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마지막 준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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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갔다.
나와 그녀들은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히든피스를 찾으려 다녔다.
미발견 던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회귀 전의 정보 덕분에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공간조작능력과 미래의 기억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득을 챙겼다.
물론 에델린이 먼저 회수한 히든피스가 많아 살짝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성천교단 보관소에서 훔쳐온 갖가지 물품들과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미리 숨겨둔 보구들 덕분에 그럭저럭 만족 할 수 있었다.
나와 그녀들은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약, 보구, 성유물, 마도구 등등을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또한 그녀들에게 성천교단을 상대할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특히 샬롯, 카멜롯의 능력과 공략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단시간에 이뤄진 속성 교육이었던지라 실전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게 훨씬 낫다.
비록 샬롯 한 사람에게 탈탈 털렸던 전적은 부정할 수 없으나 쓸만한 아이템을 잔뜩 얻었으므로 잘만 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쪽에서 다굴을 한다면 말이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우리 쪽에서 다굴 할 확률보다는 다굴 맞을 확률이 더 크다는 게 뼈아픈 문제였지만.
그러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탑 최정상 층의 특성상 입장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입장 조건이라는 게 존재한다.
일종의 커트라인이라고 할까?
게임으로 비유하면 레벨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최소 A+에서 S 는 돼야 입장이 가능하다.
‘에델린 쪽은 S랭크 능력자들이 많지만…… 뭐, 대부분 쭉정이니까.’
저번에 쳐들어갔을 때 몇 명의 양산형 S랭크 능력자들을 상대해 보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형편이 없었다.
그냥 덩치만 큰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괴수를 상대로는 단순무식하게 압도적인 힘으로 두들겨 패서 상성, 체력, 내구력 등등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겠지만.
“하아, 하아, 하아…… 아, 열 받아…… 어떻게 한 번을…… 하아, 못 이기냐…….”
“후우, 하, 우으…… 서준 씨……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좀 이상할지도 있지만…… 정말 강하시네요…… 기억을 되찾기 전만해도…… 제가 봐드리며 상대해 드렸는데…… 지금은…….”
설핏 여자들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화련이는 대련장 위에 대(大)자로 쓰러진 채 숨을 헐떡였으며 서윤이는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둘 다 수고했어. 피드백은 조금 있다가 해줄게.”
클랜 하우스로 되돌아온 우리들은 오랜만에 대련을 해보았다.
나를 상대로 서윤이와 화련이가 함께 덤볐지만 그녀들은 별다른 효유타를 주지 못한 채 무력화가 될 뿐이었다.
기억을 잃었던 당시에는 서윤이가 살살 봐주며 상대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이 온힘을 전력을 다해도 큰 어려움 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과…… 유의미한 능력 변화는 없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요……?”
서윤이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와 기억을 되찾았을 때의 유의미한 능력 변화는 없다.
하지만 왜 그녀들은 나를 이기지 못한 걸까?
그것은 바로 경험, 기술, 능력 숙련도의 차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녀들의 약점과 버릇 및 능력의 상성, 부족한 부분을 면밀히 알고 있다.
옛 말에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들을 알고 있지만 그녀들은 나를 모른다.
이 차이가 현재의 결과를 만들었다.
속된 말로 정보 유무의 차이라는 것.
“사실 생각해보면 기억을 잃었을 당시에도 능력의 상성은 내가 훨씬 유리했는데 서윤이 너한테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 자체가 좀 어처구니가 없네.”
“그런가요?”
“응. 애당초 흡수 능력 하나만 이용해도 서윤이 너의 공격 대부분은 막아낼 수 있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죠.”
서윤이의 포지션은 이와 같다.
원거리 딜러.
빙속성 마법사.
광범위 캐스팅.
전형적인 마법사 타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와의 상성을 묻는다면 역상성에 가깠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능력과 마법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강력한 공격이 아니라면 몸에 닿는 순간 대부분 흡수된 채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물론 마법 공격은 조금 흡수효율이 안 좋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얻어맞는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나에게는 염동능력과 신체강화능력이 있다.
이 능력들을 적절히 사용하면 서윤이의 대부분의 공격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잃었던 당시에는 서윤이에게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좀 얼척이 없다.
서윤이가 진지하게 싸웠으면 또 모를까 애당초 대련이랍시고 계속 봐줬잖아.
그런데도 맨날 얻어맞기 바빴다니 참 한심하네.
“수고하셨습니다. 아가씨.”
“뭐야 화련아 괜찮아?”
대련이 끝나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차소연과 이솔이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서윤이와 화련이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이었으므로 훗날 탑 최정상층을 공략하기 위해 그녀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차소연과 이솔에게까지 성천교단과 회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맨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몇 번이나 설명하고 숨겨져 있는 던전을 찾아내는 둥 여러 가지 신빙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서윤이와 화련이가 간절히 설득하였기 때문에 일단은 믿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휴우~. 도련님도 참 화끈하시네요. 안 그래요 차소연 씨?”
“예.”
“솔직히 맨 처음에는 회귀자니 뭐니 해서 이게 또 뭔소린가 싶었는데 말이죠.”
깔끔한 정장을 쫙 빼입은 이솔은 희희 웃으며 차소연에게 말을 걸었지만 차소연은 간결하게 대답함으로서 이솔의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항상 웃으며 장난스럽게 조잘거리는 이솔과 항상 무표정으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차소연은 어떻게 보면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윤이와 화련이도 완전히 반대네.’
푸른 머리카락에 조용하고 내향적인 서윤이와 붉은 머리카락에 외향적이고 활발한 화련이.
형제자매끼리 사이가 좋은 일성그룹이었지만 형제자매끼리 사이가 안 좋은 흑산그룹.
이렇게 보니까 진짜 반대되는 것이 많다.
“차소연 씨. 우리 화련이랑 도련님, 잘 어울리지 않아요?”
“…….”
“도련님께서는 활달한 성격을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좀 죄송하지만 솔직히 요즘 같은 시대에 현모양처 타입의 여자는 좀 뒤쳐졌다고 할까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
계속 무시하는 차소연의 모습에 심술이 났는지 이솔은 웃는 얼굴로 도발을 하였다. 대놓고 서윤이를 폄하한 것이다.
“……글쎄요.”
그러자 처음으로 차소연이 반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서윤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차소연이었지만 얼굴이 살짝 굳어진 것으로 미뤄 봤을 때 아무래도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노골적인 도발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서윤이의 폄하는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대련장 위에 누워 계신 분보다는 저희 아가씨가 더 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차소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20~30대 기준으로 여성취향을 조사한 결과 청순하고 가정적이고 조신한 여성을 선호한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그리고 단순한 연인이 아닌 결혼을 전제로 생각해봤을 때 가정에 충실한 여성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뭐, 우리 화련이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는 소린가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만 모든 경우에는 상대적인 평가가 있기 마련이죠.”
이윽고 서윤이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아가씨께서는 한서준 님을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을 많이 하셨습니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부수업도 받고 있고요.”
“우리 화련이도 이것저것 많이 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도련님은 화련이와 갈 때 까지 간 것 같은데 그쪽 아가씨와는 뭐가 있었나요? 사귄지 1년이 넘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건 남녀사이의 적신호라는 거 아닌가요?”
저 두 사람의 말을 요약한다면 ‘우리 애가 더 잘났어!’ 라는 것.
서윤이와 화련이가 본인들의 딸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주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연 언니…….”
“아 진짜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부끄러움은 서윤이와 화련이의 몫인 것 같았다.
“어, 저기요, 여러분?”
그때 미나가 대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나는 대련실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더니 나를 보고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오빠…… 그게 할 말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서윤 언니 여동생 분께서 또 오셨어요.”
“최연아 씨?”
“네.”
질리지도 않고 또 왔나보네.
“요 몇 달간 오빠하고 언니들이 클랜을 비웠잖아요. 그래서 올때마다 되돌려 보냈는데 오늘은 어떻게 알았는지 없다고 말했는데도 계속 억지를 부리셔서…….”
“그래?”
“일단은 로비에서 대기라고 말씀드렸…….”
“이봐요 한서준 씨!”
그때 최연아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등장했다.
미나는 깜짝 놀라 최연아를 만류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연아의 곁에 하이랭커 중 한 명인 오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쪽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요.”
“연아야.”
“언니도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언니. 저한테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미안해.”
“언니를 믿었는데 이렇게 뒷퉁수를 칠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으세요?”
“……그게 말이야.”
서윤이는 살짝 죄책감 어린 얼굴로 머뭇거렸고 최연아는 거침없이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대뜸 으르렁거렸다.
“한서준 씨. 지금 저랑 장난해요? 어떻게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갑작스러운 최연아의 등장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임신 사실이 거짓임을 눈치 챈 최연아가 나를 추궁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끈질기게 클랜 하우스로 찾아왔다.
물론 그때는 한창 히든피스를 찾으러 다니라 클랜에 없었던지라 만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끝까지 추궁할 생각인 것 같았다.
“오. 드라마에서나 보던 전개인데.”
“…….”
이솔은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모를 팝콘을 쩝쩝 거리며 구경했고 차소연은 무료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이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녀들이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소연 씨도 팝콘 드실래요?”
“…….”
“음. 이런 건 먹으면서 봐야지 재밌는데.”
“…….”
이솔의 모양새는 마치 물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과 비슷했다.
“이봐요 한서준 씨! 당신 진짜 제정신이…….”
“상당히 무례하네요.”
최연아가 짐짓 신경질적인 얼굴로 따박따박 쏘아붙이려는 찰나 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최연아의 말허리를 단숨에 끊었다.
“뭐라고요?”
“무례하다고요, 최연아 씨.”
나는 한발자국 발을 뻗었다.
쿵 하는 발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최연아는 서서히 눈썹을 찌푸렸다.
내 반응이 자못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당황한 얼굴로 궁색한 변명을 할 거라고 예상한 것 같다.
그리고 거짓 임신 사실을 빌미삼아 강하게 압박할 속섹이었던 것 같은데 소용없다.
최연아의 등장은 확실히 갑작스러웠지만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진땀을 뻘뻘 흘리며 궁색한 변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일로 당황할 만큼 녹록한 인생을 살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최연아를 바라보았고 최연아는 살짝 짜증섞인 얼굴로 마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확실히 끝매듭을 짓는 게 좋을 듯 싶다.
다시는 최연아가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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