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광대 (6)
주로 영화 위주로 활동하는 그녀에겐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가 있었다.
같은 소속사 동료이자 친구의 전 연인이고, 지금은 좋은 친구인 그녀였다.
이선우는 그녀를 반가워하며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얼마 만이냐, 수정아. 맨날 바빠서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오빠야말로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쁘잖아요. 티저에 윤수안이랑 나온 거 봤어요. 둘이 잘 어울리던데.”
“수안이가 잘 맞춰줘서 그렇지, 뭐. 그런데 걱정이야, 아역들이 하도 인기가 많아서, 우리들이 그 인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가.”
“천하의 이선우가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대한민국 여성들은 이선우가 드라마에 나온다고 하면 자동으로 채널 그쪽으로 돌릴 텐데.”
염수정의 능청스러운 말에 이선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그가 문뜩 생각난 듯 말했다.
“이번에 시영이 형,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하던데.”
“알고 있어요.”
염수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어도 안 되는 사람이 무슨 할리우드 진출이라고. 제가 보기에 그건 장 대표님 욕심이었어요.”
“그럼 한국으로 돌아와서 쉰대?”
“기사 못 봤어요?”
그녀가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곧 기사로 가득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백시영, 할리우드 진출은 잠시 보류…… 최준모 제작 ‘언더커버’로 복귀>
<최준모 ‘언더커버’ 초호화 캐스팅 성사…… 톱스타 백시영 캐스팅>
화면을 훑던 이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형, 반드시 이 영화 성공해야 할 이유가 또 생겼네. 아주 언론이 물어뜯는구만, 할리우드 진출 실패했다고.”
“그 오빠는 그것도 좋아할 거예요. 워낙에 관심 없이는 못 사는 성격이니.”
시니컬한 염수정의 반응에 이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수정이 너, 요즘에 유독 바쁘던데. 뭐 하는 거 있냐?”
“이번에 영화 들어갈 것 같아요.”
“무슨 영화?”
“주세진 선배랑 같이 찍는 거요. 현필름에서 제작하는 건데, 사극이에요.”
이선우가 눈썹을 씰룩였다.
최근 광고에만 간간이 나오며 활동이 없던 염수정.
그동안 잠잠했던 건 좋은 작품을 기다렸던 것도 있었다.
“5년만인가, 네가 연기하는 거?”
“네.”
“현필름에서 준비하는 거면, 영화 ‘광대’ 같은데. 맞지?”
“어머, 충무로에 소문 쫙 돌았나 보네.”
이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고 말 많던데. 뭐, 나는 시놉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사람들 진짜 보는 눈 없다. 진짜 재밌는데, 이거.”
염수정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지었다.
“어디 한번 개봉해서 보라고 해요, 다들 우리 영화 못 봐서 안달일걸.”
“충무로 여신 염수정이 나온다는데, 당연히 사람들이 보겠지.”
“한태주가 나온다고 해도 사람들, 관심 가지지 않을까요?”
“뭐, 한태주가 그걸 한대?”
“아직 확정은 아니고요.”
편안했던 이선우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거기 한태주가 할 만한 역할이 뭐가 있는데?”
“여장남자 광대요. 주인공인.”
“에이, 걔 이제 겨우 21살이야. 이탁원 감독님 작품 주인공들 감정선 어려운 거 뻔히 아는데, 걔가 그거 맡을 수 있겠어?”
“오빠가 ‘질주’ 맡았을 때가 22살이었어요. 모황국 감독님이 쌩 신인인 오빠 썼을 때 가요.”
염수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아무튼 난 이탁원 감독님한테 추천했어요. 한태주 걔, 괜찮은 것 같다고.”
* * *
그날 아침.
연예계 기사는 두 가지 토픽으로 시끄러웠다.
한국에 극비리에 입국한 백시영.
무명 감독의 신작에 출연하기로 한 톱배우 염수정.
<[단독] 염수정, 5년 만의 사극영화로 연기 복귀…… 흑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출신 이탁원 감독의 ‘광대’>
<임강현, 첫 사극에 도전…… ‘광대’ 젊은 왕 캐스팅>
<백시영, 장희재 대표와 함께 LA에서 한국 귀국, 공항에 엄청난 인파 몰려…… 할리우드 진출은 이대로 실패?>
그리고 여기, 드림액터스.
이른 아침부터 한 남자의 등장으로 사무실이 들썩거렸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그래, 그래. 다들 잘 있었지?”
장희재 대표는 팀장들의 인사를 받으며 벽에 붙은 사진들을 살폈다.
“새로 들어온 배우가 얘야? 한태주?”
탁시준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 차 팀장네 팀으로 배속되었습니다. 3팀 소속입니다.”
“황 팀장이 캐스팅했다고 하지 않았나? 황 팀장, 자기가 키울 생각은 없었던 건가?”
장희재의 질문에 황재남과 차용석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황재남은 헛기침하며 머리를 굴렸다.
한태주가 원석이긴 하지만 그를 톱스타로 끌어올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미 그의 손안에 톱스타들이 널렸는데, 굳이 한태주를 키워야 한다는 골치를 안고 싶지 않았다.
뭐, 요즘에는 한태주를 괜히 차용석에게 넘겨줬다는 후회를 하긴 하지만.
그때, 차용석이 장 대표에게 설명했다.
“고성열이 2팀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제가 한태주를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신인들을 키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흐음.”
뼈가 있는 말에 장희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차 팀장이 한번 잘 키워봐. 기대할게.”
그 말에 차용석과 황재남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찝찝하다는 듯 눈을 먼저 돌린 건 황재남이었다.
차용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지를 되새기고 있을 뿐.
* * *
얼마 후.
차용석은 대표실에 불려갔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한쪽에는 탁시준 본부장, 중앙에는 장희재 대표가 그를 빤히 쳐다보는 이 중압감이란.
하지만 그 긴장감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 팀장, 얼마 전에 최 감독이랑 만났다면서?”
“네, 맞습니다.”
“한태주 말야, 꽤 성깔 있나 봐.”
영문을 모르는 차용석에게 장희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최 감독하고 전화해서 알았지. 그이 영화에 백시영 주연으로 못 박고 한태주는 끼워넣기로라도 역할 주라고 내가 그랬거든. 그래서 만나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마음이 들었다는 거야. 근데 싸가지가 좀 없었다는데?”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최 감독 작품,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며. 그게 싸가지 없는 거야, 일단 앞에서는 감사하다고 넙죽거렸어야지.”
장희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싸가지가 없나 봐. 임강현도 최 감독 작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네.”
“안 그래도 오늘 기사 봤습니다. 임강현이 이탁원 감독 작품에 캐스팅됐더라고요.”
“내가 보기에 그거, 분명 임강현 고집이야. 걔도 참 대단하지, 아역 데뷔 때부터 쭉 아티스타 쪽에서 관리 들어갔었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지가 하고 싶은 걸로 고집을 피웠는지.”
장희재가 생각에 잠긴 차용석을 힐끔거렸다.
“최 감독이 그래도 쌍천만 감독이야,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뽕이 찼는데. 한태주 같은 신인들한테는 감독 파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한태주 태도가 그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잔뜩 냈더만.”
장희재가 들고 있던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덧붙였다.
“아무튼, 내가 최 감독한테 연락해서 어떻게 잘 넘겨볼 테니까, 한태주는 백시영하고 한 세트로 ‘언더커버’ 들어가는 걸로 하자고.”
“대표님, 안 그래도 태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차용석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태주 본인이 현필름에서 들어온 이탁원 감독의 작품을 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차 팀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옆에서 탁시준이 당황한 듯 끼어들었다.
“백시영하고 한 세트로 묶어서 한태주 들어간다니까.”
“태주가 이탁원 감독 영화를 하기 원합니다. 조선시대 여장남자 광대 연기를 도전해 보고 싶다고요.”
“하이고, 어이가 없네. 게다가 현필름 영화, 그거 효원 역할에 오디션 본다면서. 연기한다는 신인들을 다 몰려서 거기 북새통인 거 몰라?”
“안 그래도 태주가 오디션을 준비 중입니다.”
“오디션 준비하는 건 그렇다 쳐. 근데 합격 못 할 건 생각 안 해? 거기 몰린 애들이 지금 3천 명 가까이 된다는데, 아무리 날고 기는 한태주라도 뽑힐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그리고 설사 타이틀 롤에 뽑혀서 영화 찍는다고 쳐. 두 작품 다 실패한 이탁원 감독 영화가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아?”
“성공할 것 같으니까 염수정 씨도 이 작품을 복귀작으로 결정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차용석이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충무로의 흥행 여신 염수정입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500만을 넘기는. 더욱이, 흥행 작품을 읽는 눈은 누구보다 뛰어나고요. 저는 이번 작품,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차용석을 향한 장희재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탁시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이번엔 염수정이 감이 떨어진 거겠지.”
“저도 변태준 감독보다는 이탁원 감독이 이번에 태주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이끌어줄 거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탁원 감독의 이번 시놉, 정말 괜찮습니다. 태주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될 겁니다.”
“야, 여장남자 광대 이야기가 성공한다고? 그럼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잠깐.”
한참 그들의 설전을 듣던 장희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차 팀장. 정말 이 결정에 후회 없는 거야? 최준모 작품 이렇게 놓쳐도 되겠어?”
“네.”
“그럼 언더커버에서 막내 부대원 역할은 고성열한테 돌아갈 거야. 안 그래도 황 팀장이 호시탐탐 노리던 역할이었어. 그래도 괜찮겠어?”
차용석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태주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 녀석, 자기가 좋아하는 연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거참, 백시영하고 같이 최 감독 영화 들어가면, 천만 영화에 라이징 스타는 따 놓은 당상인데. 현필름 그 고리타분한 영화가 뭐가 좋다고 빠진 거야.”
“시준아, 그만. 그럼 차 팀장, 한태주 영화는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대신, 다음에 한태주 드라마 하는 건 내 추천 좀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아직 한태주, 드라마 결정된 거 없지?”
“네, 없습니다.”
차용석은 침을 꼴딱 삼켰다.
장희재 대표는 그의 혜안으로 백시영을 톱스타로 키운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택하는 작품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 내가 JSB하고 제작하는 작품이 있거든. ‘낭만 고양이’라고 하이틴 음악 드라마. 한태주 말야,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잖아?”
차용석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낭만 고양이’라면, 드림액터스, JSB, XJ가 200억의 제작비를 출자해 만드는 그 드라마잖아.
장희재가 씩 웃었다.
“거기 주인공으로 한번 가보자고.”
* * *
잠시 후.
모두를 내보낸 장희재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다.
“왜 3팀에는 저렇게 괴짜가 한 명씩 끼어 있는 건지.”
그의 뇌리에 이중협이 스쳐 지나갔다.
전직 팀장이었던 이현식의 캐스팅으로 드림액터스에 들어오게 된 그.
흥행보다는 작품성을 보고 출연하는 독보적인 혜안이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고른 작품들은 호평받았고, 그의 연기력에 대한 찬사는 날로 더해갔다.
그랬기에 이중협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이선우랑 공동 주연을 맡아서 이제 좀 뜨려나 했더니…… 그렇게 됐어.”
생각해 보면 이중협과 한태주는 참으로 달랐지만, 비슷하기도 했다.
“도전을 하는 면이 닮았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위해 도전하는 점이.”
또한, 그 둘은 자신과도 닮았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점이.
그가 이번에 JSB 엔터와 손잡고 만드는 드라마도 그런 일환이었고.
“아무튼 어떤 결과가 나올는지 기대되는군.”
장희재가 피식 웃었다.
“한태주의 승리인가, 최준모의 승리인가는 나중에 가려지겠지.”
‘아닌가, 황재남과 차용석 간의 대결인 건가?’
무엇이 됐든, 참으로 흥미로운 대결이다.
그리고 이참에 2팀장과 3팀장 간의 작품 보는 혜안도 비교할 수 있겠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