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증인
경찰서 뒤편 국밥집.
“내일이 재판이지?”
국밥을 몇 술 뜨던 최 반장이 입맛이 떨어진 듯 숟가락을 뚝배기에 꽂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네.”
그러자 덩달아 성진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직도 연락 없어?”
“방해받기 싫다고 핸드폰도 놓고 가서… 일단 자녀들한테 제 연락처는 남겨놨습니다.”
성진이 난감한 듯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채린이 승범의 기억 속에서 찾은 승희 사건의 숨겨진 목격자인 택시 운전사는 재판이 내일인 지금까지 연락조차 안 돼 두 사람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미국 여행 갔다고?”
“네. 무슨 경품 당첨돼서 갔다는데요.”
“경품?”
금연 사탕을 찾으려고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최 반장이 순간 멈칫했다.
“네. 그런 게 되는 사람이 있긴 있나 봐요. 전 로또 5등도 한번 안 되는데.”
“넌 경찰 시험 붙는 데 네 인생 모든 운 다 써서 이제 그런 건 안 돼.”
최 반장이 피식 웃으며 사탕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 것 같긴 해요. 제 운이 남아 있으면 이렇게 반장님 곁에 안 붙어 있겠죠.”
성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하여튼 한 번을 안 지지. 그런데 언제쯤 온다는 말도 없어?”
“일정은 내일 저녁 늦게 도착인데요. 며칠 더 있다 올 수도 있다고 자녀들은 이야기하는데. 일단 공항에 나가서 한번 기다려 보려고요.”
“그럼 바로 법정에 증인으로 세울 수 있게 만나서 설명 잘하고. 블랙박스도 꼭 챙겨. 알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김승범 그냥 이렇게 놔두실 거예요? 내일 재판에서 무죄 받으면 황정식 사건으로 몰아가는 건 더 이상 힘들 것 같은데요.”
성진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죄도 없는 승범을 황정식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해 무리하게 임의동행시켰다는 이유로 한동안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후. 더 이상의 여론전도 의미가 없는 지금.
이번 재판에서 무죄 판결까지 받는다면 그야말로 승범에겐 날개를 달아 주는 꼴.
법이 달아 준 무죄라는 날개로 그가 황정식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아니.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최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점퍼를 입으며 지그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
승범의 재판 날.
법원 앞은 많은 취재진들과 승범을 응원하는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잠시 뒤 법원에 도착한 승범이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김 변호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김승범 씨, 오늘 재판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무죄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검찰 측에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할 거라는 말이 많던데요.”
그러자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승범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모든 것은 재판에서 밝혀질 겁니다. 이따 재판이 끝나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김 변호사가 승범 대신 대답하며 경찰서로 들어가려던 순간.
“약혼자 가족분들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피하지 마시고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승범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가슴 찢기는 슬픔을 안고 이 자리에 서야만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비참하고 통탄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슬픔을 어쩔 수 없이 모든 분께 보여 드릴 수밖에 없는 지금 현실에, 죄송함과 더불어 더 큰 슬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기자들을 향해 촉촉해진 눈가로 울먹이며 말하자 마이크를 들고 득달같이 달려들던 기자들의 팔이 한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을 통한 감정에의 호소. 역시 언제나 잘 먹히는 레퍼토리였다.
“마지막으로 이번 재판을 통해 저의 진심이 그리고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기자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서 법원으로 들어가는 승범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옅은 미소가 번졌다.
***
법정은 이미 승범의 팬들과 취재를 하려는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이들도 왔네. 저 검사가 이번에 바뀐 검사예요?”
피고인석에 앉은 승범이 자신의 앞 금색 테 안경을 끼고 차가운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는 검사를 노려보며 김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승범 씨 사건이 워낙 이슈가 되니까 위에서도 에이스로 바꾼 것 같아요. 박태준 검사라고 요즘 제일 날이 선 검사거든요.”
그러자 불편한 시선을 느꼈는지 태준이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들어 승범 쪽을 바라보다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지가 날이 서 봤자지.”
승범이 태준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장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판사가 들어오자 순간 법정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사건 번호 2018고단2485. 피고인 김승범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판사의 목소리에 양측에 앉은 승범과 태준의 눈빛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재판 내내 검사와 승범 측 변호인 간의 팽팽한 공방은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숨이 멎을 정도였다.
하지만 승범은 가끔 승희의 이야기에 슬픈 표정을 지으며 괴로워했지만 시종일관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새로운 증인 한 명을 신청합니다.”
김 변호사의 말이 끝나자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에게 증인을 신청했다.
“어떤 증인이죠? 예정에 없던 증인인데요.”
판사가 재판 자료를 들춰 보며 말했다.
“이번 사건의 새로운 목격자입니다.”
새로운 목격자라는 말에 여유롭던 승범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승범 씨,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김 변호사 또한 당황한 얼굴로 승범을 쳐다봤다.
“없어요. 새로운 목격자라니 저 새끼 뭐라는 거야.”
“확실하죠? 진짜 숨기는 거 없는 거 확실하죠?”
“없다니까요.”
승범이 버럭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재판장님, 저희 쪽과 협의되지 않은 증인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김 변호사가 승범의 말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는지 변호인석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재판장님, 사건의 중요한 목격자입니다. 반드시 채택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태준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증인 채택 허락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판사가 증인을 허락하자 승범과 김 변호사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재판장님, 잠시 휴정을 요청합니다.”
김 변호사가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시간을 벌려는 듯 휴정을 요청했다.
“좋습니다. 그럼 변호인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30분간 휴정하겠습니다.”
판사가 밖으로 나가자 태준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늦네….”
***
“재판 속개하겠습니다. 검사 측 증인 불러 주세요.”
판사의 말이 끝나자 한 남자가 들어와 증인석에 앉았다.
“증인, 자기소개 해 주세요.”
태준이 증인석 앞에서 서류를 넘기며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58세.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김병수라고 합니다.”
증인석에 앉은 남자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증인. 증인은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양주시 국도 변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으시죠?”
“네.”
“그럼 그 사고 현장에 있던 운전자의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네.”
“그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나요?”
“…….”
태준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던 증인이 갑자기 깊은숨을 내쉬며 한 박자 쉬어 갔다.
“그날 사고 현장에 있던 운전자가 지금 이곳에 있나요?”
“……저기 있습니다.”
거듭된 태준의 질문에 증인의 시선이 천천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승범을 가리켰다.
그러자 일순간 법정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증인, 저기 있는 피고인을 사고 현장에서 본 게 확실합니까?”
태준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네. 확실합니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증인의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당시 상황을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보통 사고 운전자의 태도와 너무 달라서 제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그렇게 숨겨졌던 그날의 이야기들이 증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증인의 진술이 이어질수록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준비한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는 김 변호사의 손도 빨라졌다.
하지만 김 변호사 옆에 앉아 있는 승범의 표정은 달랐다.
증인을 처음 봤을 때 잠시 당황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증인의 진술이 이어질수록 가볍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자.
“이것으로 검사 측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이 거슬리는 태준이 신문을 마치고 검사석으로 발길을 돌리면서도 승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야릇한 미소. 저 미소가 뭔가 개운치 않았다.
“그럼 이제 피고 측 변호인 반대신문 해 주세요.”
“네. 왜요?”
갑작스러운 증인의 등장에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던 김 변호사의 팔을 승범이 갑자기 붙잡았다.
“잠시만.”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자. 깊게 패었던 김 변호사의 미간이 거짓말처럼 펴지기 시작했다.
“증인. 증인은 피고인을 사고 현장에서 봤다고 했는데, 그럼 왜 경찰이나 119에 신고를 하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처음부터 증인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김승범 씨가 하도 괜찮다고 하고, 또 딱히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증인이 김 변호사의 강압적인 태도에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증인은 사고 당시 피고인의 약혼자는 보지 못했다는 건가요?”
“네. 전 동승자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사고가 난 차 쪽으로 가려고 하니까 저를 못 오게 막았거든요. 만약 그때 동승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연히 신고했을 겁니다.”
증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동승자가 있다는 건 언제 알았나요?”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뉴스를 보고 동승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나요? 사고 목격자라고 신고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김 변호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증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이나 기사를 못 봐서 그냥 잘 해결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목격자라고 신고해 봤자 귀찮게 경찰서로 오라 가라나 하고, 그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며칠은 그냥 공치는 거라…….”
증인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지금 갑자기 증인으로 나서신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승범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증인은 피고인이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증인을 돌려보낸 거고,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증인까지 서시게 됐다는 거군요. 맞죠?”
김 변호사가 증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누가 증인을 서 달라 한 건 아니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누군가 증인에게 증언을 강요하거나 하지는 않았냐는 말씀입니다.”
“전혀 그런 거 없습니다. 물론 담당 형사님의 전화를 받기를 했지만, 100% 제 의지로 이 자리에 선 겁니다.”
손사래를 치던 증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해외여행 갔다 오늘 새벽에 도착하셨다고요?”
김 변호사가 태준을 슬쩍 쳐다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 원래 어제저녁 도착인데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오늘 새벽에 도착해서 사우나만 갔다 바로 법원으로 왔습니다.”
“피곤하시겠네요.”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제가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정의감 넘치는 스타일이라 이런 일이 있으면 꼭 해야겠다고 항상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건 불의나 정의감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순 교통사고 재판일 뿐입니다.”
증인이 정의감에 불타는 얼굴로 말하자 김 변호사가 중간에 말을 자르며 퉁명스럽게 다른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기로는 여행 일정을 조금 더 늘리실 수 있었는데. 계획대로 들어오신 건 혹시 이번 재판 증언 때문인가요?”
“아니요. 증인으로 서야 한다는 것도 오늘 새벽에 형사님의 전화를 받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처럼 조금 더 일정을 늘릴 수 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몸이 피곤해서 그냥 원래 계획대로 귀국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재판 증언이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김 변호사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이제부터 자기가 준비한 계획의 2막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네. 그런데 그건 왜.”
증인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정의감이 넘치신다고 하셔서, 예전에도 이런 증언을 서신 적이 있으신가 해서요?”
“아- 네. 처음입니다.”
증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뭔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처음이십니까? 정말 이런 증언이 처음이신 것 맞나요?”
온화하게 미소 짓던 김 변호사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마치 범죄자 대하듯 다그쳐 물었다.
“네. 처음입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거죠?”
“정말 처음이시라는 거죠?”
김 변호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검사석을 한 번 쳐다봤다. 마치 태준에게 넌 이제 이 재판에서 이길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 순간 태준이 아차 하는 생각에 준비한 서류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서류의 한 페이지에서 눈이 멈춘 태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이-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