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로스 타임(loss time)
“갑자기 살인죄로 추가 기소라니요. 지금 뭘 착각하나 본데 이 사건은 이승희 씨 교통사고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 재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을 죽였다니.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겁니까!”
김 변호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변호인 측, 진정하세요. 검사 측, 살인죄로 추가 기소 한 이유가 있나요?”
“서면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판사의 말에 태준이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살인죄 기소 서류를 판사에게 제출했다.
모험이었다. 아니,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약혼자 교통사고 사망 사건 재판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지금.
황정식 살인 사건에 대한 추가 기소로 일단 승범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놓고 그동안의 숨겨진 모든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는 최 반장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 태준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전 살인 사건 증거물을 찾았다는 최 반장의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추가 기소를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던 그였다.
이기지 못할 싸움에 베팅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며칠 전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재판 전까지 무조건 살인 증거를 찾아 놓을 테니 황정식 살인 사건으로 추가 기소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그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경찰의 치기 어린 고집 정도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왠지 그 고집을 한번 믿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덜컥 수락한 제안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검찰청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최 반장의 실력을, 그 감을 직접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변호인 측, 추가 기소 건에 대해 할 말 있습니까?”
심각한 얼굴로 태준이 제출한 서류를 훑어본 판사가 잠시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절대 살인죄에 대한 추가 기소 건에 대해 받아들…”
김 변호가 흥분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승범이 김 변호사의 팔을 붙잡았다.
“그냥 받아들인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김 변호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김승범 씨.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모르세요?”
“그래서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거부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그리고 검사가 추가 기소 한 걸 저희가 거부할 수도 없잖아요.”
“승범 씨.”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김 변호사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아무리 소리쳐 봤자 법정 문을 나서는 순간 언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이미 저를 살인 용의자라 생각할 텐데. 차라리 당당히 재판받고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벗어 버리는 게 나아요.”
“그래도 아직 기소 내용이 뭔지 확인도 못 했는데…….”
“김 변호사님, 저 못 믿으세요?”
승범이 김 변호사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의 당황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차분한 얼굴로 김 변호사와 이야기하는 승범의 모습을 태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당당함과 흔들림 없는 눈빛이 태준에게 묘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아까부터 승범과 김 변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판사가 어느 정도 두 사람의 의견이 정리됐다 생각했는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검사 측이 추가 기소 한 살인 사건에 대한 심리는 앞서 기소된 업무상과실치사에 대한 심리와 함께 병합해서 심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추후 재판은 2주일 뒤 오후 2시에 이곳 법정에서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판사가 재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방청석에서 큰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야.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게. 갑자기 살인 사건 용의자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럼 얼마 전부터 돌던 지라시가 진짜야?”
“아- 그 한 기자가 떠들고 다니던 거?”
“그래. 그 지라시. 이거 진짜면 완전 대박 특종인데.”
갑자기 살인 사건으로 변한 재판 때문에 방청석에 있던 취재진들은 흥분한 얼굴로 실시간 기사를 쏟아 냈고.
“설마. 오빠가…… 에- 아니겠지? 넌 저런 말을 믿어?”
“그래도 뭐가 있으니까 검사가 저러는 거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데 저럴 리는 없잖아.”
“뭐야.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방청석에 있던 승범의 팬들도 한순간 뒤통수 맞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혼란스러운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잠시 후.
방청객들이 법정을 빠져나가자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처럼 법정 안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또각. 또각. 또각.
이내 그 적막감을 깬 건 재판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태준을 향해 검사석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승범의 날카로운 구두 소리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승범이 서류를 정리하는 태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그러자 태준이 악수 대신 가볍게 묵례로 응수했다.
“흠- 재밌는 분이시네요.”
무안한 손을 다시 거두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던 승범의 입가에 이내 서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태준이 분홍색 보자기에 싼 재판 서류를 승범에게 들어 보이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받은 선물은 꼭 잊지 않겠습니다.”
승범이 문을 열고 나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
경찰서 회의실.
추가 기소로 겨우 벌어 놓은 2주라는 로스 타임(loss time)은 벌써 경기 종료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채린이와 최 반장 그리고 성진이 서로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얼마 전 승범의 기억 속에 들어갔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커터 칼?”
“아닌 것 같아요.”
“잭나이프?”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송곳?”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도대체 뭐야! 그리고 넌 인마, 형사라는 게 채린이는 네 뒤에 있어서 못 봤다 치더라도 넌 앞에 있었으면 제대로 봤어야 할 거 아니야. 기억 속에서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뭘 한 거야!”
스무고개 하는 듯한 성진과의 대화에 최 반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화를 내세요. 저도 답답하다고요.”
“너 진짜 기억 안 나?”
“일단 김승범이 주머니에서 꺼냈으니까 작은 물건인 건 확실한데요. 그게 진짜 너무 어두워서… 아- 진짜 미치겠네.”
최 반장의 물음에 성진이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 황정식 살인 도구 때문에 여전히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잘 좀 생각해 봐. 머리는 폼이냐? 분명 놓친 게 있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왜 아직 찾지도 못한 증거를 찾았다고 문자를 보내셔서 이 사달을 만드시냐고요.”
성진이 최 반장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야!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냐! 그리고 그때 아니었으면 김승범 살인죄로 기소도 못 했어.”
승희의 재판 날 이 기회를 놓치면 승범을 살인죄로 추가 기소 할 타이밍을 영영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앞뒤 안 가리고 덜컥 증거를 찾았다 태준에게 보낸 문자가 문제였다.
거기다 살인 사건 추가 기소로 발부된 승범의 구속영장마저 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된 지금.
내일 재판 전까지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 박 검사도 계속 전화 오는 거 아시죠?”
최 반장만큼이나 지금 속이 타들어 가는 건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내일까지 무조건 증거 찾아서 갖다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 그런데 택시 블랙박스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별거 없어?”
“누가 건드린 흔적도 없고 깨끗해요. 아예 메모리 칩 자체가 바뀐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에 차도 없고 CCTV 없는 뒷골목에 세워져 있어서 뭐 찍힌 것도 없고요.”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는 상황.
“그런데 너 진짜 기억 안 나?”
지금 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역시 승범의 살인 도구를 찾는 것뿐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채린이 보고 제 머릿속에 들어가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한숨을 푹푹 내쉬던 성진이 순간 힐끔 채린이를 쳐다봤다. 혹시 진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눈빛으로.
“내가 지금 아무리 급해도 네 머릿속은 너무 더러워서 내가 채린이를 못 들여보내겠다.”
최 반장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성진의 등을 한 대 세게 때렸다.
“아! 더럽다뇨. 제 머릿속은 완전 꿈과 환상의 디즈니랜드거든요. 얼마나 순수하고 판타스틱한데요.”
“뭐? 디즈니? 이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내가 잘 아는데. 디즈니?”
최 반장이 성진의 머리를 쿡쿡 찌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반장님이 한번 들어가 보실래요?”
성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거길 내가 왜 들어가. 무슨 더러운 꼴을 보라고.”
최 반장의 솥뚜껑 같은 손이 다시 한번 성진의 등을 강타했다.
“아! 반장님 진짜!”
상갓집에서도 웃음소리는 새어 나가는 법.
내일 재판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애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채린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보이기 싫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런 둘의 모습이 어쩌면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잠시나마 풀 수 있게 도와주는 여백 같아 채린에게는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너 그런데 며칠 전에 왜 그랬냐?”
최 반장이 다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성진의 팔을 툭툭 쳤다.
“뭐요?”
“정 선생이 김승범 만날 때 왜 그렇게 난리 치면서 뒤따라간 거야?”
“그게… 그런 미친놈이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고….”
성진의 불안한 눈동자가 회의실 안을 이리저리 훑기 시작했다.
“너 정 선생한테 관심 있냐?”
최 반장의 말에 채린의 고개가 슬며시 들렸다. 역시 이런 이야기는… 재밌다.
“네? 제가요? 아니요. 저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해요.”
“그런 스타일이 어떤 스타일인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손을 흔드는 성진의 모습에 최 반장의 농담은 더 짓궂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반장님, 그만하세요. 채린이도 있는데.”
“채린이가 뭐, 인마.”
“전 괜찮으니까 말씀 나누세요.”
채린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채린아- 너까지 왜 그래.”
성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채린을 바라보던 그때.
똑. 똑.
“안녕하세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주철이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 법의관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갑작스러운 주철의 방문에 최 반장의 당황한 시선이 저절로 채린에게 향했다.
경찰서 회의실에 있는 여고생이라.
이 이질적인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반장님도 계셨네요. 황정식 씨 살인 사건 추가 부검 결과 나와서요.”
주철이 서류 봉투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메일로 보내 주셔도 되는데. 번거롭게 뭘 가지고 오셨어요. 일단 앉으세요.”
다른 법의관들과 달리 언제나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주철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한편으론 존경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올 때는 이런 그의 열정이 난감하기만 했다.
특히 이렇게 채린과 함께 있을 때는 더욱더.
“감사합니다. 김 형사, 잘 지냈어?”
‘누구지?’
자리에 앉은 주철이 성진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시선은 회의실 한쪽 의자에 앉아 있는 채린에게 향했다.
“저야 항상 똑같죠, 뭐. 그런데 추가 부검 결과 어떻게 나왔어요? 아니, 그 전에 사용된 흉기가 뭐예요?”
성진이 주철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기며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살인 도구가….”
말을 하던 주철이 회의실 한편 미동도 없이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채린이를 보자 하려던 말을 멈췄다.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아- 제 조카인데. 장래 희망이 경찰이라 경찰서 견학 왔어요. 채린아, 미안한데 잠깐 밖에서 좀 기다릴래?”
주철의 시선을 느낀 최 반장이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네.”
그러자 채린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철을 가볍게 한번 쳐다보고는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조카가 요즘 애들 같지 않게 분위기가 남다르네요.”
“예쁘죠? 꼭 아이돌 같죠.”
최 반장이 또 반달눈을 만들며 팔불출처럼 흥분했다.
“그러게요. 아이돌 같네요.”
예쁘다는 말 외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에 주철이 밖으로 나가는 채린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좀 내성적이라 걱정이에요. 아무튼 그럼 살인 도구 종류는 찾으신 거예요?”
채린이 이야기에 눈가에 번졌던 미소가 사건 이야기에 금세 매섭게 변했다.
“일단 사인은 저번 부검 결과처럼. 경동맥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이고요.”
“흉기는요?”
마음 급한 성진이 주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어들었다.
“상처 부위가 그리 크지 않은 거 보니까 작은 흉기로 찌른 거 같긴 한데. 상처의 깊이가 깊지 않은 거 보면 또 칼은 아닌 것 같고. 뭔가 다른 날카로운 물체로 찌른 거 같은데. 확실하게 어떤 종류인지는 추가 조사를 좀 해 봐야 알 것 같아.”
“그럼 확실한 결과가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최 반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한 일주일 정도?”
“아- 내일이 재판인데. 반장님, 이러다 진짜 김승범 놓치겠는데요.”
답답하기만 한 상황에 성진이 회의실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윤 법의관님. 조금 서둘러 주실 수 없을까요?”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지만….”
똑. 똑.
“저…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때 채린이 회의실의 문을 살짝 열고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채린아, 왜?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지금 좀 바빠서.”
최 반장이 난감한 얼굴로 채린이를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저, 그게 밖에서 우연히 듣다 생각난 건데요.”
하지만 채린은 최 반장의 말에도 어느새 회의실로 들어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 무슨 생각?”
주철이 채린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왠지 그 흉기가 뭔지 알 것 같아서요.”
잠시 주저하던 채린이 주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