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37화 (37/669)

#37. 진실 혹은 거짓

“제가 증언이 처음인 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닙니다. 증인. 증인은 택시 운전을 하고 계시니까 차에 당연히 블랙박스가 장착되어 있으시죠.”

태준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한 김 변호사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다시 증인에게 질문했다.

“네. 있습니다.”

“그럼 사고 당시 모습이나 증인이 피고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블랙박스에 다 녹화되어 있겠군요.”

“네. 그런데……”

“그 파일을 담당 형사분 혹은 검사 측에 제출하셨나요?”

김 변호사가 증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오늘 새벽에 도착하는 바람에 재판 출석 전에 담당 형사님께 제출하기로 했었는데……”

“그래서 제출하셨나요?”

“그게…….”

김 변호사의 말을 듣던 증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이번 재판의 핵심적인 증거일 수도 있는 중요한 자료니까 당연히 제출하셨겠네요. 그럼 지금 여기서 그 파일을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이 모습을 놓칠 리 없는 김 변호사가 증인석을 두 손으로 짚고 얼굴을 들이밀며 압박했다.

“그게…….”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말씀해 보세요. 설마… 아직 제출 안 하신 건가요?”

“그게 그러니까…….”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증인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져갔다.

“증인!”

“……없습니다.”

큰 한숨과 함께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떨어뜨리는 증인의 모습에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증인에게 던지는 질문과 달리 김 변호사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오늘 아침에 보니 없어졌습니다.”

증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 증인이 한 모든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그게. 하지만 제가 한 말은 모두 다 사실입니다.”

김 변호사의 말에 증인이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자 이런 상황이 재밌기만 한 승범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편집증에 가까운 완벽주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저 택시 운전기사가 법정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놀란 건 사실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저기 앉아 있는 증인이 지금 애타게 찾고 있는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가 자신의 비밀 장소에 안전히 보관돼 있는 지금.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역시 교통사고 당일 자신과 마주친 택시 번호판을 외워 놔 미리 손을 써 둔 게 신의 한 수라 생각했다.

혹시라도 재판 기간에 증언을 설까 가짜 해외여행 당첨이라는 핑계로 멀리 여행을 보낸 것도 모자라, 그사이에 사람을 시켜 택시 블랙박스 메모리 칩을 바꿔치기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탄하는 승범이었다.

진술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가 없어진 지금. 이제 승리는 자신의 것이라 확신했다.

“증인. 없어졌다는 건 누가 훔쳐 갔다는 건가요?”

“아니요. 영상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럼 누가 파일을 건드렸다는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그래서 형사분께서 급하게 조사 중이십니다. 조만간 밝혀지겠죠.”

증인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승범을 노려봤다.

“그런데 왜? 저희 피고 쪽을 쳐다보시는 거죠?”

그러자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 김 변호사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제 블랙박스 영상이 없어지면 좋을 사람이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증인이 억울함과 분함에 목소리를 높이며 승범을 노려봤지만 승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그 말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신 거 아시죠?”

김 변호사가 증인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힘주어 말했다.

“네?”

“지금 하신 말씀 때문에. 다음번에는 이 자리가 아닌 저 자리에서 명예훼손 재판으로 다시 뵐 것 같아서요.”

고개로 피고인석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웃는 김 변호사의 모습에 순간 호기롭던 증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증인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인정합니다. 변호인, 주의해 주세요.”

“그럼 정말 파일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 알겠군요. 그럼 이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하시죠.”

판사의 제지에도 증인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린 김 변호사가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승범과 눈빛을 몇 번 주고받다 방청석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곳 재판정에도 많은 팬이 있을 정도로 피고인은 모두가 아는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는 법. 피고인을 응원하는 사람만큼 피고인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저기 앉아 있는 증인도 그 두 부류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합니다.”

한 템포 쉬어 가듯 차분한 목소리로 방청객을 향해 말하던 김 변호사의 시선이 갑자기 증인을 향했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재판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또 뭘 끌어들여 사건을 뒤흔들려는 건지.

뜬금없는 김 변호사의 말에 태준이 바로 반박하며 말을 막았다.

“그런데 전 저기 앉아 있는 증인은 피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100% 확신합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 측에서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로 증인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 측, 주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르게 물어보죠. 증인은 평소 댓글 같은 걸 자주 다시나요?”

판사의 제지에 김 변호사가 바로 질문의 주제를 바꿨다.

“네? 그건 갑자기 또 왜?”

“네, 아니요로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뭐, 가끔…….”

갑작스러운 김 변호사의 질문에 증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주로 어떤 기사에 댓글을 다시나요?”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 측에서는 이번 사건과 전혀 무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 사건과 관련된 질문만 해 주세요.”

“재판장님. 증인의 진술 능력에 대한 근거로 작용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증인. 대답해 보세요. 주로 어떤 기사에 댓글을 다시죠?”

김 변호사가 판사의 만류에도 오히려 증인을 다그치며 물었다.

“뭐…… 그냥 인터넷 뉴스 보다가 달고 싶은 거 있으면 답니다.”

“재판장님. 이 자료를 한번 검토해 주시겠습니까?”

증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변호사가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서류 파일 하나를 판사에게 제출했다.

“이게 뭡니까?”

“D 포털 2018년 10월 25일 XX일보 기사 ‘베스트셀러 작가 김승범, 불우 아동들을 위해 남모르게 기부 선행’에 달린 댓글 중 하나입니다.”

판사의 질문에도 김 변호사는 묵묵히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 파일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ID dlkjl. 저 새끼 지 부모 애인 죽이고 보험금으로 저렇게 산다는데. 참 세상 말세야.]

김 변호사의 말이 끝나자 증인석에 앉아 있는 증인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됐다.

“다음은 N 포털의 2018년 11월 10일 ○○일보 기사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작가 김승범과의 밀착 인터뷰”에 달린 댓글 중 일부입니다.”

[ID dlkjl. 기레기놈 저놈한테 얼마나 돈을 처받았길래 저런 살인자 사기꾼 놈 기사를 이렇게 써 주냐. 더럽다, 퉤!]

“저, 그건 제가……”

증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김 변호사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증인. dlkjl 이 ID 증인 ID 맞죠?”

“그러니까 그게……”

“여기 2017년부터 김승범 씨 기사마다 달린 수백 개의 악플들, 증인이 직접 작성한 것 맞죠?”

김 변호사가 서류를 증인 앞에 들이밀며 다시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네, 아니요라고만 대답해 주세요.”

“……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증인의 고개가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방금 제출한 서류는 여기 앉아 있는 증인이 지금까지 피의자의 기사에 단 악플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무려 100개가 넘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패륜적이고 악의적인 악플들을 아주 집요하게 달았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류를 검토하던 판사가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내리며 증인을 바라봤다.

“이렇게 피의자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증인의 진술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증인의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증인이 피의자에 대해 악플을 달았다는 것만으로 증언의 신뢰를 문제 삼는 것은 비약이지 않습니까.”

태준이 잔뜩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김 변호사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비약이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증인. 증인은 과거 재판에서 위증을 해 처벌을 받은 적이 있죠?”

김 변호사가 태준을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회심의 카드를 꺼내 놓자 법정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

증인의 얼굴이 한순간 하얗게 변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증인은 위증죄로 처벌받은 적이 있죠?”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사건과 관련 없는 사항을 통해 증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태준이 승범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재판의 흐름을 끊기 위해 검사석을 박차고 나와 판사를 향해 소리쳤다.

“인정합니다. 변호인, 사건과 관련 있는 질문만 해 주세요.”

“증인, 대답해 보세요. 위증죄로 처벌받은 적 있죠?”

김 변호사가 판사의 말에 개의치 않고 증인을 몰아붙였다.

“그게……”

“빨리 사실대로 말해 보세요!”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증인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또다시 방청석의 술렁거림이 재판정을 가득 메웠다.

“여기 있는 모든 분이 들으셨겠지만. 조금 전까지도 여기 앉아 있는 증인은 이런 증언이 처음이라 말했습니다. 과거 위증죄로 처벌된 경험까지 있으면서 말이죠.”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김 변호사가 이제 재판을 마무리 짓겠다는 표정으로 방청석을 쳐다봤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자 태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증인 신상명세 중 마지막 줄에 작게 쓰여 있던 [위증죄 처벌 경력 있음.]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게 뼈아픈 실책이었다.

“피고인에게 상습적으로 악플을 일삼고, 과거 위증의 경험이 있는 증인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 증언을 하는 오늘 아침. 갑자기 블랙박스의 파일이 사라졌다는 증인의 진술이 과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말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기회를 절대 놓칠 리 없는 김 변호사가 판사와 방청객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열변을 토했다.

“재판장님, 지금 변호인은 자신의 추측만으로 증인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태준이 다급한 목소리로 판사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매도라니요. 오히려 지금 여기 있는 증인이 위증으로 재판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검사는 안 보이는 겁니까?”

하지만 다잡은 승기를 포기할 김 변호사가 아니었다.

“지금 무슨 근거로 증인이 위증했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태준이 흥분한 얼굴로 김 변호사를 향해 소리쳤다.

“검사 측, 잠시만요. 증인. 지금 변호인의 말이 사실입니까?”

태준의 말을 가로막은 판사가 증인을 향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예전에 제가 실수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정말 진실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증인이 정말 억울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재판을 뒤집을 회심의 카드라 생각했던 증인마저 버리는 카드가 되어 버린, 아니 오히려 승범 쪽의 조커가 된 지금.

이제 재판의 승리는 완전히 승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이 없는 이상.

승범이 무죄를 선고받고 유유히 재판장을 걸어 나가는 모습은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다.

“너무 늦는데.”

태준이 초조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태준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판사석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재판장님. 피고인 김승범에 대해 추가 기소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태준의 말에 법정 안 모든 사람이 놀랐다.

“뭐로 추가 기소를 한다는 거죠?”

판사도 살짝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2018년 12월 13일 일어난 피해자 황정식에 대한 살인죄로 추가 기소하겠습니다.”

태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법정 안은 한순간 폭풍에 휩싸인 듯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 승범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살인죄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검사. 정말 살인죄로 추가 기소 할 겁니까?”

판사가 다시 한번 태준에게 되물었다.

“네. 피고인 김승범을 형법 제250조에 근거하여 피해자 황정식에 대한 살인죄로 추가 기소 하겠습니다.”

태준이 확신에 찬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