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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었더니 S급 여친이 너무 많음-180화 (179/216)

〈 180화 〉 한서준의 기억(3)

* * *

호접지몽(??之夢).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한낱 망상에서 비롯된 일장춘몽일지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하루살이 짐꾼이 죽기 전에 헛된 꿈을 꿨을 수도 있잖아.

회귀, 소원, 탑. 모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비렁뱅이의 미몽마냥 우스울 따름이다.

“…….”

꿈.

그래, 꿈을 꿨다.

정말이지 끔찍한 흉몽이다.

나는 뭣도 없는 한 남자의 일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부모와 좋아하는 사람을 잃고 방황하다 탑을 오르는 남자. 가슴 속에 증오를 품은 채 탑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탑을 오르면 오를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곁에서 응원해주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남자는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후회하고 자책하더라도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죽음 때문에 더욱 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네들의 죽음을 헛된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탑 공략에 집착하고 매달렸다.

그도 그럴게 탑을 공략하면 소원을 빌 수가 있잖아?

겉으로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소원이라는 것을 집착했다.

생각을 한 번 해봐.

괴수, 능력, 탑.

이 모든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현상인가?

신이라는 것이 정말 있어서 탑을 만들어 인간에게 시련을 줬다면, 응당 시련을 이겨낸 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지불해줘야 하는 거잖아?

곁에서 에델린의 이야기해줬을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에델린의 말에 매달렸다.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매달려야만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지금껏 했던 일들은 뭐가 되는데?

그녀들의 죽음 역시 개죽음이 되는 거잖아?

저 하늘 위에 신께서 존재하신다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안 되고야 말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미련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절박했던 탓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탑을 정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탑을 정복하기 위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탑을 정복해봐야 말짱 도루묵이었으므로 내가 먼저 탑을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쓸만한 능력자들을 습격해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능력 충전용 배터리로 사용한 적도 많았다.

처음에는 범죄자들만을 목표로 삼았지만 점점 반복되는 일상 속 인간성이 상실되었고 끝끝내는 선을 넘고야 말았다.

재능 있는 자들을 회유하거나 죽이고, 능력 좋은 자들을 납치했다.

필요하다면 배신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일부러 함정에 빠뜨리는 등 정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해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하지만 괜찮잖아?

탑을 오르면 전부 해결 될 문제니까.

그래 탑, 저기 저 탑을 올라 소원을 빌면 다 되살려 줄게.

그때 가서 원망해도 좋아. 얼마든지 죄 값을 받을 게. 그 후에 살해당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탑을 오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야.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손에 피를 묻혀가며 계속 탑을 올랐다.

후발주자에 불과했던 탓에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보다 재능이 부족했다.

남자는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지도 않고, 용맹하지도 않으며, 운이 좋지도 않았다.

남자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기에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지금껏 앞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

남자가 유일하게 월등한 분야인 ‘능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

남자의 강함은 능력을 흡수한 숫자에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반영구적으로 빼앗는 남자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영구적으로 빼앗는 에델린.

남자와 에델린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였으며 시너지를 발휘하기 좋았으므로 각자의 목표를 위해 최대한 협력한 채 다른 사람들을 배제함과 동시에 탑을 올랐다.

하지만 최초로 탑을 올랐을 때.

남자는, 아니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이뤄주는 만능의 성배 따위는 없다는 것을.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근만근한 눈꺼풀이 차차로 빗떴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열어젖히자, 환한 불빛이 나를 맞이했다.

“……후우.”

오랫동안, 꿈속에서 방황한 기분이다.

아주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수십년과 같았다.

수많은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천천히 되짚어보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한낱 망상으로 치부될 만큼 기묘한 경험이었지만, 자연스레 기억이 녹아들자 나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내 과거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김유완은…… 도망쳤나?’

주변을 휙휙 살펴보았지만 방안은 텅 비어있는 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염동감지와 공간탐지를 활용해 주변을 탐색해 보았지만 김유완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깨어나기 전에 도망친 모양이다.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김유완이 이곳에 있었다면, 당장 능력을 흡수한 후 반실불수로 만들었을 테니까.

김유완의 능력은 쓸모가 많았으므로 웬만하면 흡수하고 싶었다. 조금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전에 살짝 흡수해 놓는 거였는데.

‘반신불수로 만들다, 라…….’

그러고 보니 꽤 살벌한 생각이 아닌가?

기억을 잃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살벌한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문뜩 거울 앞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익숙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평소 이런 표정을 지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무료한 얼굴로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의 기억이 과거의 나에게 영향을 줬다. 뭐랄까. 기분이 좀 묘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내 기억에 장난을 쳐놓은 것 같지는 않는데.’

다시금 기억을 찬찬히 훑어보았지만 김유완이 장난 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로 기억을 온전히 되찾아준 건가?

나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지만 괜스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에델린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한테 죽고 싶은 건 아닐 텐데.

‘뭐, 좋아.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일단은 돌아가 볼까.

그녀들을 만나 이야기해 줄 것이 많으니까.

어디서 보자 뭣부터 이야기해 줘야할까. 성천교단의 정보와 탑 공략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지금껏 에델린이 정보적으로 우위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터. 아, 물론 김유완이 교묘하게 장난만 쳐놓지 않았다면.

“음. 어디보자. 이렇게 하던 거였나?”

나는 혼잣을 내뱉으며 허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꽉 움켜쥐고 잡아당기자 종잇장마냥 찢겨지기 시작했다.

쭉 하고 뜯겨나간 허공 너머 거무죽죽한 공간이 드러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이른바 공간의 틈이라고 불리는 곳.

저 공간 너머 지현이의 클랜 하우스 대련장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허공이 찢겨진 틈 사이로 찬찬히 발을 뻗었다. 미리미리 좌표를 외워놓았기 때문에 목표장소로 공간을 이를 수 있었다.

비록 샬롯 레즈베리처럼 깔끔히 공간을 열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합격점이 아닐까 싶다.

익숙하지 않는 능력을 이렇게 보란 듯 성공시켰으니까.

수많은 능력들을 빼앗아 사용해왔던 기억 덕분에 나름의 요량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공간 너머로 이동했고, 별안간에 클랜 대련장 허공으로 공간도약을 할 수 있었다.

클랜 대련장으로 이동하자 맨 처음 보이는 것은 바로 서윤이, 화련이, 예린이의 얼굴이었다.

각각 대련을 하고 있었는지 무기를 꼬아 쥔 채 긴장어린 표정으로 공간의 틈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샬롯에게 기습당했던 기억 때문인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얼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 저러나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별안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메시지를 하나 보냈었지 참.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세뇌 됐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구절절 이야기를 써놓았을 탓이었을까? 그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선생님……?”

“뭐야 너 공간도약, 어떻게 쓰는 거냐? 정말로 기억을 되찾은 거야?”

“서준 씨? 괜찮으세요?”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로 어제 만났던 얼굴이지만 왠지 모르게 정말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 기분을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반갑고 미안한 감정이 무럭무럭 들끓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반갑게 인사하고 싶었으나 그녀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기회에 한 번 실험에 볼 것이 있었다.

만약 내가 적으로 돌아설 경우 그녀들이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를.

또한 샬롯과의 싸움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기 전이었다면 감히 이런 상상을 하더라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를 위해 그녀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리고 마음가짐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내 상태를 면밀히 파악할 기회가 아니지 않던가?

기억을 잃었을 당시에는 바보처럼 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근1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영약을 섭취했는데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지 자못 궁금했다.

대련처럼 시시껄렁한 것보다는 이렇게 실전을 빙자한 행위가 더욱 효과적일 터.

좀 나사 빠진 생각임과 동시에 그녀들에게 살짝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이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순순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과거 회귀 전과 비교해서 애들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회귀 전과 비교하면 좀 부족하겠지?’

나는 그러한 생각과 함께 서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선…… 생님?”

예린이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죽었을 때가 떠올라 가슴속 한구석이 아릿했지만 이 정도 죄책감과 죄악심 때문에 그만 둘 만큼 편안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독한 짓도 얼마든지 하지 않았던가?

나는 마음속으로 예린이에게 살짝 사과를 건넨 후 서서히 능력을 끌어 모았다. 공격하겠다고 대놓고 선언 것과 진배없는 행위였다. 평소 예린이었다면 당장 반응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저렇게 멍하니 쳐다보는 걸까? 공격 상대가 나라서?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잠깐? 서, 선생님? 왜 그러시는…….”

“야! 류예린 피해!”

쿠웅!

염동력을 이용해 예린이의 몸을 짓눌렀다.

곁에 있었던 서윤이와 화련이는 재빨리 회피하였지만 예린이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예린이는 끙끙 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애를 썼지만 기억을 잃기 전보다 훨씬 강력한 염동력으로 공격을 한 탓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예린이는 상대적으로 신체능력이 낮았다.

지금의 예린이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회귀 전의 예린이었다면 이 정도 염동력 따위는 이겨낼 만큼의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회귀 전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지 않았다.

“한서준 너 미쳤어?!”

“서, 서준 씨.”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화련이와 서윤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현이는 언제 오려나.

솔직히 지현이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가장 궁금한데.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강할지도?

‘뭐, 이렇게 난리를 피우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공간탐지를 한 결과 위층에서 지현이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소란을 눈치 챘을 터. 지현이가 올 때까지 잠시만 상대해 주기로 할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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