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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었더니 S급 여친이 너무 많음-169화 (168/216)

〈 169화 〉 최서윤과의 데이트(3)

* * *

띵동.

현관벨 소리가 귓전을 어루만졌다.

바깥에 낯익은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나는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돈한 후 현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던 도중 벽걸이 시계를 확인하자 정확히 약속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나가요.”

현관문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조금씩 힘을 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녹슨 경첩소리와 함께 현관문 너머가 두 눈에 밟혔다.

그러자 포니테일 여성이 무료한 표정을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뭇하고 깔끔한 차림의 정장을 맵시 좋게 차려 입은 저 여자의 이름은 차소연.

거의 항상 최서윤의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최서윤의 언니 같은 인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서준 님.”

차소연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이며 말끔한 인사말을 건넸고 나는 쓴웃음과 함께 뺨을 긁적였다.

차소연은 항상 나를 한서준 ‘님’ 이라고 불렀기에 여러모로 민망했다.

몇 번이나 그만둬 달라고 말했지만 차소연은 꿋꿋이 한서준 님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소연 씨. 요즘은 거의 못 봐서 그런지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까 좀 반갑네요.”

“네.”

“아무래도 요즘 많이 바빴나봐요?”

“네.”

한 번 넉살을 떨면서 친한 척을 좀 했지만 차소연은 무덤덤한 얼굴로 짧고 간결이 대답할 뿐이었다.

그 덕분에 차소연과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가 조금 애매해졌다.

차소연은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며 항상 묻는 말을 짧게 대답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와 대화를 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말을 많이 하기 싫은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됐든 계속 더 말을 걸어봐야 ‘네’ 혹은 ‘아니요’ 라고 대답할 게 불 보듯 뻔했기에 나는 이제 그만 차소연의 등 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소연의 뒤에 한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최서윤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서윤이는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서준 씨.”

조금 수줍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서윤이를 쓰윽 훑어보았다.

새하얀 블라우스와 짙은 네이비 색상의 스커트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산뜻함이 더해지도록 깔끔한 리본을 덧붙였다.

전체적으로 사랑스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코디였다.

흔히 말하는 여친룩 스타일?

‘꽤 산뜻하게 입었네?’

평소의 서윤이는 귀여운 스타일 보다는 청순한 스타일을 더 선호하였기에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다.

“서윤아. 옷 되게 잘 어울려.”

“그, 그런가요……?”

“응. 그런데 오늘은 좀 스타일이 다르네? 좀 더 산뜻하다고 할까?”

웃는 얼굴로 가볍게 칭찬 한두 마디 해주자 서윤이는 조금 낯간지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근히 싫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서준 씨도 정말 잘 어울리세요. 머, 멋져요.”

서윤이는 흘끗흘끗 시선을 흘기며 모기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뭐, 나름 차려입는다고 차려입었는데 솔직히 너하고 비교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인사치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잖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슬프긴 슬프네…….

“아무튼 이제 슬슬 나가 볼까?”

“네.”

그렇게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설마 또 리무진을 타고 왔을까?

나는 조용히 차소연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각진 모양의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다행히 리무진 같은 차량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좀 평범(?)해 보이는 차량이었다. 세단의 일종 같은데…….

“오늘은 리무진이 아니네?”

“아, 네.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조금 더 대중적인 차량을 골라 봤어요.”

괜히 리무진 같은 걸 타고 다녀서 필요 이상으로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겠지.

“이거 모델이 뭐야?”

“글쎄요. 저는 차량에 별 관심이 없어서…….”

서윤이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차소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차소연은 차량 뒷문을 열어주면서 대답한다.

“롤스로이스 팬텀 8세대 모델입니다.”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언니.”

“별 말씀을.”

“응?”

로, 롤스로이스?

전혀 평범한 차량이 아니잖아!

대충 가격이 6억에서 8억 정도는 되는데…….

‘역시 부잣집 아가씨네.’

금전감각이라고 할까 세상물정이라고 할까.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얼마 전까지는 통장에 수백억이 있어서 나름 부자라고 할 수 있었지만, 소시민적인 사고방식은 바뀌지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뼈 속까지 흙수저인가 보다.

뭐, 부모님이 헌터출신이었던 덕분에 흙수저까지는 아니고 은수저는 됐지만.

“서준 씨?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서윤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손을 휘휘 젓고, 이만 차량에 탑승했다.

푹신푹신한 뒷좌석 시트가 나를 반겨주었다. 아 좋네, 좋아. 역시 비싼 차량은 다르구나. 내 자동차는 값싼 중고찬데. 돈 있을 때 새 차 좀 뽑을 걸 그랬나?

‘지금 후회해 봤자 늦었지, 뭐. 아, 진짜 영약 좀 구입하느라 돈을 다 써가지고…….’

통장에 꽂혀 있었던 수백억이 영약 값으로 치환되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영약을 구입한 것은 결코 후회하지는 않지만 수백억이 증발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냥 통장에 수백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는데…….

‘지현이가 준 블랙카드가 있긴 하지만, 이건 웬만해서는 쓰지 말자.’

나는 지갑 속에 꽂혀있는 블랙카드를 한 번 생각해보았다.

지현이는 인센티브랍시고 블랙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지만 생각 없이 남의 카드를 긁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짓임이 분명했다.

왠지 여자친구에게 용돈 타먹고 사는 것 같아서 더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어느덧 차소연의 목소리와 함께 차량이 출발했다.

스무스하게 이동하는 차량의 움직임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확실히 좋은 차량이긴 하나보다. 내 중고차랑은 차원이 다르네.

‘흐음.’

나는 흘끗 앞좌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운전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소연이었다.

명색의 데이트임에도 불구하고 차소연을 대동하는 것이 조금 이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큰 일이 없는 이상 차소연은 거의 항상 서윤이 곁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는 영화 보기로 했지 서윤아?”

“네? 아, 네. 그렇죠.”

서윤이는 조그마한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주머니에 놓기 직전 흘끗 수첩의 앞부분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데이트 어쩌구 저쩌구 라는 글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데이트 계획에 대해서 수첩에 적어 놓은 모양이었다.

‘데이트 코스를 서윤이에게만 맡기는 건 조금 그렇긴 한데…….’

하지만 서윤이가 이번만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말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영화, 영화라……. 괜찮으려나?’

지금 같은 시간에는 사람들이 많을 게 뻔했다.

그리고 서윤이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상당히 꺼려했다.

괜히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물론 서윤이 왈, 괜찮다고 말했지만.

“로맨스 영화를 예약했다고 했지?”

“서준 씨는 남성분이니까 역시 액션 영화 같은 걸 선호하시나요?”

“아니, 괜찮아. 애당초 저번에 네가 물어봤을 때 로맨스 영화도 좋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서준 씨. 괜히 저에게 맞추실 필요 없어요, 서준 씨가 좋아하는 걸 저도 알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 결국 영화관에 다다랐다.

영화관 주차장에 도착하자 차소연이 하차하여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서윤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차에서 하차했고 나 또한 서윤이를 뒤따랐다. 차소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그럼 좋은 시간이 되시길.’ 라는 말과 함께 차량에 머물렀다. 아무래도 영화관 내부까지는 따라올 생각이 없는 모양. 뭐, 나름 데이트라서 그런 걸까? 운전수 역할만 해줄 생각인 것 같았다.

나와 서윤이는 차소연을 뒤로 한 채 영화관 내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주말을 맞이해서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왔을 텐데 왜 아무도 없을까?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걸어갔지만 걷는 내내 사람들의 그림자는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매표소까지 다다르자 주변에 팝콘 판매대와 매점, 화장실이나 무인발권기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매표소 주변을 휙휙 살펴봤다.

그러나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은커녕 직원들까지 없다는 사실에 나는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윤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없는 거…… 설마 서윤이 너 때문이야?”

“사실 오늘 하루 영화관 건물을 대여했거든요.”

영화관 건물을 대여해?

“영화관을 대여했다는 게 아니라 영화관 건물을 자체를 통째로 대여했다고?”

“네.”

서윤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건가요?”

조심스레 질문하는 서윤이를 바라보며 나는 관자놀이를 살살 긁적였다.

뭐라고 할까. 영화관 건물을 빌린다는 사고방식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당황했다. 이게 바로 부르주아인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그렇지 영화관 건물 자체를 대여할 수가 있지? 한낱 프롤레타리아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

“어쨌든 서윤이 너 덕분에 영화관을 다 전세를 내보게 됐네. 영화관 올 때마다 북적거리는 게 싫었는데. 마침 잘됐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시시콜콜한 걸 따져봐야 좋을 거 없잖아.

“그럼 영화나 볼까…… 어느 상영관으로 가면 돼?”

“아무 곳이나 가도 괜찮아요.”

“그래?”

나는 픽 웃으며 가장 가까운 상영관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서윤이는 별세계 사람이구나, 하고.

부잣집 아가씨와 서민이 연인이라…… 뭐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설정이긴 했다.

그게 지금 우리 관계였지만.

***

“영화관이요?”

“네. 아가씨.”

실시간으로 오세견의 연락을 받고 있는 최연아는 입술을 한 번 꽉 깨물더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건물을 통째로 빌려서 영화관을 이용하다니…….’

최연아가 알고 있는 언니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한 행동이었다.

건물 보수공사라는 핑계로 영화관을 통째로 대여하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언니였기에 더더욱 최서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한 영화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었던 언니가 건물까지 대여하면서 영화를 보러 갔다고?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나름대로 서민(?) 같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유가 어찌 됐든 그 남자 때문에 언니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둘이 금방 헤어질 줄 알고 큰 신경을 안 썼는데…… 젠장.’

최연아는 반사적으로 손톱을 깨물며 생각했다.

언니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었다.

오랫동안 언니를 짝사랑했던 박규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어찌됐든 정신감응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언니가 좋은 사람을 찾아 만남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최연아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언니가 만나고 있었던 사람이 한서준이었다니…….

뒷조사를 한 건 조금 미안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잘한 것 같았다.

미리 뒷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언니가 한서준 같은 파렴치한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차릴 뻔했다.

정신감응능력을 가지고 있는 언니가 왜 그딴 인간을 만나는 걸까?

한낱 서민출신인 걸로 모자라 E랭크 헌터 그리고 이지현과 류예린 하고 염문이 돌고 있는 인물과 만남을 갖다니.

최연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카사노바에게 언니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언니라면 분명 한서준의 속내를 꿰뚫을 수 있을 텐데 설마 그 바람둥이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건가?

10강 이지현과 성씨세가 류예린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그런 사람들을 후리고(?) 다닐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여하튼 최연아는 이 상황을 계속 좌시할 수 없었다.

언니가 만약 박규성과 만났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았겠지만 한서준 같은 놈을 절대, 절대 안 된다.

그딴 놈과 계속 만나봐야 결국 상처를 받는 건 언니일 테니까.

“세견 씨, 계속 수고해줘요.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하시고.”

“네. 아가씨.”

최연아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딴 남자에게서 언니를 구해내겠노라, 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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