌌다.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결코 식별할 수 없는 결계형태의 장막이다.
이것은? 예전에 경험한 기억이 있다.
차음(?音)마법이다. 일정 거리의 소리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얼마 전 예린이가 사용했다. 나는 턱을 긁적였다. 박규성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구나. 간단한 마법이었지만 꽤 실용성이 높았다.
“차음마법을 사용했어요. 사람들에게 저희 대화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좋네요.”
나도 저 마법 배우고 싶은데.
하지만 지현이는 ‘바보야. 넌 마법에 재능 없으니까 그냥 포기해.’ 라며 일축했다. 조금 씁쓸하다. 서윤이에게 부탁하니까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예린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피했고.
“제가 서준 씨를 뵙자고 한 이유…… 아마 예상이 가실 거예요.”
“예. 서윤이와 관련된 이야기겠지요?”
서윤, 이라는 말에 박규성은 살짝 어깨를 움찔 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서준 씨 입장에서는 좀 이상할 수 있겠죠. 제가 감히 뭐라고 서윤이에 대해 이렇게 만남을 갖겠다고 한 건지.”
박규성은 본인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럴 만했다. 박규성과 서윤이는 타인에 불과하다. 왈가왈부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꿉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찾아가는 것은 조금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다.
“죄송해요. 조금 오지랖이겠죠?”
“아뇨 괜찮아요.”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박규성의 행동은 그야말로 오지랖이었다.
박규성이 친오빠라고 해도 이렇게 따로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조금 이상할법한데 하물며 박규성은 친오빠도 아니잖아?
“저는 예전부터 서윤이와 꽤 친하게 지냈거든요.”
꽤 친하게 지냈다, 라.
살짝 강조하는 느낌이다.
서윤이와 인연과 시간을 부각하고 있다.
“나름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던지라.”
“그렇군요.”
일말의 적적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서윤이는 대인기피증세가 좀 심해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상당히 꺼려했죠.”
그는 살짝 고개를 움직였다.
나를 뻔히 직시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과 사귄다고 하니까 조금 놀란 거 있죠? 궁금하기도 하고요. 서준 씨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고.”
대인기피증이 심각한 서윤이와 사귀고 있는 내가 궁금하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사실을 명분삼아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규성은 아마 정신감응능력에 대해 잘 모르는 듯 싶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저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남의 연애사에 함부로 간섭하려는 것 같아서 조금 죄송하기는 하네요.”
“아, 뭐. 이해합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척 했다. 쓸데없는 말을 내뱉어서 괜스레 박규성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별말씀을.”
“그나저나 서준 씨.”
“네.”
“제가 서준 씨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요.”
갑자기 뭐야. 그 말은?
뒷조사를 했다는 의미인가?
“아, 물론 뒷조사 같은 건 아니고요. 서준 씨 유명하시잖아요. 요즘 인터넷에 여러 가지 기사가 올라왔던데.”
“아, 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박규성이 재빨리 사족을 덧붙였다. 나는 잠시 턱을 긁적였다.
“이지현 씨와 류예린 씨 그리고 강화련 씨와 여러모로 친분이 있다면서요?”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박규성은 넉살좋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친분이요? 이것 참 부럽네요. 이지현 씨와 류예린 씨 같은 분과 친분이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못 꿀 텐데.”
박규성은 뒷목을 긁적이며 언죽번죽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서준 씨.”
“네.”
그는 살짝 목을 가다듬은 후 스리슬쩍 한 번 찔러보았다.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죠.”
“이상한 소문이요?”
그래. 그렇지.
그 말을 언제 하나했다.
나에 대해 조사를 했으면 분명 들어봤을 테니까.
“예전에 이지현 씨가 인터뷰에서 관심 있는 남자가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잖아요?”
“아, 예. 좀 옛날이지만 분명 지현이가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죠.”
“이지현 씨는 별로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데 유일하게 서준 씨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그렇고, 잘 다니던 세피로트 클랜을 그만두고 서준 씨와 함께 다니는 것도 그렇고.”
“뭐. 저는 옛날부터 지현이와 친했으니까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규성 씨와 서윤이처럼 저는 지현이와 나름 소꿉친구 같은 관계거든요.”
“소꿉, 친구…….”
“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그거 참. 오래된 인연이네요.”
생각해보니까 지현이와 알고 지낸지 정말 오래되긴 했다.
“그러면 류예린 씨 같은 경우는 어떻게?”
“예린이는 가정사가 복잡하잖아요.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하지만 성씨세가에게서 버림받고 어머니와 홀로 함께 살아왔는데 제가 옛날에 예린이 과외를 좀 봐준 적 있거든요. 그때 친해졌어요.”
“카페에서 그렇게 장난을 칠 만큼요?”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를 한 번 홀짝인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가요.”
박규성은 조금 석연치 않는 듯 뜸을 들였다.
“제가 알기로는 단순힌 친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 같…….”
“규성 씨.”
“네? 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박규성이 무슨 말을 하고픈지 알고 있다.
확실히 나와 그녀들은 심상치 않은 관계니까.
인터넷을 통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할 만큼.
나에 대해 조사를 했다면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을 터.
“그냥, 뭐라고 할까요.”
“뜸들이지 마시고, 말씀하셔도 돼요.”
박규성은 검지로 이마를 꾹꾹 문지르더니 슬쩍 나를 한 번 쳐다본다. 그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번뜩였다. 나는 박규성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규성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리고 툭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윤이와 사귀고 있는데 다른 여성분과 너무 가깝게 지내시는 거 아닙니까?”
……드디어 노빠구로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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