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삼각관계
“벌써 뒷조사까지 다 끝낸 건가.”
최 반장이 주먹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미 승범은 인혜를 자신의 목표로 완전히 정한 듯했다.
“반장님, 저 어떻게 해요.”
핸드폰을 쥔 인혜의 손과 입술이 두려움에 가볍게 떨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별일 없을 테니까. 그리고 오늘 약속은 일단 취소하는 게…”
“아니에요. 갈게요.”
잠시 고민하던 인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백과 재킷을 챙겼다.
김승범 같은 놈 때문에 두려움에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님, 무리하지 마세요.”
채린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인혜를 말렸다.
“그래요, 정 선생. 굳이 안 가도 돼요. 채린이가 찾은 목격자만 찾으면….”
“아니요. 어쩌면 김승범이 저지른 범죄의 결정적 증거를 잡는 데 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만나지 마세요.”
“채린아. 너무 걱정하지 마. 반장님, 그럼 채린이 힘들었을 테니까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오히려 채린이를 걱정하는 인혜였다.
“그럼 같이 갑시다. 내가 뒤에서 따라갈게요.”
최 반장이 먼저 원장실 문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요. 반장님은 채린이가 찾은 목격자부터 찾으러 가세요. 그리고 뒤따라오시면 바로 알 수도 있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반장님 말씀처럼 아직까지는 별일 없겠죠, 뭐.”
인혜가 문손잡이를 쥐고 있는 최 반장의 손을 가볍게 잡아 내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다녀올게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인혜가 이내 원장실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
병원 엘리베이터 앞.
‘진짜 다음부터는 혼자 계단으로 내려가야지. 어색해 죽겠네.’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채린이 천천히 바뀌는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색하기는 최 반장도 마찬가지.
“여기 건물 정기 화재 점검이 내일부터구나. 음- 화재 점검 중요하지.”
괜히 게시판에 붙은 게시물들만 시험공부 하듯 꼼꼼히 살펴보며 아무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그때 이 어색함을 구해 줄 구세주처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집으로 갈 거지?”
“네.”
[내려갑니다.]
하지만 이제 곧 더 어색하고 숨 막힐 듯한 엘리베이터 안 2라운드가 시작되리라는 걸 잘 아는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엘리베이터 안쪽 구석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차가 지하 2층에 있어서.”
지하 2층 버튼을 누른 최 반장이 깊은 심호흡 내쉬며 10층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야 하는 꽤 긴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던 그때.
♬-♩♪-♩
최 반장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자 최 반장과 채린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지하까지 이어질 긴 어색함을 깨 줄 천사의 나팔 소리 같은 핸드폰 벨 소리에 굳게 다물었던 두 사람의 입가가 슬며시 풀렸다.
“김 형사네.”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까지 하며 전화를 받은 최 반장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성진의 전화가 지금만큼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어. 뭐 좀 알아냈어?”
***
“하나도 없어요. 벌써 다 태웠대요.”
먼지 뽀얀 옷을 툭툭 털며 꼬질꼬질한 얼굴로 쓰레기 처리장을 나오는 성진의 얼굴엔 짜증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없어? 아무튼 수고했다. 난 지금 채린이 데려다주고, 새로운 목격자 찾으러 갈 건데 너도 그리로 와.”]
“새로운 목격자요? 누군데요?”
목격자라는 소리에 성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세한 이야기는 와서 이야기하고, 주소 찍어 줄 테니까 그리로 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요? 별일 없어요?”
[“지금 김승범이랑 저녁 먹으러 나갔어.”]
“혼자요? 정 선생을 혼자 보냈다고요? 반장님! 왜 그러셨어요!”
차에 시동을 걸던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왜 소리를 질러. 안 그래도 내가 채린이 데려다주고 뒤따라갈 거야. 인마.”]
“그럼 늦죠. 그 안에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어디로 갔는데요?”
성진이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
고급스러운 프랑스 레스토랑.
“그 영화 전 진짜 재밌게 봤는데. 인혜 씨도 좋아하세요?”
승범은 능수능란하게 시종 대화를 주도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을 아우르는 풍부한 지식과 적당한 위트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누구라도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네. 저도 근래 본 영화 중에 제일 재밌게 봤어요.”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대화의 포인트가 인혜가 평소 관심 있고 좋아하던 것들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요? 역시 저희는 통하는 게 많네요.”
“그러게요.”
인혜가 승범의 아이같이 좋아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순수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이 진짜 살인범일까?’
분명 저 착한 미소 뒤 감춰진 추악한 진실을 알면서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네. 맛있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드세요? 고기가 좀 질긴가요? 이리 주세요. 제가 썰어 드릴게요.”
하지만 그때 반짝이는 나이프를 들고 미소 짓는 승범을 보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인혜, 정신 차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살인자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인혜가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살짝 퉁명스럽게 승범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 네.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자기의 호의가 무시당했다 느낀 승범이 입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만이 들렸다.
“여기. 와인 한 병만 주세요.”
그때 승범이 침묵을 깨고 웨이터를 불렀다.
“차 가지고 오셨잖아요.”
인혜가 놀란 얼굴로 입으로 가져가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슬슬 본색을 드러내려는 걸까?
자기도 모르게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리 부르면 되죠? 와인 싫어하세요?”
“그건 아닌데.”
인혜가 옆에 놓인 물컵을 얼굴로 가져가며 살짝 당황한 얼굴을 가렸다.
“그럼 제가 인혜 씨 어떻게 할까 무서우세요? 하하하.”
승범은 놀란 인혜의 얼굴이 귀여운지 더 짓궂게 말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마음 같아서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승범의 얼굴에 당장 물이라도 쏟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게요. 자- 일단 한잔하세요.”
승범이 웨이터가 가지고 온 와인을 인혜의 잔에 따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럼 건배할까요? 우리의 좋은 인연을 위하여.”
승범의 건배 제의에 인혜가 마지못해 건배를 하고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와인 잔을 기울이며 조금씩 젖혀지는 인혜의 길고 가녀린 목에 승범의 묘한 시선이 꽂혔다.
***
‘왜 이러지.’
몇 잔의 와인을 마시자 인혜가 취기가 도는지 발그레 달아오른 볼을 연신 두드렸다.
절대 취하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고 되뇔수록 몸은 점점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날까요? 좀 취하신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승범이 마지막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럴까요? 오랜만에 와인을 마셨더니 좀 취하네요.”
승범의 말에 인혜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 화장실 좀.”
인혜가 승범의 손을 뿌리치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자 승범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쉬우면 재미없지.”
***
식당 앞에서 대리 기사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인혜 씨, 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오늘 인혜를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는 승범과 어림없다는 인혜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 같았다.
“아무래도 전 여기서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늦었는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어! 저기 오네요.”
승범도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대리 부르셨죠?”
“네. 인혜 씨, 타세요.”
“정말 괜찮아요. 전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에. 그러지 말고 타세요.”
승범이 머뭇거리는 인혜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요. 전 그냥 택시 타고… 어머!”
승범과 가볍게 실랑이를 하던 인혜가 순간 중심을 잃으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묵직한 팔이 쓰러지는 인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와인을 마셨더니… 오늘따라 실수가 많네요. 죄송… 아!”
인혜가 자기를 잡아 준 게 당연히 승범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 있는 낯선 남자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내 얼굴이 비명까지 지를 정도예요?”
성진이 인혜의 허리를 감싸 일으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김 형사님. 여긴 어떻게.”
생각지 못한 성진의 등장에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인혜 씨, 괜찮아요? 김 형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하지만 진짜 놀란 사람은 승범이었다. 곧 그의 놀란 표정은 못마땅함으로 바뀌었다.
“김승범 씨, 요즘 자주 보네요. 잘 지내시죠?”
성진이 천연덕스럽게 승범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 덕분에. 그런데 일단 그 손부터 치우시죠.”
승범이 인혜의 허리에 간 성진의 손을 가리키며 미간을 찡그렸다.
“조심 좀 해요. 생기신 것답지 않게 의의로 허당이시네.”
성진이 인혜의 허리에서 손을 떼며 싱겁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김 형사님이 인혜 씨를 어떻게 아시죠?”
성진의 등장보다 두 사람이 서로 안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거슬리는 승범이었다.
“요즘 정 선생님께 스트레스 상담 받거든요. 어떤 살인범 새끼 하나가 하도 열 받게 해서.”
성진이 빈정거리며 승범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자 ‘살인범’이라는 말에 승범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얼마 전 뉴스에 나온 여관 골목 살인 사건 아시죠? 그 사건인데. 혹시 아시는 거 있으면 꼭 알려 주세요.”
성진이 승범에게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아니네요. 제가 그런 사건을 알 리가 있나요. 인혜 씨, 빨리 타세요.”
승범이 앞을 가로막은 성진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인혜의 팔을 잡아 차 쪽으로 이끌었다.
“술 드신 것 같은데. 정 선생님은 제가 모셔 드릴 테니까 빨리 가서 푹 쉬세요.”
그러자 성진이 승범이 연 차 문을 쾅 닫으며 일부러 승범의 성질을 긁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상냥하기만 하던 승범의 얼굴이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어-우, 무섭네. 김승범 씨한테서도 그런 표정이 나오네요. 어… 그런데 나 그 표정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성진이 승범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만. 하. 시. 죠.”
여차하면 성진의 목을 조르겠다는 듯 승범이 양손에 살기를 끌어 모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아- 분명히 봤는데 기억이 안 나네. 경고하는데.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딴 표정 짓지 마요. 재미없을 테니까.”
장난치듯 빈정거리며 말하던 성진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승범을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봤다.
“두 분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만하세요. 전 그냥 택시 타고 혼자 갈 거니까 두 분도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인혜가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차도 쪽으로 걸어가 택시를 잡았다.
“그럼 두 분 다 나중에 병원에서 봬요.”
“인혜 씨.”
“정 선생님, 제가 모셔다드린….”
인혜가 급하게 택시를 한 대 잡아타고 자리를 떠나자, 덩그러니 남겨진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인혜가 탄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인혜 씨?”
먼저 입을 연 건 성진이었다.
“제가 좀 친해서요. 그럼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시죠.”
승범이 거들먹거리며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가려고요. 그런데 재판 준비는 잘되세요? 뭐, 이렇게 와인이나 마시고 다니시는 거 보면 잘되시는 것 같아 보이긴 하네요.”
“준비할 게 뭐 있나요. 죄가 없는데. 그런데 저보다 김 형사님이 더 걱정이네요. 그 살인범 못 잡으셔서. 잡으실 수는 있으시죠?”
이제는 승범이 빈정거리며 성진의 화를 돋웠다.
“그럼요. 이제 곧 잡아 처넣으려고요.”
성진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꼭 잡으셨으면 좋겠네요. 가능하다면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신경전.
다시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꼭 밤길 조심하시고요.”
“김 형사님도 밤길 조심하세요.”
서로 뼈 있는 말들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김 형사 이 새끼. 절대 가만두면 안 되겠어.”
“김승범, 조그만 기다려. 반드시 잡아 처넣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