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울게 하소서 (5)
촬영이 끝난 후.
태주는 차용석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며 이동 중이다.
“야, 내가 아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네가 NG 안 내는 거로 유명한 건 둘째치고, 이러다가 오늘 촬영 종 치는 건 아닌지, 엄청 걱정했다고.”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차용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네 매니저잖냐. 그런데 네가 왜 걱정을 하는지, 왜 얼굴이 울상인지 몰랐잖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유경 씨가 말한 거랑 똑같네. 너, 주변 사람들한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혼자 속으로 끙끙거린다면서?”
그가 손을 뻗어 태주의 손을 덮었다 겹쳤다.
“앞으로 걱정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나는 널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는데, 넌 날 형이 아니라 매니저라고 거리를 둬버리면 내가 너무 섭섭하잖아.”
“알겠어요, 형.”
태주가 넌지시 웃음을 비추었다.
자신을 동생처럼 아끼는 차용석의 마음이 따뜻하고 좋았다.
역시 누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나 행복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다.
10여 년 전 일어난 교통사고의 장본인.
그에게 용서를 빌러 왔지만, 아직 그는 그녀의 용서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시간이 걸릴 문제야.]
이중협이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말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머리가 아닌 마음이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니까.]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익숙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
“네, 회장님.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요?”
태주가 차용석 쪽을 힐끗거렸다.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태주가 이어서 말했다.
“9시면 괜찮습니다. 데리러 오신다고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차용석이 궁금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누구야?”
“마루야마 회장님이요.”
“마루야마 회장님이 왜?”
“한국 오시면 가끔 이렇게 밥을 사주시기는 하는데……. 오늘은 좀 의외네요.”
“뭐, 이왕 만나는 거 맛있고 비싼 거 사달라고 해. 그래, 너 원기 회복되게 보양식 먹어라.”
태주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음식은 둘째치고, 마루야마 회장이 왜 그를 급하게 보자는 지 궁금했다.
이유를 추측하며 그가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말했던 것을 곱씹었다.
-자네가 저번에 부탁했던 걸 이제야 해냈거든.
* * *
몇 시간 후.
태주를 광고 촬영장에 데려다준 차용석.
장 대표의 호출로 잠시 회사에 들렀다.
그런데 그를 마주 보는 장 대표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태주 말이야. 요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럼요. 요즘 드라마 촬영하느라 얼마나 바쁜데요.”
차용석은 뜨끔 하는 표정을 애써 숨겼다.
설마 촬영장에서 태주가 처음으로 NG를 5번이나 냈다는 걸 들은 건 아니겠지.
‘장희재 대표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었는데, 설마…….’
“염수정이랑 태주가 친하나?”
“네?”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가 한 장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직원들이 한태주 모니터링 안 해? 며칠 전부터 이거,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아다니고 있었다는데.”
차용석이 받아든 사진을 확인하자 염수정의 차에서 내리는 태주가 보인다.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이었다.
“이게 어때서요?”
“차 팀장은 이 둘의 관계가 전혀 의심되지 않아? 짚이는 것도 없고?”
“이건 태주가 중협이 형 추모 묘지에 다녀왔던 날에 찍힌 거예요. 그곳에서 우연히 염수정 씨를 만난 모양인데, 그분이 또 워낙에 태주를 아끼잖아요. 그래서 집까지 태워다 준 거고요.”
“그래……?”
전혀 예상치 못한 듯 장희재가 이마를 짚었다.
여러모로 한태주는 그가 예상할 수 없었다.
이중협을 좋아하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가 보이는 행보는, 그 이상이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한태주가 염수정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왜요? 대표님의 눈엔 뭔가 이상해 보이세요?”
차용석의 순진한 질문에 장 대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같이 영화도 찍었는데 이런 데 다닐 수도 있지, 뭐.”
“그렇죠? 워낙에 태주가 선배들한테 잘해서 다들 만나면 차도 태워 주고 밥도 사주고 합니다.”
넉살 좋은 차용석을 보며 장희재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선배들한테 잘하는 거 좋지. 그런데 그게 왜 하필이면 염수정이냐고’.
“그러고 보니, 대표님. 요즘 염수정 씨 자주 만나세요? 원래 염수정 씨도 6년 전까지 저희 드림액터스 식구였잖아요. 그때 시영 씨, 수정 씨, 그리고 중협 씨 이렇게 셋이서 대표님이랑 잘 어울렸었는데……”
“그랬지, 한때는.”
장 대표는 서둘러 해맑은 차용석의 말문을 잘랐다.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기 전에 이 대화를 끝내야 한다.
사람이 맹해 보여도 차용석의 저 속은 알 길이 없다.
친형처럼 따르던 이중협이 죽고. 연예계와 연을 끊은 줄 알았던 그가 절치부심해서 돌아온 게 벌써 3년 전이다.
얕봐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장희재는 자연스럽게 말문을 돌렸다.
“이번 4월에 있을 혜인예술대상 말이야. 거기에 태주가 초청받았어. 혜인 쪽에서 꼭 와달라고 하는 거 보니까 수상 가능성이 제법 있는 모양이야.”
“그림자 무사요? 아니면 광대?”
“둘 다 오른 것 같더라고. 그림자 무사는 조연상으로, 광대로는 주연상으로.”
“호재네요, 호재!”
차용석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묘한 눈빛으로 그를 관찰하는 장희재 대표.
그 모습에 차용석은 머쓱하다는 듯 씩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에 백시영 씨나 고성열 씨는 못 올랐는데, 제가 너무 기뻐한 거 같네요.”
언더커버의 흥행 참패뿐만이 아니라 작품성 부재를 은근히 돌려 까는 그.
“그래도 저희 태주, 진심으로 축하해 주실 거죠?”
장희재가 헛기침하자 차용석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제값 톡톡히 하는 배우잖아요.”
* * *
저녁 9시가 다 돼서야 만난 둘.
마루야마 회장은 한국에 올 때마다 태주를 친손자보다도 더욱 반갑게 반겼다.
태주도 그를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요즘 영화도, 드라마도 잘 나간다더니만. 그래서 그런가?”
기대감으로 눈이 똘망 거리는 마루야마 회장.
태주도 덩달아서 살며시 웃었다.
“저희 영화 보셨습니까? 드라마는요?”
“우리 손녀들 성화로 둘 다 봤지. 나 같은 노인한테도 무척 재밌더라고. 그거, 이제 관객 수 500만을 넘겼나?”
“네, 감사하게도 이제 700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태주의 대답에 마루야마 회장이 씩 웃었다.
손녀들과 함께 태주가 나온 작품을 싹 다 본 그는 이미 태주의 팬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밥을 함께 먹으며 마루야마 회장은 연신 태주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자네에게 정말 고마운 게 많아. 덕분에 아버지도 잘 보내드리고, 몇십 년간 해묵었던 앙금도 풀었으니까.”
“저야말로 감사드리죠. 제 말을 믿어 주셔서요.”
그때, 마루야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잠시 상대와 통화하더니, 태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참, 내가 자네를 부른 건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네. 저번에 자네가 부탁했었지. 혹시 ‘여병래’라는 기자를 찾을 수 있다면 찾아달라고.”
그 말에 태주는 기뻐했고, 이중협은 바짝 긴장했다.
[정말…, 병래 형을 찾았다고?]
“그분을 찾았습니까?”
마루야마 회장은 대답 대신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들어오게.”
그러자 망설임이 가득 묻은 문이 천천히 열리고 비쩍 마른 몸에 헐렁한 체크 셔츠를 걸친 남자가 들어왔다.
여병래는 태주의 눈치를 보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를 본 순간, 이중협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병래 형! 왜 이렇게 변했어…….]
“여병래 기자님, 맞으십니까?”
덩달아 떨리는 태주의 목소리.
그는 정신없이 여병래를 바라보았다.
왜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평범한 얼굴 속 깊게 서린 의문의 감정.
이제껏 이중협이 얼마나 이 사람을 찾았던가.
자신의 죽음을 단독 보도한 유일한 기자.
그리고, 그 이후에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이.
그는 이중협의 죽음이라는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여병래는 착잡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태주를 마주했다.
“마루야마 회장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한태주 씨가 절 찾는다고요.”
“네, 기자님을 찾기 위해 스타뉴스 본국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님을 아는 분이 아무도 없고,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르더라고요.”
흥분한 태주는 이제껏 자신이 그를 찾기 위해 고생했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연예계 마당발인 배우 강재하 씨 아시죠? 제가 재하 형한테까지 부탁해서 알아봤었습니다.그런데 그 형도 기자님이 어디 가셨는지를 도통 모르더라고요.”
그 말에 여병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아는 게 이상하지…….”
그리고는 술 주전자를 들어 한잔을 쪼로록, 따른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진다.
“제가 그곳을 홀연히 떠난 탓에, 제 흔적을 아는 이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죠.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었으니까요. 친구들하고의 인연도 다 끊었고요. 하여 지난 6년 동안 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중간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야마 회장이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이 친구, 내가 찾았을 때 상상 이상으로 놀라더군.”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한태주 씨가 왜 절 찾는지, 전혀 감이 안 잡혀서요. 한태주 씨가 활동을 재개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저는 그쪽이 아역이었을 당시에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따로 취재한 기억도 없었으니까요.”
여병래가 두려움과 결연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은 채 태주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를 왜 찾았던 겁니까?”
“그래, 나도 사실은 좀 궁금했어.”
마루야마 회장도 궁금증에 몸을 앞으로 뺐다.
“배우 이중협 씨라고 아시죠? 그분의 사고에 관해서 기사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여병래의 눈이 경계심으로 흔들렸다.
“그래서요?”
“그날의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기자님이 알아내신 진실, 그 모두를요.”
여병래는 잔뜩 가시를 세운 채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중협 씨 사고가 태주 씨와 무슨 상관이죠?”
“제가 이중협 선배님 팬이거든요. 드림액터스도 선배님을 동경해서 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이중협 선배님의 모든 걸 닮고 싶어 조사하던 중, 알게 됐습니다. 기자님께서 유일하게 이중협 선배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을 보도하셨다는 걸요”
태주가 말에 힘을 실었다.
“촬영장에서 스턴트와의 신호 미스로 돌아가신 사고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