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기억을 되찾자(1)
* * *
“이런 건 현실이 아니라고…… 어째서 언니가 당신과 아이를……?”
최연아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렸다.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는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최연아의 얼굴을 보자 나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먹힐 줄이야.
“거짓, 거짓말이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결혼도 하지 않은 주제에. 그리고 아버지께 허락도 받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임신이라니.”
“꼭 결혼을 해야 애를 낳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임신한 건 아니니까. 알다시피 저희는 아이 한 명 정도 키울 능력과 재산이 충분하잖아요.”
최연아의 두 눈동자가 바람 앞의 낙엽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 말을 부정하기 위해 애써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 ‘혹시?’ 라는 생각이 싹 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음파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임신했다고 고백했는데 대놓고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초음파 사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직접 두 눈으로 본 증거품의 위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급작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저와 서윤이의 관계를 인정받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몇 주전에 임신을 하게 됐는데 이 사실을 처제에게 먼저 말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네요.”
“그, 그런…….”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말하길 예부터 임신공격은 아주 유효한 전략이었다.
괜히 막장 드라마에서 허구헌 날 ‘저 그이의 아이를 임신했어요!’ 라고 외치며 신데렐라 역전극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장인어른을 설득하기가 더 쉬워진 거겠죠?”
“당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겠죠.”
“협박이라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사랑의 결실이 어떻게 협박 거리가 될 수 있겠어요?”
“……당신.”
창졸간에 최연아는 찌릿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진짜…… 진짜…… 언니가 당신 아이를 가졌어요? 정말요?”
“못 믿겠으면 서윤이랑 통화라도 해보실래요? 아니면 따로 산부인과로 가서 검사받아도 돼요.”
진짜로 산부인과에 가서 재검사를 받으면 좀 곤란하겠지만, 이렇게 당당히 말하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당신 정말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언니는 왜…… 저 사람과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거예요, 언니……?”
최연아는 힘없이 어깨를 내려뜨린 채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완전히 믿는 모습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서윤이와의 만남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임신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연아가 끝까지 방해할 것 같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연아라면 분명 끝까지 물고 늘어질 테니까.
“자 그러면 처제.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
“언젠가 한 번 서윤이와 함께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기로 하죠. 아, 그리고 임신 사실은 웬만해서는 비밀로 해주세요. 저희 쪽에서 적당한 타이밍에 밝힐 생각이니까.”
“…….”
“최연아 씨가 멋대로 밝히면 서윤이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잖아요? 장인어른을 설득하는 건 저 하고 서윤이에게 맡기세요.”
“…….”
“조카 얼굴 기대되지 않으세요? 그럼 저는 이만.”
‘…….“
최연아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통보에 가까운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연아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끝까지 내 말을 부정하며 억지를 부릴까봐 살짝 걱정하였는데 지금 당장은 넘어가주는 것 같았다.
일단 한동안은 잠잠히 있어주려나?
몇 달만 시간을 끌면 되는데 말이야.
‘돌아가서 서윤이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 좀 맞춰야겠다.’
서윤이 뿐만 아니라 다른 그녀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임신했다는 거짓말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뤘기에 일일이 말하지 않았거든.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살짝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으므로 오해하지 않게 잘 설명해줘야겠다.
‘뭐, 그래도 진짜 임신한 것도 아니고 그냥 최연아를 속일 요량으로 거짓말을 한 것뿐이니까 충분히 이해해주겠지?’
나는 다소 가볍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
“임신?”
“선생님?”
“하…….”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에델린과의 결전을 대비하여 한창 클랜 하우스에 모여 훈련을 받고 있었던 그녀들에게 다가간 나는 이왕 다 모인 김에 설명해줄 겸 해서 최연아와 있었던 일을 적당히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들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
좀 많이 날카로운데?
“지금 뭐라고 했어? 임신?”
“응.”
지현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샐쭉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두 눈을 껌뻑였다. 지현이는 불만스레 입술을 씹었다.
“너 미쳤니?”
“아니 진정해봐. 그냥 거짓말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해? 한서준 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최연아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어. 그렇지 서윤아?”
나는 슬쩍 서윤이를 쳐다보았다.
계속 지현이와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서윤이가 나를 옹호함으로서 내 말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유효한 전락일 터.
서윤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뺨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연아 성격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허락을 받지 못했을 거예요…….”
최연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서윤이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연아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아이니까요. 끝까지 서준 씨를 방해하려고 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거예요.”
“최연아도 알고 있지 않아? 우리랑 서준이가 어떤 관계인지.”
지현이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좋든, 싫든, 나를 건드리게 되면 지현이를 포함한 그녀들이 가만히 있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지현이었다.
아무리 일성그룹의 차녀라고 할지라도 이쪽에는 흑산회, 성씨세가 등등의 후계자가 있었다.
괜히 분쟁이라도 일으켰다가는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최연아일 것이다.
후계자 구도가 정리되지 않는 일성그룹의 최연아로서는 우리들과의 마찰은 최대한 피하고 싶을 터.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서준이를 건드리겠다는 건 그만큼 서윤이 널 생각한다는 거겠지? 좋은 동생을 뒀네.”
지현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긴. 그렇게 끔찍이 언니를 아끼는 동생이라면 저런 바람둥이, 변태, 카사노바에게 언니가 농락당하는 걸 죽어도 용납 못하겠지.”
“아니, 지현아. 농락이라니…….”
나는 애써 지현이의 말을 부정했다.
바람둥이, 변태, 카사노바, 네다리, 양아치 등등의 말은 다 인정할 수 있어도 농락까지는 아니잖아 농락까지는.
“그건 그렇고 선생님.”
“왜 그래?”
“그래서 두 분 데이트 했을 때 결국 했어요?”
“……?”
뭘 해?
“그 때 이후로 두 분 사이가 좀 묘한데…… 하신 거죠? 그렇죠? 서윤 언니.”
“네, 네?”
예린이는 휙! 하고 불그스름한 눈빛으로 서윤이를 바라보았고 알 수 없는 압박을 느낀 서윤이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애써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예린 씨.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고양이 코스프레를 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서윤이는 한순간 멈칫 했고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예린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방금 말을 더듬은 것 같은데? 뭔가 찔리는 일이라도 있나 봐요? 솔직히 말해봐요 서윤 언니. 했죠? 그쵸?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만.”
“고, 고양이요?”
서윤아 고양이에 반응하지 마.
“뭐, 저 녀석이라면 분명 그딴 짓을 하고도 남았겠지.”
잠자코 보고만 있었던 화련이가 맞장구를 쳤다.
슬쩍슬쩍 본인의 아랫배를 매만지고서 첨예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아무래도 흑산회 대련장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모양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내가 좀 심하긴 했었지. 화련이에게 불공정노예계약 비슷한 짓도 했고.
“임신했다는 거 진짜 아니에요?”
“뭐? 야야, 왜 이래 예린아. 아니라니까?”
“아니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저희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런 발언을 최연아 씨에게 한 것도 좀 이상하고. 최연아 씨가 외부로 발설할 수도 있는 일인데.”
“최연아가 서윤이에게 피해가 갈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예린이는 다시금 서윤이를 노려봤다.
서윤이는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너 눈빛 좀 살벌하다? 오랜만에 스위치 켜진 건 아니지?
방금 전까지 대련중이었던지라 예린이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 오늘따라 검날이 더 반짝여보였다.
“예린아. 내 말 못 믿겠어?”
“믿긴 믿는데…….”
“난 못 믿겠는데.”
예린이가 나를 껴안으며 얼굴을 파묻고 있는 와중 뜬금없이 화련이가 팔짱을 낀 채 딴죽을 걸었다.
아니, 얘는 또 왜 이래?
“물론 네가 최서윤과 떡을 쳤든 말든, 애를 뱄든 아니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말이 좀 까칠한 것 같은데. 너 혹시 삐졌어?”
“삐져? 내가? 하. 지랄 마 한서준.”
화련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레즈베리 년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함이거든?”
레즈베리에게 급습 당해 탈탈 털린 게 정말 분한 모양이다.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박박 갈고 있을지도?
“그래, 고마워.”
“뭐래?”
“아니, 그냥 고맙다고.”
“참나. 한서준 네가 고마워할 게 뭐가 있냐?”
화련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 화련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독자적으로 움직여 복수를 꾀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함께 움직여주고 있었다.
입으로는 투덜투덜 거려도 날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그놈의 계약서로 강제할 생각이면서.”
“아하하.”
나는 미나처럼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계약서, 계약서…… 확실히 계약서로 강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너 그거 해제하려면 얼마든지 해제할 기회가 있었잖아? 그런데 왜 해제 안 해? 뭐, 이렇게 직접 물어보는 건 긁어 부스럼이겠지.
‘나름의 명분이라는 건가?’
순순히 내 말을 따르는 건 자존심이 상하니까 계약서로 명분삼아 어쩔 수 없이 나를 돕는 거라는.
화련이 얘도 참 성격이 삐뚫어졌다니까.
“레즈베리에 대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돌연 지현이가 화재를 던졌다.
그녀들의 시선이 어느새 지현이를 향해 집중됐다.
지현이는 무덤덤한 얼굴로 계속 해서 운을 띄웠다.
“어찌됐든 샤를테르하고 결판을 내야하잖아?”
“어. 그렇지.”
“이제 샤를테르하고 만나기까지 몇 달 밖에 남지 않았어.”
탑 최정상층 바로 직전까지 공략하면 만나서 대화를 나누자고 약속을 했다.
“예전에 너랑 내기를 했다며? 누가 먼저 탑을 정복하는지. 그렇다면 만나서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잖아?”
“아마 그러겠지?”
“하아. 진짜. 솔직히 샤를테르가 왜 직접 너랑 만나자고 하는지 의문이야.”
그도 그럴 것이 성천교단을 장악하고 있는 에델린 폴 샤를테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사로잡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아무리 지현이, 서윤이, 화련이, 예린이가 보호해준다고 한들 상대방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종교집단의 수장이다.
귀찮게 나랑 내기를 할 필요도 없고, 만남을 가질 필요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나는 진작 에델린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다.
“듣기로는 샤를테르 그 여자는 너를 상당히 집착하는 것 같던데…….”
“집착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진짜 에델린이 왜 그렇게까지 날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는 항상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에델린이었지만 그 내밀한 속에는 거무죽죽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어슴푸레하게 깨닫고 있었다.
회귀 전에 에델린과 뭔가 있었던 건가?
하지만 회귀 전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봐도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애당초 에델린은 처음부터 나한테 매우 호의적이었으니까.
처음 나에게 다가와 열성팬이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나를 도와주었다. 물론 회귀 전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 그 중간에 에델린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허나 나에 대한 호의가 비정상적이라는 것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상대를 이렇게 놔두는 것만 봐도 뭐…….’
나 같았으면 당장 붙잡았을 텐데.
에델린은 왜 나를 방목하는 걸까?
그리고 너무 호의적이잖아. 에델린은 날 볼 때마다 항상 웃었다. 꿍꿍이가 없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은 확실했다.
“너 기억을 잃기 전에 샤를테르의 목숨을 노렸다고 했지? 그 결과 샤를테르는 몇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가 됐고.”
“어, 어.”
“그런데 샤를테르는 왜 널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지 모르겠네. 너 회귀 전에 샤를테르랑 무슨 관계였어?”
“응?”
지현이는 찝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사귀기라도 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