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준비과정(1)
* * *
“……꼭 에델린 먼저 탑을 공략할 필요가 없지 않나?”
문뜩 솔깃한 생각이 떠올랐다.
일일이 탑을 공략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 없이 직접 성천교단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물론 에델린 정도의 인물을 사전의 약속도 잡지 않은 채 만날 수는 없겠지만 조금 억지를 부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에델린은 이상하리만큼 나에게 호의적이니까.
과거 에델린과 이러쿵저러쿵 안 좋은 일들이 많았던 것 같지만 나에게 호의적인 모습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아마 직접 찾아간다고 해도 나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뭐, 에델린 이외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특히 샬롯, 그 여자는 날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은데…….’
샬롯 레즈베리의 얼굴을 떠올리자 등골이 써늘하다.
샬롯은 성천교단의 핵심전력이자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다. 속된 말로 최강의 헌터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 정도의 실력자에게 원망을 산 것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샬롯에게 원한을 사고 무사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난폭한 성격은 아니지만 은원관계는 확실하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 나하고 마찰을 빚은 것 같은데 훗날 샬롯이 어떻게 행동할지 두려워 눈앞이 껌껌하기만 하다.
지금은 에델린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 같아서 괜찮겠지만 앞으로도 쭉 괜찮다는 보장은 없다.
미리 대응책을 마련해놓는 게 좋을 성 싶다.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죽이겠다는 둥 지껄였던 샬롯이다.
평소 샬롯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일 것이다.
헌터사회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샬롯이 나를 향해 시퍼런 칼날을 쓱쓱 갈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금이 다 저리다.
‘아 진짜.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보나마나 성천교단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에 가슴이 답답하다.
나 때문에 성천교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델린 샤를테르가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말로 미뤄 생각해봤을 때 보통 큰 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에델린을 뭐, 암살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그렇다면 성천교단의 대응이 이해되지 않는다.
성천녀 암살 미수라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중죄다.
진작 성천교단에서 나를 죽이든가 붙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천교단이 잠잠하기만 하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에델린이 나 때문에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아니면 누가 범인인지 모르던가.
‘샬롯은 확실히 알고 있는 눈치였고…… 나머지 호의들도 날 안 좋게 보고 있었는데…… 음. 어쩌면 에델린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뒷목을 벅벅 긁었다.
아니, 아니, 잠깐 기다려봐.
너무 그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애당초 에델린을 죽일 이유가 있던가? 없잖아. 안 그래?
에델린은 나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는 했지만 혹시 사고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다가 실수로 에델린에게 큰 피해를 줬고 그것 때문에 샬롯이 날 안 좋게 보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날 죽이고 싶지만 에델린이 만류하고 있고 사고인 걸 아니까 애써 참는 거고.
‘……아니, 그건 아니려나. 애당초 사고로 에델린이 죽을 뻔한 게 더 이상하지. 실제로 에델린은 한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다고 했잖아. 수많은 호위 병력에 둘러 쌓여있고 회복능력도 갖추고 있는데 그만큼의 부상을 입었다는 건…… 계획적으로 공격을 했다는 증거야.’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단서가 너무 부족한 탓이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에델린은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과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는 것이고 샬롯과 호위들은 날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아…….”
“서준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클랜 하우스 휴게실.
서윤이는 살짝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의문을 표시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있었던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보다 요즘은 어때? 정신감응능력 때문에 많이 힘들어?”
“서준 씨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니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빚진 게 얼만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서 정말 다행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서준 씨? 저에게 빚진 거라뇨. 전부 제가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인 걸요? 빚이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서윤이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서준 씨.”
“어, 응.”
말랑하고 따듯한 서윤의 손과 맞닿자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았던 근심과 걱정이 씻은 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서준 씨는 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아니, 뭘…….”
“정말이에요. 서준 씨가 곁에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지는 거 있죠? 옛날에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정신감응능력 때문에 항상 사람들을 피해왔으니까요.”
서윤이에게 있어서 정신감응능력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과 같았다.
내가 주기적으로 서윤이의 정신감응능력을 흡수하고 있지만 어차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정신감응능력을 강해져만 갔고 언젠가는 스스로의 능력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서윤이는 어떻게 될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서윤아.”
“네. 서준 씨.”
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다가 창졸간에 말문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네 정신감응능력을 없앨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네?”
서윤이는 잠시 의아하다는 듯 귀엽게 눈을 깜빡이다가 의문을 토로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그냥 만약에 말이야. 네 능력을 없앨 수 있다면 어떨까싶어서.”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 에델린에 관해서 말할 생각은 없다.
에델린의 능력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이 아니라 셀레발을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능력을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지만…….”
서윤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슬며시 나를 흘겨봤다.
“……이 능력을 없애면 서준 씨께서 조금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응? 내가 왜?”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한테 정신감응능력이 꽤 쓸만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잖아요.”
“아.”
확실히 서윤이의 정신감응능력을 칭찬한 적이 있다.
무척이나 쓸만한 능력이었기에 자연스레 칭찬이 나온 것이다.
설마 그것 때문에 정신감응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는 건가?
“아니 그건 말이야.”
나는 뺨을 긁적긁적 거리며 거짓부렁을 내뱉었다.
“사실 그냥 해본 말이었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는대로 괜찮은…… 뭐 계륵 같다고 할까?”
이 정신감응능력은 상당히 유용하지만 서윤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깟 정신감응능력보다 서윤이가 훨씬 중요하니까.
‘그러고 보니 이 정신감응능력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예를 들어 상대방의 성감과 쾌락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좋…… 시발?
‘잠깐만. 설마 나 지금껏 이 능력으로 그딴 짓밖에 안 한 거야?’
조금 당황스럽다.
이 좋은 능력을 왜 그따위로만 사용했지?
정신감응능력을 잘 활용하면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정신에 간섭하여 심리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음험(?)한 방법으로만 악용했단 말인가?
“…….”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던 사이 슬쩍 서윤이의 상태를 확인해보니까 서윤이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슬픈 기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제 능력이 쓸모가 없으셨군요. 좀 아쉽네요.”
“…….”
두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좀 많이 우울해보였던지라 나는 서둘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서윤아. 내가 저번에 화련이와 대련했다고 말했잖아.”
“아. 네.”
“가볍게 대련 한 판 했는데 유효타를 한 번도 넣지 못했어. 와 화련이 진짜 강하더라.”
화련이와 있었던 일을 전부 사실대로 말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각색과 함께 서윤이에게 이야기해줬던 게 떠올라 순식간에 화재를 전환했다.
“빙결능력은 공격범위도 넓고 상당히 화려하긴 한데 공격력이 부족한 느낌이었어.”
“그럴 거예요. 결국 얼음이니까요.”
서윤이는 내 말을 긍정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청발의 머리카락 너머 서윤이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얼음, 얼음이라…… 서윤이의 능력을 흡수한 것치고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조금 가슴이 답답했다.
“화련 씨의 몸은 강철보다 더 단단하니까 직접적인 데미지를 주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화련 씨 정도의 인물을 쉽사리 얼릴 수도 없었을 테고, 냉기를 이용해서 몸을 굼뜨게 만들 수도 없었겠죠.”
“어, 응. 맞아. 그랬었지. 진짜 하나도 안 통하더라.”
마치 뗀석기를 사용하는 원시인과 현대 기갑부대의 싸움 같았다.
뗀석기로 전차를 내려찍어도 흠집하나 낼 수 없었다.
그 정도 격차가 느껴졌다.
“그렇군요.”
서윤이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눈을 떠 오른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얼음꽃 한 송이를 만들었다.
새하얀 얼음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꽃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다.
“서준 씨도 아시다시피 저는 빙결능력과 마법을 섞어서 사용해요.”
“응.”
이른바 합성빙결이라고 했던가?
“합성마법을 잘 사용하면 여러 가지 형태로 강화 할 수 있어요.”
나는 저 반짝거리고 있는 얼음꽃을 유심히 내려 보았다.
“얼음의 경도와 강도를 조절하거나 특질을 변화하는 방식으로요.”
“오.”
“더 나아가 충격을 흡수할 수도 있어요.”
“화련이의 공격도 막을 수 있어?”
무심코 질문 하나를 툭 던지자 서윤이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화련 씨가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아마 가능할거예요.”
자못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서윤이는 화련이보다 더 빨리 S랭크에 다다랐다.
단순히 S랭크에 도달한 속도만 비교해놓고 본다면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빙결합성을 잘 사용하면 화련 씨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을 거예요. 이걸 한 번 보시겠어요?”
어느덧 얼음꽃이 점점 불게 물들고 있었다.
꽃잎 부분이 매우 날카롭고 튼튼해보였다.
합성빙결인가?
“얼음꽃이 붉게 물들었죠? 강도와 경도를 살짝 조절한 거예요.”
“신기하네.”
“나중에 서준 씨께서 합성마법을 배우시면 화련 씨에게 어느 정도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예요.”
장난스럽게 딱밤을 쳐서 얼음기둥을 무너뜨린 강화련을 상처 입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합성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서서히 들끓고 있었다.
합성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테니까.
……물론 나는 마법에 영 잼병이지만.
아 마법 배우고 싶다.
“난 마법에 재능이 없으니까 지금 배우려고 해봐야 언제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서윤이가 간단한 마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다가 진땀을 뻘뻘 흘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서윤이가 무척 당황했던 것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 덕분에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걸.
“그러실 줄 알고 제가 하나 준비해온 게 있어요, 서준 씨.”
서윤이는 상냥한 웃음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준비한 여자 친구처럼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나에게로 건넸다.
나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상자를 바라보다가 서윤이가 조금 더 상자를 내밀자 하는 수 없는 상자를 받아들였다.
“이건 뭐야?”
“마도서예요.”
……마도서?
“창천(??)의 서라고 불리는 마도서에요. 이 마도서를 이용하면 어느 정도는 합성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한동안은 연습을 하셔야겠지만요.”
나는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냈다.
그러자 그 속에는 한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살며시 책을 펼치자 책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책 속에서는 여러 가지 마법이 표기된 것이 보였다.
“……이거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데.”
마도서 한 권에 얼마더라?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최소 몇 억부터 시작하는 게 바로 마도서였다. 서윤이가 사용하는 마도서는 수천억 이상을 호가한다고 들었다.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지금껏 너에게 받은 것도 많은데…….”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서준 씨께서는 앞으로 탑을 공략하실 생각이잖아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보태고 싶었어요.”
“너무 과하지 않을까? 좀 많이 미안해서. 아, 괜히 너한테 받아먹기만 하네.”
지금껏 서윤이에게 낼름낼름 받아먹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상당한 부채의식이 나의 머리를 꽉 하고 짓눌렀기 때문이다.
서윤이가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지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서준 씨.”
“그래도.”
“그렇게 서준 씨의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부탁?”
“네.”
서윤이는 살짝 고개를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다치지 말라는 무리한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저 너무 무리하게 행동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윤아…….”
나는 마도서를 살짝 움켜쥐었다.
서윤이에게 받은 것들이 너무 많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떻게든 갚아주고 싶은데 역시 억지로라도 에델린에게 찾아가서 서윤이의 정신감응능력을 없애달라고 사정사정해볼까?
“…….”
“…….”
나와 서윤이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 음. 왠지 분위기가 살짝 이상해진 것 같았다.
서윤이는 흘끗흘끗 시선을 피했다. 양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 그게 서윤아……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네. 서준 씨.”
“나도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아, 혹시 나에게 바라는 거 있어?”
“바라는 거요?”
“응.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아…….”
“서윤아?”
서윤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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