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보는 배우님-31화 (31/274)

31화

연기의 진정성 (1)

며칠 후.

태주는 박우돈 조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영화 포스터에 자신도 들어간다며 촬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윤이도 감독님이 결정하신 거예요. 성계훈 캐릭터가 비록 한 씬이지만, 영화 내에서 중요한 캐릭터라 꼭 넣어야 한다고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포스터 촬영이다.

‘합성으로 작게 들어가는 거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처음에는 뒷모습 대역으로 들어갔던 현장에서 대사 있는 단역을 연기한 것도 감사한데, 이제는 포스터에 자신이 추가된다니.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들뜬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자리에 깊숙이 앉아 애써 진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중협이 그에게 속삭였다.

[쟤네, 너 자꾸 힐끔거린다.]

그쪽을 쳐다보니 몇 명의 여학생들이 그를 보다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태주가 안 보는 척하자 또다시 그를 보는 그녀들.

이중협이 그녀들에게 날아갔다.

여학생들이 보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태주의 사진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홍대에서 버스킹하던 모습, 피르마 영화제 수상 모습 등등 다양한 사진들이 고화질로 떠 있다.

인기 글로 떠오른 게시글에는 댓글이 끊임없이 달렸다.

-피르마 영화제 연기 특별상 수상한 한태주.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도 대박 잘함.

-아역배우 출신이라면서? 쌍갑동 식구들에서 똘똘이.

-진짜 청량하게 잘생겼다. 무쌍 배우들 중 외모 탑인 듯.

-노래도 담백하게 잘한다니까? 은근 만능캐임.

태주에게 돌아온 이중협이 말했다.

[야, 너 인터넷 커뮤에서 인기 좀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직후.

눈치를 보던 여학생들이 태주에게 달려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 사진 좀 부탁드릴게요!”

“사인도요!”

갑작스러운 관심에 태주는 얼굴이 벌게졌다.

* * *

태주는 강남의 한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수 명의 스태프들이 그를 반겨주는 가운데, 박우돈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홍대 버스킹남 오셨네요!”

“……네?”

“태주 씨 SNS에서 유명하던데요? 홍대 버스킹남이라고. 게다가 부른 노래 자작곡이라면서요?”

“네, 제 친구가 쓴 곡입니다.”

“정말 좋더라고요. 그럼, 들어가서 촬영 준비하고 다 되면 여기로 와요.”

“알겠습니다.”

태주가 방에 들어가 메이크업을 받는데, 스태프가 눈웃음을 지었다.

“태주 씨. 몇 주 못 본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요?”

쑥스러움에 태주가 입만 달싹이는 그때.

이중협이 킬킬거리며 끼어들었다.

[‘누나는 더 예뻐졌어요’라고 말해. 가만히 있으면 칭찬해준 상대방이 무안하단 말이야!]

‘오글거리게 뭔 소리를…….’

[김선정한테는 여전히 예쁘다고 잘만 하더니. 태주야, 스태프들 칭찬해줘서 나쁠 것 하나 없어.]

이제까지 그가 조언해준 건 틀린 게 없었다.

태주가 오글거리는 입을 겨우 뗐다.

“누…, 누나도 더 예뻐졌어요.”

태주의 말에 스태프가 광기 어린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뭐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한번 말하면 정 없죠, 두 번은 말해줘야지!”

태주는 씩씩거리며 이중협을 찾았다.

‘이 형이 진짜. 저 놀리려고 그런 거죠?’

[야, 그걸 하란다고 진짜 하냐, 이 순진한 녀석아!]

얄미운 이중협이 스태프 뒤에 숨어 낄낄댔다.

몇 시간 후.

촬영을 무사히 끝내자, 박우돈이 태주를 불렀다.

“이제 영화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아 언론시사회에 VIP 시사회 등, 행사가 많아지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박우돈이 그에게 몇 장의 티켓을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VIP 시사회에 태주 씨도 같이 갑시다.”

* * *

그 시각 ‘그림자 무사’의 투자배급사, XJ 엔터테인먼트.

홍보팀은 조금 전 도착한 티저 영상 최종본을 시사하고 있다.

“이게 윤이도 감독이 컨펌한 영상이라고?”

“네. 이 버전을 제일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럼, 한번 보자고.”

홍보팀장 채윤기는 유독 긴장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윤이도 감독의 ‘그림자 무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음악, 촬영, 편집, 심지어 티저 영상까지 신경 써야 했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포문을 여는 영상.

거대한 궁 안에 홀로 있는 왕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왕.

1인 2역을 한 강재하와 윤수안이 교차하더니.

잠행을 나간 왕비를 지키던 호위무사의 액션씬이 펼쳐졌다.

“어, 이걸 넣었네?”

채윤기의 말에 직원이 설명했다.

“정규범 무술 감독과 윤이도 감독님이 꼭 이 장면은 넣어달라 요청했다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검술을 티저에 안 넣는 건 반칙이라고.”

모두가 홀린 듯 화면을 응시했다.

성계훈이 왕비를 지키려 수 명의 무사들을 홀로 상대하는 장면.

태주가 쓴 복면이 칼끝에 찢겨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애절한 감정이 실렸을 때.

차가웠던 눈빛이 윤수안을 향해 촉촉한 간절함을 보냈을 때.

누가 뭐랄 것 없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됐다, 됐어.”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짓지?”

그러다 다들 채윤기의 반응을 살폈다.

어쨌든 최종 결정권자는 그였으니까.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넘기던 그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치겠다, 진짜.”

“팀장님, 그럼…….”

너무 놀라서 허무한 듯한 얼굴로 채윤기가 말했다.

“어떻게 21살짜리한테서 이런 연기가 나오냐, 표정은 또 어떻고…….”

“현장에서도 연기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홍대 버스킹남으로 SNS에서도 제법 소문났지 않아요?”

“피르마 영화제에서도 연기상 받았다고 하던데요?”

직원들의 말을 들은 채윤기 팀장.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티저 영상은 이거로 가자.”

“좋은 것 같습니다. 한태주가 나온 씬은 분명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겁니다.”

“와, 다시 봐도 CG 같네, 직접 한 씬이 아니라.”

“윤이도 감독님이 혼을 불태워서 찍은 게 확실해요.”

대부분이 긍정의 뜻을 보였지만 몇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팀장님, 단역이 나온 씬을 이렇게 티저에 내세우는 건…….”

“원래 티저에는 눈길을 잡아끌 수 있는 걸 넣는 거야. 그리고 한태주의 저 액션과 연기는 분명히 관객들을 잡아끌 거고.”

채윤기가 확신에 차 덧붙였다.

“기대되는 구만. 관객들이 이걸 보고 들썩일 그 순간이.”

* * *

며칠 후.

태주는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서 설거지하는 중이다.

그런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의 옆을 지나가던 사장이 그를 불렀다.

“태주야, 설거지 그만하고 네가 카운터 좀 봐라.”

“아직 설거지 좀 남았는데요.”

“그건 다른 애 시키면 되니까, 너는 손님들 응대 좀 해.”

여사장이 태주를 보며 씩 웃었다.

“홍대 버스킹남 한태주 배우님, 유명인이 다 되셨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매출 좀 팍팍 올리자!”

결국, 태주는 카운터로 나갔다.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태주를 알아봤다.

“홍대 버스킹남 맞네!”

“한태주가 여기서 알바할 줄이야.”

“저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인스타에 올려도 돼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든 상황에 태주는 얼떨떨했지만,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그도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먹고 사는 배우였으니까.

주문을 모두 마친 태주는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테이블을 돌며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몇몇은 태주의 얼굴에, 몇몇은 태주의 현재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피르마 영화제에서 상 타신 그 영화, 유튜브에 올라온 거 봤어요. 재밌더라고요.”

“저는 그거 5번이나 봤어요. 엄청 많이 봤죠?”

“난 10번이나 봤거든?”

투덕거리던 여자들이 태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는 출연 안 하셨어요? 아역 때 말고 성인 돼서요.”

“윤이도 감독님의 ‘그림자 무사’에도 출연했습니다. 강재하 선배님 대역과 왕비의 호위무사 역으로요.”

“그림자 무사요?”

옆에 있던 여자가 핸드폰을 들었다.

“저 오늘 티저 뜬 거 봤어요. 혹시 여기서 검 휘두르는 무사가 태주 씨인가요?”

태주는 여자가 보여주는 영상을 유심히 봤다.

거기에 자객들을 상대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기가 티저에 담겼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티저가 조회 수 50만을 넘겼다는 것도.

“네, 접니다.”

“7초밖에 안 나오는 게 좀 아쉬워요.”

“얘는, 1분짜리 티저에 7초면 많이 나온 거지! 그리고 이렇게 표정도 원샷으로 잡아줬잖아.”

백금발로 탈색한 여자가 태주를 힐끔거리더니, 엄지를 척하고 꺼내 보이며 말한다.

“응원할게요.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해 주세요.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태주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카운터로 돌아와 바쁘게 계산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 무사’ 티저에 내가 나왔다니.’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내 연기가 괜찮았으니까 티저에 쓴 거겠지? 나, 이만하면 좀 괜찮은 배우 아닐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일 있을 독립영화 촬영에서도 분명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점점 자아도취 하는 태주를 보던 이중협이 혀를 끌끌거렸다.

[역시 스물한 살이네. 아직 어리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남들이 좀 칭찬해 준다고 헤헤거리는 게 딱 어린애지, 뭐가 아냐.]

당장 독립영화 촬영이 내일인데 이렇게 긴장이 빠져서야.

배우는 지금 당장의 연기에 만족하면 안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지.

이중협은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켰다.

‘뭐, 내가 여기서 조언해도 지금은 안 들리겠지.’

배우는 현장에서 깨달음을 얻는 게 제일이다.

‘내일, 현장에 있는 호랑이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특히, 손우현 선배라면 뭐.’

[앞으로의 촬영이 기대되는 구만.]

이중협은 느긋한 표정을 하며 킬킬거렸다.

* * *

다음 날 오전.

태주는 술집들이 늘어선 강남의 한 거리로 향했다.

드디어 오늘부터 독립영화 ‘자유 선언’의 촬영이 시작된다.

활짝 문이 열린 한 가게로 여러 스태프가 바쁘게 장비를 옮기고 있다.

인사를 하며 스태프들을 도와 장비를 나르던 태주.

밴에서 내리는 손우현과 김선정을 발견했다.

손우현은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포마드 헤어와 검은 양복을, 김선정은 펜슬 스커트와 분홍 시스루 셔츠를 입었다.

뛰어난 둘의 미모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태주는 하얀 요리사복에 앞치마를 걸쳤다.

나쁘지 않은 현장 분위기.

태주도 목을 푸는 등 편안하게 대본을 되새겼다.

그런 그에게 손우현이 조언했다.

“그동안은 대본리딩만 했지만, 실전 촬영은 그거하고는 달라.”

그가 태주를 바라보며 엄하게 덧붙였다.

“촬영 일정이 미뤄진 만큼, 실수 없이 정확하게 가야 해. 실전에서는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변수가 일어나도 잘 대처하는 게 배우의 능력이겠죠. 잘해 보겠습니다.”

유독 자신감에 찬 태주.

그런 태주를 보며 손우현이 묘한 표정을 짓는 순간.

양군보 감독이 도착해서 배우들을 한데 모았다.

“첫 촬영이지만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리딩한 대로 잘해 봅시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현장.

감독의 신호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귀신 보는 배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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