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보는 배우님-111화 (111/274)

111화

아버지의 나라 (4)

마루야마 회장은 그의 아버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숨겨야 하는 비밀로 치부하는 걸 보니.

태주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마루야마 회장이 피식거렸다.

“왜 놀라. 그럼 날 버리고 간 아버지를, 내가 떳떳하게 내놓았을 거로 생각했나?”

그 말에 마춘길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전긍긍하며 태주에게 말했다.

[내가 용하를 떠나올 때, 얘는 한국 나이로 3살밖에 안 됐었지. 이 아비를 까먹었을 수도 있으니, 혹시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봐 주게.]

태주는 잔뜩 긴장한 자세로 물었다.

“회장님이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자네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가 더 궁금한데?”

마루야마 회장이 술을 따르며 형형한 눈빛을 보냈다.

“지난 70여 년간, 어머니도, 나도 밖에서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떠들고 다닌 적이 없었거든. 그 양반은, 우리한테는 죽은 양반이었으니까.”

그 말에 마춘길이 충격을 받은 듯 잠잠해졌다.

태주는 두근거리는 감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럼 이름을 완전히 바꾸신 것도…….”

“우리 어머니의 뜻이었지. 하나뿐인 자식, 한국인으로 살면 일본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지 눈에 뻔히 보이니까. 뭐, 주변 사람들은 얼추 알고 있지만.”

마루야마 회장이 씁쓸한 입꼬리를 씰룩였다.

마루야마 회장의 저 고집 센 얼굴에도 세월이 담긴 한이 가득했다.

태주는 애써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려고 했다.

“회장님의 아버지, 마춘길 어르신께서는 6.25 전쟁이 끝나고 분명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그때 일본과 미국이 휴정을 맺으면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었죠.”

마루야마 회장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6.25 전쟁 참전을 위해 한국으로 온 재일동포들은 불법으로 출국한 것으로 간주 되어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셨죠.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으셨던 거예요.”

탁.

태주의 말을 듣던 마루야마 회장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잔을 내려놓았다.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섞인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 조약은 30년 후인가 분명 풀렸네. 그럼 그 세월 동안 뭘 한 건지?”

“그동안 편지도 여러 번 보내셨고, 일본도 몇 번이고 오셔서 회장님과 어머님을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정보조회를 거부했답니다. 편지도 반송하고요. 그래서……”

“그만.”

마루야마 회장은 분노에 가득 찬 눈을 이글거렸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회장님!”

“나도 자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일찍이 가족을 잃어 정이 많은 모양이더군. 그래서 아마 골골한 노인네가 가족 타령하는 걸 듣고 알량한 동정심을 가진 거겠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우리 집안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8달 만에 태어난 팔삭둥이 여동생은 돌도 안 돼서 죽었지. 갑자기 열이나 몸이 펄펄 끓는데, 병원도 제대로 못 가봤어. 돈이 없었거든.”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나는 홀어머니와 단둘이 아주 힘들게 살았네. 돈을 벌려고 안 해본 게 없었지. 그러느라 나는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원래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는 병에 걸리셨어. 그때 결심했네. 어머니마저 허무하게 잃을 순 없다고. 나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하여 남들이 천하다며 무시하는 파친코 사업에 손을 대 억척스럽게 일했지. 그렇게 아버지 없이 70년을 버텨 왔어. 평생 고생한 어머니는 15년 전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고.”

혈기 왕성하지만, 세월에 지친 눈이 태주를 마주했다.

“회장님…….”

“음식점 점원이나 하던 양반이 무슨 알량한 애국심이 있다고 헛바람이 들어 나라를 구하겠다 한 건지. 가정도 못 지킨 주제에.”

회장은 복잡한 입꼬리를 비릿하게 달싹였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생각이 없네.”

* * *

[흑…… 흐흑…….]

마루야마 회장과의 회동이 끝난 후.

태주는 양옆에 침울한 귀신들을 끼고 숙소로 복귀했다.

마춘길은 아들의 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계속 눈물만 흘렸다.

[우리 마누라, 아들내미……, 딸내미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를 본 이중협이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한국인으로서는 어르신께 너무 감사하지만. 아버지와 남편을 잃어야 했던 가족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 말에 마춘길이 자신을 자책했다.

[그 당시에는 나도 어렸지. 고작 20대 초반이었으니. 나는 그저 나라를 지킬 생각밖에 못 했었어. 그걸 우리 아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랐을 뿐이고.]

한편, 먼저 호텔에서 태주를 기다리던 차용석.

태주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 그래,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별말 없었어요. 아, 손녀분들이 오늘 일이 생겨 못 왔는데, 나중에 한국 놀러 오면 밥 한번 먹기로 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뚱해 있냐?”

그의 눈치를 살피는 차용석.

태주는 피곤해서 양해를 구했다.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죠? 저 먼저 잘게요, 형.”

“그래. 아 참, 내일 한국에 가자마자 ABS에서 ‘마스크 스타’ 미팅하는 거 잊지 말고.”

태주는 얼떨떨한 차용석을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꿀꿀한 기분은 여전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악귀를 제외하고 한을 못 풀어준 귀신은 없었다.

그에게 다가온 귀신은 운명이라 생각해, 한을 풀어주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정은 자신의 연기에도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경우는 너무나도 막막했다.

이번에는 귀신뿐만이 아니라, 그가 한을 풀고 싶어 하는 대상도 한이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이다.

‘하,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생각에 곰곰이 잠긴 태주에게 마춘길이 말했다.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총각. 이제까지 정말 고마웠어.]

“어르신. 제가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닐세, 태주 총각. 자네 덕분에 마누라와 딸 소식도 알고, 우리 아들도 봤어. 그럼 됐네. 평생을 가족을 고생시켰는데, 내 욕심만 부릴 수는 없지.]

그의 주름진 얼굴은 미련이 없어진 것 같기도, 숨긴 것 같기도 했다.

태주 옆에 꼭 붙어있던 이중협이 물었다.

[어르신, 그래도 기회는 있습니다. 태주가 마루야마 회장에게 어르신이 입원해 계신다는 요양병원 주소를 가르쳐 줬답니다. 그럼 언젠가는 찾아뵙지 않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마춘길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이야, 끝.]

태주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네. 자네도 이제 산 자들의 곁으로 돌아가시게. 그동안 고마웠어.]

‘아, 이게 무슨 일이람.’

일본에서 한국인 귀신을 만난 것까지는 좋은데, 결말이 너무 슬프잖아.

부자간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결국에는 서로를 사랑했던 마음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전쟁에 참전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결국 원망까지 이르렀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상황에 태주는 그저 마른침만 삼켰다.

그러나 이제 곧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ABS 방송국 회의실은 태주와 ‘마스크 스타’ 제작진의 회의로 분주했다.

태주는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얼굴로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청춘스타같이 멋있어 여자 스태프들의 마음을 울렸다는 건 비밀이다.

“제가 좀 추레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새벽부터 비행기 타고 온 거라서요.”

“아니요, 지금도 너무 멋있으세요. 미모가 반짝거리면서 빛나시는걸요.”

마스크 스타의 피디, 박진주가 옆에 있던 조연출과 눈빛을 교환했다.

“태주 씨 닉네임은 태양왕으로 하면 되겠어. 너무 잘 어울리잖아,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 하며 저 당당함 하며.”

“태양…, 뭐요?”

차용석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박진주 피디가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저희 프로그램은 본명이 아니라 가명으로 참가하잖아요. 그래서 저희 제작진이 머리 맞대고 고심했는데요, 태주 씨한테는 태양왕이 딱 알맞을 것 같아서요.”

“태양왕, 루이 14세?”

차용석이 태주를 쓰윽 훑어보았다.

“우리 태주가 왕의 기품이 흐르는지, 한번 보자.”

[태양왕이면 자기 매력에 취해서 도도한 모습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슬쩍 올리고 힘을 뺀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니, 이중협이 배를 잡고 웃는다.

[뭐야, 그 치명적인 눈빛은!]

주변에서 탄성이 터진다.

“그래, 저 눈빛이라니까! 내가 당누봄에서 저 눈빛을 보고 반했잖아.”

“몸짓도 달라졌어. 왕의 위엄이 가득한 느낌이랄까?”

“너무 잘 어울린다, 태주 씨.”

심지어 차용석까지 하트 뿅뿅한 눈빛으로 태주를 바라본다.

“야, 태양왕 해도 되겠다. 잘 어울리는데?”

괜히 멋쩍어진 태주가 서둘러 정자세로 돌아왔다.

“조금 부끄럽긴 한데, 어차피 저는 1라운드만 하면 되니까 잘 소화해 볼게요.”

“태주야, 벌써 포기하면 어떡해. 나는 네가 노래 참 잘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요? ”

차용석의 물음에 박진주 피디가 엄지를 척, 내밀었다.

“엄청나게 잘하죠. 그런데 태주 씨 출연하는 이번 회차에 가왕급 출연자들이 즐비해서요.”

“오히려 잘됐네요. 부담 없이 1라운드 듀엣 전만 하고 깔끔하게 드라마 홍보할 수 있겠어요.”

태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게 낫죠. 나중에 스케줄 꼬이면 복잡해지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네가 가왕전까지 올라가면 어떡하냐? 너 그동안 ‘낭만 고양이’ 때문에 레슨도 받아서 노래 실력이 더 늘었잖아.”

차용석의 설레발에 제작진의 눈도 반짝이는 상황.

태주가 두 손을 내저었다.

“에이, 설마 제가 거기까지 올라가겠어요.”

* * *

며칠 후.

드림액터스 장희재 대표는 고급스러운 한식당에서 한 사람을 전전긍긍 기다리고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한 그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말이다.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상대방으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기 때문일까.

얼마 후, 진중한 발걸음이 들려오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희재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그가 마주한 사람은 마루야마 회장이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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