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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었더니 S급 여친이 너무 많음-179화 (178/216)

〈 179화 〉 한서준의 기억(2)

* * *

보글보글.

바닷속 깊숙이 가라앉는 것처럼 의식이 점점 매몰되어갔다.

심해 밑바닥까지 수몰 되어 차차로 의식이 사그라질 때 쯤 어슴푸레한 기억의 파편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거품을 뿜어내며 주위를 어슬렁, 어슬렁 맴도는 기억의 파편.

낡은 쇠사슬로 칭칭 속박되어 더 떠오를 수 없는 저 조작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바닷속에서 호롱(oil lamp)처럼 몽롱하게 빛나는 저 파편 쪼가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드르륵 드르륵 하면서 쇠사슬을 굳게 잠가놓았던 자물쇠가 서서히 해제되었다.

모든 쇠사슬을 벗어던진 기억의 조각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지만 점점 몸 덩어리를 부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았던 기억의 파편 속 문뜩 지현이가 죽은 날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주마등처럼 옛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무죽죽한 핏물로 뒤덮인 도심지 안.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던 콘크리트 건축물들은 폭삭 주저앉아 있었으며 아스팔트 도로는 엉망진창으로 훼손되어 있었고 수많은 차량들이 한낱 고철로 화하여 텅 빈 도로 위에 방치된 채 나뒹굴러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은 마치 멸망한 세상의 일각을 연상케 했다.

나는 반쯤 망가진 서울 한복판을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시선에 밟히는 것은 온통 시체와, 사체와, 시신 뿐.

거무죽죽한 핏물이 강을 이루고 있었고 수많은 사체들은 쓰레기마냥 방치되어 더러운 땅바닥에 몸을 눕혔다.

숯처럼 검게 그을린 고깃덩어리, 기다란 송곳에 꿰뚫린 고깃덩어리, 으깨지고 짓눌린 고깃덩어리, 발기발기 찢겨진 고깃덩어리…….

정말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모습이었다.

인간, 괴수 할 것 없이 고깃덩어리로 화해 질척질척한 피 웅덩이에 매몰되어 있었다.

너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피어올라 콧속을 파고 들어 헛구역을 유발하였지만 나는 발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이 지옥 장소에서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현이라면 분명히 무사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 서준아…….”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살살 두드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애타게 찾고 있었던 사람의 목소리니까.

“지현아!”

멀찍이 쓰러져 있는 인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지현이의 주변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山血?).

괴수들의 시체가 산을 쌓고 있다.

혼자서 저만큼의 괴수들을 쓰러뜨린 거야?

“……바보야. 여긴 왜 왔어.”

지현이는 핏물을 베개 삼아 조용히 몸을 눕힌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쿨럭,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가 봐야지.”

어째서 불안한 예상은 틀리지 않는 걸까.

설마 했는데 지현이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아니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치명상에 가까웠다.

복부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려 있어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너, 너 상처가…….”

나는 다 무너져가는 얼굴로 지현이를 내려다보며 어떻게든 지혈하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에 불과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다.

“……나, 이미 늦은 거, 하아, 알잖아?”

너 10강 헌터잖아.

천하의 이지현이 무슨 약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정도 상처는 거뜬하잖아? 응?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지현아. 제발…….

검붉은 핏물을 울컥 게워낸 지현이는 힘없는 미소와 함께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상냥하지만 덧없는 손길로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꽈득 깨물 뿐이었다.

나는 마음속은 슬픔과 절망으로 얼룩져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던 지현이는 찬찬히 운을 띄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으, 한 번 말해보는 거였는데.”

일말의 허탈함이 뒤섞인 목소리와 함께 나를 빤히 쳐다보던 지현이는 이내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인 채 숨을 거뒀다.

지현이의 손이 스르르 떨어짐과 동시에 동공에서 빛이 사라졌다.

간헐적으로 들썩이던 가슴은 어느새 잠잠해졌으며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완전히 풀려버린 지현이의 동공을 바라보며 나는 달달달 떨리고 있는 손으로 애써 지현이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흔들었다.

현실을 부정하듯 지현이의 몸을 계속 흔들어보았지만 구관절 인형마냥 달망거리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지현아……? 이지현…… 야, 자, 장난치지 마.”

지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애꿎은 머리카락만을 연신 휘날리며 침묵을 유지할 뿐.

“지현아, 너, 진짜…….”

지현이가 죽었다고?

그 이지현이?

“제발 좀…….”

나는 지현이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어렸을 때부터 함께 했던 소꿉친구가 목숨을 잃었다.

***

문뜩 지현이는 나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순한 소꿉친구? 옛 인연? 친한 친구?

수많은 단어로 나와 지현이의 관계를 정의 내릴 수 있지만 단순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코맹맹이 어린아이마냥 속 좁게 지현이를 질투하고 시기했던 적도 있었다.

괜스레 지현이와 함께 있으면 의기소침하였으며 비루한 감정으로 시작된 거무죽죽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나를 한껏 괴롭혔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지현이를 선망했다.

대한민국에서 내놓아하는 능력자들을 모조리 다 젖힌 채 홀로 10강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나랑 어렸을 적부터 반쯤 동거동락 했던 친구가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쳤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무척 자랑스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현이랑 연락을 끊고 거리를 뒀지만 마음속으로는 지현이를 응원했다.

어찌됐든 지현이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소중한 인물이었으니까.

이미 타계한 부모님을 제외하고 나랑 가장 인연이 깊은 인물이 바로 지현이였기 때문에 헌터로서 승승장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축복했다.

그런데 지현이가 내 눈앞에서 죽었다.

죽어버렸다고.

­ 뭐야. 여기서 뭐하냐?

­ 흥. 바보야 이제 와서 왜 아는 척?

­ 뭐래는 거야. 괜히 틱틱 거리지 말라니? 하 나참.

­ 야, 야! 너 진짜! 가만 안 둬! 거기 안 서?!

아스라이 지현이와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이내 표홀 했다.

이제는 다시 듣지 못할 지현이의 목소리.

한낱 추억으로 화해 머릿속에 고이 저장되어 있을 뿐.

살아생전 지현이와 하하호호 이야기를 떠들 일 따위는 다시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을 끊는 게 아니었는데.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다.

한낱 짐꾼으로 활동하다 비명횡사하는 경우는 왕왕하니까.

만약 탑을 오르다가 죽으면 부모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반쯤 목숨을 놓은 채 짐꾼으로서 삶을 구가했다.

그런데 왜 네가 먼저 죽는 건데?

처음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일했던 내 세상이 유리로 된 찻잔처럼 쨍그랑 하고 깨져버렸다.

희희낙락 방송 일을 꿈꾸며 간간히 인터넷 방송을 함과 동시에 친구들과 덧없이 웃고 떠들고 술안주와 짓씹었던 일상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것이다.

부모님은 실력 있는 헌터였던지라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괴수들로 인한 사건사고는 끝임 없이 떠들어댔지만 솔직히 말해 남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교통사고 마냥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안일하게 생각하듯이.

하지만 비극은 언제나 갑작스레 일어나는 법.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꿈꾸었던 방송 일을 그만두고 대학교를 자퇴하였으며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오로지 괴수를 죽이고 탑을 오르기 위해 지금껏 영유하고 있었던 안락한 삶은 내팽긴 채 약육강식의 정글 속으로 발을 내딛은 것이다.

약육강식의 수순에 따라 당연히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건만 정작 죽은 것은 다름 아닌 지현이.

부모님에 이어 지현이까지 죽음을 맞이하자 나는 생각 이상으로 내 삶에 있어서 지현이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지현이가 죽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았다.

지현이가 죽어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탈력감과 회의감.

말도 안 될 만큼의 처절한 상실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 강해지기로.

마음속 깊은 곳 언저리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거무죽죽한 감정에 몸을 맡긴 나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은 옛 인연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류예린이.

옛날부터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쫄래쫄래 뒤따랐던 소녀였지만 지현이와 비슷한 이유로 부담을 느낀 나는 서서히 예린이를 멀리 하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쯤 인연을 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도와달라고 찾아간다, 라…….

하하.

그것 참 시발스러운 생각이다.

짐승새끼가 아니라 사람새끼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옛날의 나였다면 곧 죽어도 결코 예린이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발상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멋대로 인연을 끊고, 멋대로 연락을 끊은 주제에.

도대체 무슨 염치로 도움을 요청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양심 따위, 자존심 따위, 내려놓았다.

지현이의 죽음에 심정으로 커다란 변화가 생긴 탓이다.

괴수를 죽이고 탑을 오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얼굴에 철판을 깔 생각이다.

어차피 짐꾼으로 계속 활동해봐야 괴수를 죽이기커녕 어느새 비명횡사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조금이라도 강해지려면 외부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참 뻔뻔하네요.”

그렇게 예린이를 찾아갔건만.

예린이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오랜만에 해우한 예린이의 얼굴은 북부의 한파처럼 쌀쌀맞았다.

예린이는 첨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조소를 흘린다.

“자기가 아쉬울 때만 찾아오네요?”

붉은 눈동자는 거무죽죽하게 번뜩였다.

핏빛처럼 새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경멸과 혐오 그리고 멸시였다.

“내가 왜? 당신을 도와야하는데?”

시종일관 싸늘한 모습으로 응대한다.

“그깟 일로 나를 부른 거예요?”

하아, 한숨을 내쉰 예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시간만 버렸네.”

예린이는 짧게 혀를 찼다.

“이봐요.”

눈꼬리를 올올히 올린 채 읊조린다.

“내가 예전처럼 당신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올 줄 알았어?”

“…….”

“당신이 한마디 하면 바보처럼 좋아했던 그 꼬맹이로 보이는 거예요?”

“…….”

예린이의 눈빛은 지금 막 단조를 끝낸 칼날처럼 첨예하여 살갗을 저미는 듯 파고 들어왔다.

원망과 증오가 뒤섞인 눈동자였지만 알게 모르게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현재의 예린이는 철혈이라고 불릴 만큼 성정이 잔혹하고 포악한 걸로 유명했다.

나와 인연이 끊긴 후 성씨세가로 찾아가 형제자매를 쓰러뜨리고 반쯤 강제로 당주의 자리에 올라설 정도였으니.

반발하는 자들을 무참히 베어 가르며 본보기로 삼았다.

저항하는 파벌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숙청했다.

그러한 예린이가 나와 직접 만나서 이렇게 대화를 해준다고?

분명 나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방증이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을 터.

이렇게 구구절절 원망어린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신호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나를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예린이는 아주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툭 하고 말 한마디를 내뱉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됐어요. 나 먼저 일어나 볼 테니까 당신은 다시 이 딴 일로 날 찾아오지 마요.”

나를 한 번 흘겨본 후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치 잡아달라는 듯 예린이의 뒷모습이 애처로워보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멀어져가는 예린이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다시금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예린이는 경멸하는 얼굴로 나를 쏘아볼 뿐.

창졸간에 손목을 꽉 붙잡은 채 나를 힘껏 집어던졌다.

나는 낙법도 취하지 못한 채 쓰러졌으며 예린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평소 무뚝뚝한 얼굴로 냉랭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던 예린이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 대한 감정이 많다는 뜻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애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반발작용으로 혐오를 내비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나를 싫어했다면 애당초 상종자체를 하지 않았을 터.

지금 예린이가 나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아마 애증일 가능성이 높다.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감정.

나는 그 감정을 이용하기로 했다.

정말 불연소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지만 지현이까지 죽은 마당이었으므로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괴수만 죽일 수 있다면, 쓰레기가 되어도 상관이 없다.

빌어 처먹을 괴수들을 쳐 죽이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강해져 탑을 오를 것이다.

반드시.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린이의 도움으로 인해 강해질 수 있었다.

능력 사용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며 성천교단의 도움까지 받아 하루가 멀다 하고 쭉쭉 성장해 나아갔다.

어느새 나는 헌터로서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으며 예린이는 택택 거리면서도 항상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맨날 내가 싫다는 둥, 짜증나니까 웃지 말라는 둥, 겉으로는 혐오를 내비쳤지만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예린이를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지만 언젠간 꼭 은혜를 갚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

그러던 어느 날.

촤악! 하고 핏물이 솟구쳤다.

불그스름한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잿빛 머리카락에 새빨간 혈액이 뒤덮인다.

예린이의 몸이 허물어진다. 어째서? 아니, 왜 네가?

“쿨럭! 쿨럭…… 아…….”

예린이는 힘없이 내 품에 안긴다.

예린이를 공격했던 괴수 역시 카운터에 맞아 쓰러진다.

반사적으로 예린이의 몸을 꽉 붙들어 맸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예린이의 오른손이 없다는 걸 눈치 챘다.

어깨 아래가 휑하다. 통째로 뜯겨져 나갔잖아. 예린이의 오른팔이 허공에 맴돌다가 이내 땅바닥을 나뒹굴렀다. 어깨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서둘러 어깨를 지혈하려고 했지만 가슴과 옆구리에 큼직한 이빨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늑골을 으스러뜨린 채 몸속 깊숙이 꿰뚫고 들어간 어금니.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어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군다나 급소에 찔렸잖아.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예린아!”

“아…… 이런…… 쿨럭…….”

“너 왜!”

“그냥…… 발을 헛딛었네요…….”

만약 예린이가 나를 밀쳐주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었을 터.

“내가 몇 번이나 쿨럭, 말했잖아, 요…… 무리하게…… 파고 들지 말라고…….”

“괘, 괜찮을 거야 예린아. 치료, 그래. 치료하면 돼. 걱정 마. 해독제랑 치료수도 잔뜩 준비했잖아.”

“복합독이라서 제대로 해독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물약도 소용없고요. 쿨럭. 아, 내가 이런 실수를 다 할 줄이야…….”

실수로 대신 맞아주었다면서 핑계 아닌 핑계를 읊조리며 핏물을 내뱉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혹시 기억 하세요?”

예린이는 내 품에 안긴 채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아.”

“나 때문에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며 어머니께 원망 받았잖아요. 그래서 반쯤 집에서 쫓겨난 채 한밤중에 밤거리를 서성였었는데…….”

“예린아 말하지 마. 안정을 취해야 돼.”

“공원에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때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었던 거 기억나세요? 선생님께서 도와 주셨잖아요…….”

예린이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딱 봐도 겁먹은 티가 났어요 선생님……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바보같이…… 그때는 이 사람 대체 뭘까 싶었는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공원에서 만났죠…… 제가 차에 치일 뻔한 것도 도와주고…… 갑자기 막 잔소리로 하시고…… 정말 오지랖 넓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곁에 있었던 에델린이 서둘러 응급처지를 해주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함께 치료수를 쏟아부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시발. 왜 효과가 없는 건데.

“나 있잖아요…… 어머니가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정말 많이 충격 받았어요. 그냥…… 아버지의 딸이라서…… 아버지와 잇는 교두보로서 소중히 생각했다는 사실에…… 한참을 방황 했었죠…….”

“알았으니까 예린아. 가만히 있어.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래서 어머니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난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그깟 남자가 뭐라고…… 버림받은 주제에 왜 그렇게 질질 매달리는지…….”

“예린아, 제발.”

예린이는 내 간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결국 어머니처럼 이렇게 됐네요…….”

흐리멍덩한 얼굴로 희 웃는다.

“선생님께서 절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을 때는 진짜 많이 원망 했었죠…… 맨날 울고…… 멋대로 찾아가봐야 민폐라는 걸 알기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런데 선생님이 먼저 찾아와서…… 나 사실 되게 기뻐했던거 있죠? 나 진짜 바본가봐.”

“예린아.”

“원망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선생님 얼굴을 다시 보니까 차마 원망할 수 없는 거 있죠?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질 게 대할 수 있는데 왜 선생님한테는 안 되는 걸까요……?”

서서히 예린이의 동공에서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 선생님…… 거기 있어요……?”

“예린아? 너 눈이…….”

“선생님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앞이 안 보…… 콜록, 콜록…… 하…….”

항상 새빨갛게 번뜩였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빛이 사라진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나……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만약 그날 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눈꺼풀이 서서히 닫히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스스로를 원망하지 마세요…… 저는 죽을 때가 돼서 죽는 거니까…….”

예린이는 왼팔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향해 뻗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아.”

끈쩍끈쩍한 핏물로 뒤범벅된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선생님 손 따듯…… 해…… 아…….”

그 말을 끝으로 예린이는 죽음을 맞이했다.

“클랜장님…….”

“이럴 수가.”

“으.”

검백령의 클랜원들은 착잡한 얼굴로 나와 예린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나 때문에 예린이가 죽었다며 원망어린 표정을 짓는 클랜원들도 있었다.

비록 예린이가 클랜원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나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던 만큼 예린이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내가 무리하게 강행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예린이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린이가 죽은 이유는 내 탓이었다.

내 욕심 때문에.

“…….”

“괜찮으신가요?”

성천교단의 성천녀 에델린 샤를테르는 숫제 민민한 표정으로 다가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류예린 씨도 말씀하셨잖아요.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서준 씨.”

“……그런가요.”

지현이에 이어 예린이까지 죽었다.

부모님과 지현이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예린이의 죽음은 오로지 내 잘못이었다. 내가 무리하게 강행하지만 않았어도, 예린이와 함께 탑을 공략하지만 않았어도, 애당초 예린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않았어도.

예린이는 죽지 않았겠지.

“서준 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탑 정상에 오르면 되잖아요.”

“그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으라는 겁니까? 탑을 최초로 정복한 자는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에델린은 별다른 말없이 싱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내려면 결국 탑을 오를 수밖에 없겠죠?”

“…….”

그래, 그러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그만 둘 수는 없다.

예린이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소원이라.”

죽음을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고 할지라도 한줄기 희망이 있으면 어떻게든 붙잡아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야만 스스로 견딜 수 있으니.

스스로조차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탑을 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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