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보는 배우님-42화 (42/274)

42화

스타성과 연기력, 두 마리 토끼 (2)

“감독님, 이형곤 감독님 연출부에 계셨었어요? 손우현 선배님이나 김선정 선배님한테도 들은 적 없어요.”

“몰랐어요? 아, 워낙에 안 좋은 기억이라 선배님들이 말씀 안 해주셨나 보다. 좋으신 분들.”

“이형곤 감독님 연출부에는 딱 3개월 있었어요. 그게 제가 버틸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이거든요. 장인섭 감독이 제 지속 선배였는데, 어찌나 괴롭히던지……. 아무튼 많이 까였죠.”

양군보의 순한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연출팀 뒤치다꺼리하는 건 참을 만했는데, 장인섭 감독이 스트레스를 저한테 푸는 건 정말 힘들더라고요. 아무튼,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장인섭을 보며 양군보가 주먹을 꽉 쥐었다.

파르르 떠는 주먹을 보던 태주가 말했다.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연기 잘해서 감독님 위신 팍팍 세워 드릴게요. 좋은 연기 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기분 좋네요. 하하!”

양군보의 동그란 안경 뒤로 생각 많은 눈동자가 보였다.

“갑자기 촬영장소 변경됐는데도 잘 따라줘서 고마워요. 당황했을 텐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촬영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요, 감독님. 혹시 왜 갑자기 변경된 건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태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양군보는 망설였다.

솔직히 대답할까?

윗선에서 우리에게 배정된 예산을 빼서 다른 곳에 내주었다고?

상업적이지도 않고 톱스타도 없는 우리 영화를 얕봤다고?

독립영화 제작 선정작이지만 그에 비해 지원이 미약하다고?

하지만 태주는 스스로 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작품은 호화로운 게 아닌 재밌는 거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돈을 처바른다고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위로 고마워요. 그런데, 그거 누가 한 말이에요? 전 잘 모르겠는데.”

“제가 한 말이에요.”

태주가 겸손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

“저는 우리 작품에 자신 있어요.”

[와, 한태주 많이 컸네. 그런 말도 하고.]

팔짱을 낀 이중협은 태주와 양군보가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뭐, 맞는 말이지만. 이 작품, 내가 봐도 좋으니까.]

* * *

몇 시간이 지났을까.

2시간 후 촬영을 완료한다던 ‘뱀파이어의 첫사랑’은 결국 4시간이나 걸렸다.

그리고 야외 아이스링크는 폐장 시간이 되어 손님들을 내보냈다.

일반 손님들을 영화 엑스트라로 자연스럽게 쓰겠다는 양군보 감독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태프가 손님들에게 엑스트라 알바를 제의했으나 쌀쌀하고 배고픈 손님들은 다들 집에 가버렸다.

결국, 양군보 감독은 장인섭 감독에게 가서 대폭발했다.

“선배님. 2시간 안에 ‘뱀파이어의 첫사랑’ 촬영 끝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저희도 여기서 찍어야 한다고 부탁도 드렸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찍어. 지금은 사람들도 없어서 좋겠네.”

“선배님!”

날이 어둑해져 곳곳에는 등이 어스름하게 켜졌다.

“조명값 나가는 게 한두 푼 아니라는 거, 선배님이 더 잘 아시면서!”

“작은 영화 아니랄까 봐, 궁상맞긴.”

장인섭이 양군보를 거만하게 흘겨보았다.

“사소한 거로 난리 칠 시간에 빨리 찍기나 해. 진짜 실력 있는 감독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명장면을 만들어낸다고.”

한편, 태주는 자신에게 인사하러 온 임강현과 잠시 얘기 중이었다.

“연기 잘하더라, 아름다운 장면이었어.”

“칭찬은 고마운데, 너희들 어떡하냐. 우리 촬영이 너무 오래 걸렸나 보다.”

임강현은 어둑해진 스케이트장을 힐끔거렸다.

“너희 진짜 이대로 촬영한대? 엑스트라도 하나 없는데?”

“뭐,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너 왜 이렇게 태평하냐? 내가 너라면 초조해서 난리 났을 텐데. 당장 오늘 촬영 파토날 수도 있는 거잖아.”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꼬인 단추는 언제든 타래를 풀 방법이 있는 법이지.”

‘그리고, 위기를 기회 삼아 더 좋은 장면을 만들 수도 있고.’

* * *

오후 6시, 이제 폐장할 시간이다.

청소부를 들여보내려는 아이스링크 관리자를 설득한 양군보 감독.

회의할 10분을 얻어 배우들과 제작진을 소집했다.

제일 연장자인 손우현이 의견을 제시했다.

“내일 와서 다시 찍는 건 어때? 어차피 계획 어그러진 거, 정비하고 제대로 찍자고.”

손우현의 말에 양군보가 고개를 저었다.

“촬영 일정 빡빡한 건 선배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선배님 매니저한테 저 매일 닦달 당합니다. 스케줄 어그러지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제작비도 빠듯해서, 촬영 연장은 어려울 거 같아요.”

“장 감독 말을 믿은 게 바보였지. 촬영이라는 게 딱딱 시간 맞춰 끝날 수 있는 게 아닌데.”

“3시간이면 제가 이해하죠. 그런데, 4시간이나 걸렸잖아요. 그건 장 선배가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하……. 뒤에 있어야 할 엑스트라들도 없고, 조명도 부족하고.”

양군보 감독의 한숨이 울려 퍼진 순간.

잠자코 듣던 이중협이 한마디 거들었다.

[뒤에 엑스트라 좀 없으면 어때. 내가 보기에 이 씬, 너랑 김선정 씨, 엑스트라 1명으로도 충분히 잘 찍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사람들 많은 것보다 캐릭터들한테만 집중하는 게 더 좋은 그림일 수도 있다고.]

이중협의 말을 들은 태주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프레임 안에 주인공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프레임 안에 미스 봉과 죽정, 이렇게만 있다면 관객들이 이 둘에게 집중하겠지.

‘그런데 스토리상 이 둘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가 있지?’

‘청소부를 등장시키면 되겠네요.’

[청소부라니?]

‘미스 봉이 너무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하자.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죽정이 스케이트장을 찾은 거예요. 그런데 가는 도중 길을 잃어, 결국 폐장 시간에 도착했죠. 죽정도 세상 밖으로 나온 게 처음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렇지만 미스 봉이 꼭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는 청소부에게 돈을 쥐여주고 10분을 얻어 그녀와 단둘이 아이스링크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거 얼른 양 감독한테 말해봐!]

이중협의 흥분에 태주는 양군보에게 말을 걸었다.

“감독님. 저희 오늘 장면 수정해서 찍으면 안 될까요?”

“장면을 수정한다고요? 어떻게요?”

태주는 아까 이중협에게 말한 줄거리를 그대로 말했다.

가만히 듣던 양 감독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좋은데요? 원래 시나리오보다 감정선도 세밀하고 좋아요.”

“저도 태주 생각에 동의해요.”

김선정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예전 버전은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스 봉이 스케이트를 배우기 급급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미스 봉과 죽정 이 둘의 시간에 집중한 느낌이에요.”

“오케이, 그럼 이대로 해봅시다! 저는 김윤혜 피디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제야 양군보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손우현은 태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했다.

“역시 우리 똘똘이야. 젊은 애라서 생각하는 게 창의적인 건가?”

“우리 머리가 굳은 거죠.”

김선정의 아름다운 얼굴이 태주를 마주했다.

그녀는 태주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공식이 없는 걸 우리는 자꾸 못한다고 정의했잖아요. 작은 영화라는 이유로 못 찍을 장면은 없어요. 상상력을 더욱 발휘하고, 연출을 잘하고, 배우들의 연기로 커버하면 되지.”

“그게 바로 우리 아닌가요?”

태주의 장난스러운 말에 김선정도, 손우현도 와락 웃었다.

몇 분 후.

김윤혜 피디와 말을 나누고 온 양군보가 서둘러 팀을 재정비했다.

밖에 청소부 한 명을 대기시키고, 태주와 김선정은 의상을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다들 제 자리에 있는 그때.

어느 때보다도 힘찬 양군보의 목소리가 울렸다.

“레디, 셋…… 액션!”

* * *

죽정이 미스 봉을 가게에서 데리고 탈출한 것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가게에서 일하며 쥐꼬리만큼 받은 돈을 모아 서울의 여인숙에 묵는 그들.

죽정은 일자리를 구하기 전, 미스 봉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평생을 두목 옆에 갇혀서 아무 데도 못 간 그녀.

어딜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케이트장. 나 어렸을 때 마을 호수에서 미끄러지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죽정은 경치 좋은 야외 아이스링크를 알아보았다.

돈을 탈탈 털어 그녀에게 하얀 스케이트도 사 주었다.

“진짜 예쁘다. 하얀 눈을 내 발에 신긴 것 같아.”

방방 뛰며 좋아하던 미스 봉은 그제야 죽정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왜 안 사니?”

“전 스케이트 타는 게 무서워서요.”

스케이트를 살 돈이 없던 그가 어쩔 수 없이 한 씁쓸한 거짓말.

그러나 미스 봉이 스케이트를 타며 좋아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그는 미스 봉과 함께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지도도 없이 그곳을 찾아가다가 헤매는 바람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폐장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아이스링크.

죽정은 텅 빈 그곳에 들어가려는 청소부를 붙잡았다.

먼 곳에서 와 늦었다, 스케이트 타는 게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다라는 말로 청소부를 설득한 끝에 돈을 좀 쥐여주고 10분이란 시간을 얻었다.

“째깍 타고 나오슈. 내가 시간은 알려 줄 테니께.”

“감사합니다!”

스케이트를 신은 미스 봉이 먼저 들어가고, 죽정은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갔다.

미스 봉은 다리를 세로로 벌린 채 천천히 스케이트를 탔다.

“재밌으세요?”

“와, 나 세상에서 이렇게 재밌는 건 처음 타봐!”

뒤뚱거리던 미스 봉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빨간 립스틱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점차 스케이트 타는 게 익숙해진 미스 봉.

선정이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가자 태주가 미끄럽지도 않은지 그 옆을 뛰어서 쫓아갔다.

태주가 있는 힘을 다해 선정을 살짝 앞질렀다.

“어때요, 어머니. 제가 더 빠르죠?”

“어림없는 소리. 이얏!”

그러자 선정도 지지 않고 스피드를 높였다.

태주와 선정은 앞치락 뒤치락거리며 한 바퀴를 돌았다.

깔깔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크리스마스의 캐롤 같이 울려 퍼진다.

그때, 에서 청소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1분 남았슈!”

“우리 여기 누워서 하늘 좀 보자.”

“어머니, 얼음 위에 누우면 감기 걸려요.”

“항상 해보고 싶었던 거야. 응?”

선정이 대뜸 태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얼음 위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생각 많은 눈을 깜빡이던 미스 봉이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서 좋다. 정말 좋아.”

“그게 자유라는 거예요, 어머니. 누구한테 구속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요.”

“너무 좋다, 자유롭다는 거.”

미스 봉은 벌떡 일어나 죽정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앞으로 자유롭게 살자.”

“그래요, 어머니.”

미스 봉이 너무나도 행복해하자 죽정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더욱 행복해했다.

어머니의 행복은 곧 그의 행복이었기에.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크게 잡았다.

한 치의 근심도 없는 완벽한 행복과 설렘.

양군보 감독이 옆에 있던 스태프들과 눈을 마주쳤다.

다들 누가 뭐랄 것 없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시놉 바꾼 게 훨씬 낫네요.”

“그러니까. 태주 씨가 기가 막히게 아이디어를 냈어. 저 둘만 있으니까 감정선도 더 살고. 그림도 좋고.”

양군보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장인섭 선배한테 감사해야겠는데. 그쪽이 늦장 부린 덕분에 더 좋은 씬이 나왔다고.”

“전화위복이네요.”

“그래, 전화위복이지.”

스태프의 말을 받은 양군보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주 씨는 복덩이고.”

연기도 잘하는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봐 더욱 좋은 그림을 만들 줄도 아는 복덩이.

“도대체 스물한 살짜리가 무슨 삶을 살았길래 저런 짬이 되는 걸까? 촬영장에서 감독보다도 더 사고를 깊게 하다니.”

“글쎄요. 옆에 누가 밀착 과외라도 해주나 보죠.”

스태프가 킬킬거렸다.

그 말에 이중협이 귀를 쑤셨다.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귀신 보는 배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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