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진실
“그래서 그게 뭐요!”
김 변호사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고함 뒤에 감췄다.
“그 유골함이 이번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하지만 머릿속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수습할까, 라는 고민에 벌써부터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연관이요? 방금 보지 않았습니까? 이 만년필이 유골함에서 나온걸요. 이거 말고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태준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말했다.
“지금 검사 측 논리대로라면 살인 현장에 있으면 다 살인범이라는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단지 그 유골함에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희 피고인의 것이다. 그건 억지이자 비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단 무조건 뻔뻔하게 밀고 나가자 계획을 세운 김 변호사였다.
모든 것을 부정한 후 시간을 끌어 재판을 다음으로 넘기는 것.
지금 상황에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럼 상식적으로 납골당의 많은 유골함 중에 왜 피고인의 부모님 유골함에서 이 만년필이 발견됐을까요? 그것도 이런 살인 도구가요.”
태준의 말에 다시 한번 법정 안이 술렁였다.
“아직 정확한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살인 도구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희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넣어 놓은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 변호사가 필사적으로 변론을 이어 갔다.
“물론 아직 이 만년필에 대한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살인 도구로 단정 지을 수도 또 변호인 말처럼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한 누군가의 모략일 수도 있죠.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태준이 다시 유골함에 손을 넣더니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씨-발- 후- 하-”
태준의 손에 들린 노트를 본 승범이 어금니를 깨물며 들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걸 한번 들어 보시고 판단하시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승범의 눈을 태준이 피하지 않으며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중 한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이 하나 생겼다. 어떤 젊은 여기자 하나가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것 같다. 포커스 일보의 한소미 기자. 일단은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이번에도 꽤 느낌이 좋다. 정인혜, 또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려면.]
“저 미친…….”
태준이 읽어 내려가던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자신의 이야기에 인혜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말아 쥐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도 유명을 달리한 승범의 여자들처럼 까딱하면 저 인간의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도대체 뭡니까.”
김 변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태준을 바라봤다.
“저보다는 저분께 여쭤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태준이 어느새 고개 숙인 채 미동도 없는 승범을 바라보며 다시 노트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행운이라는 게 이런 걸까? 아니면 부모님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지켜 주시는 걸까? 요 며칠 불안한 마음에 한 기자의 뒤를 쫓았는데. 우연히 내일 과거 사건의 증인인 황정식을 인터뷰한다는 통화 내용을 들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완벽히 과거의 사건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앞서 준비할 게 많다. 오늘 밤은 여러모로 바쁠 것 같다.]
“저 개새끼.”
태준의 이야기에 이번엔 성진이 몸을 들썩이며 이를 갈았다.
“진정해.”
옆에 앉은 최 반장이 흥분한 성진을 진정시켰다.
“검사, 언제까지 읽을 생각입니까?”
“중요한 몇 개만 더 읽겠습니다.”
판사의 말에 태준이 노트의 끝 쪽을 펼쳤다.
[오랜만에 느끼는 흥분이었다. 황정식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그 마지막 표정이란…… 그 어떤 세계적인 작가도 그 표정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답다? 경외스럽다? 희열? 분노? 절망? 그 어떤 단어도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표정을 설명할 순 없다.]
이야기를 듣던 최 반장이 깊은 탄식을 내쉬며 잔뜩 미간을 찡그렸다.
[어둠에 스며드는 그의 붉은 피가 마치 깊은 밤 피는 붉은 꽃 같았다. 하지만 즐거움과 희열 뒤엔 언제나 공허함과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물처럼 찾아온다. 뒤처리는 언제나 귀찮다. 그래도 미리 사우나에 다 준비를 해 놔서 다행히 오늘 인터뷰에 늦지는 않았다.]
채린이 그날 기억 속에서 봤던 처참한 모습이 떠올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 최 반장과 김 형사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만년필을 바꿔 놔야겠다. 그 두 놈도 처리해야 하는데…… 아주 눈에 거슬린다.]
“이상입니다.”
태준의 말이 끝나자 법정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피고인석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는 승범에게 향했다.
“김승범 씨. 이거 본인이 쓴 거 맞죠? 얼마 전 출연한 프로에서 본인 입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한 노트가 있다고 했는데. 이게 그 노트 아닙니까?”
천천히 피고인석으로 걸어간 태준이 승범 앞에 노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
“그리고 그 노트는 자신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안전히 보관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 장소가 저기 있는 부모님의 유골함 아닙니까?”
“…….”
하지만 승범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당신이 저지른 모든 살인과 더럽고 추악한 진실이 전부 적혀 있는 노트가 아니냐 말입니다!”
태준이 피고인석 책상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노트를 흔들며 승범을 몰아세웠다.
“…….”
“그럼 다르게 물어보죠. 당신이 황정식 씨 죽인 거 맞죠?”
“……아니.”
미동도 없던 승범이 그제야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황정식 죽인 거 맞잖아!”
태준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검사. 지금 피고인한테 뭐 하는 겁니까. 저리 비키세요.”
김 변호사가 흥분한 태준을 밀치며 말했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소설가입니다. 저기 노트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 소설입니다. 피고인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소설? 지금 소설이라고 했습니까?”
김 변호사의 말을 들은 태준이 씩씩거리며 유골함을 들어서 바닥에 쏟았다.
“어머- 왜 저래-”
“저기 부모님 유골 있을 거 아니야?”
“아!”
방청석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졌다.
후-두두둑.
방청객들의 걱정과 달리 유골함에서는 뼛가루 대신 작은 노트 4~5권이 더 쏟아져 나왔다.
쨍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 묻은 작은 칼 한 자루가 떨어졌다.
“그럼 이건. 이건 뭡니까? 이 피 묻은 칼은 뭡니까? 이건 또 어떤 피해자를 살해한 칼입니까? 네?”
태준이 지문을 묻히지 않으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골함에서 나온 칼을 집어 들고 김 변호사와 승범을 향해 소리쳤다.
***
“반장님. 저 칼 그 황정식이 목격했다는, 김승범 전 약혼자를 살해한 그 흉기 아닐까요?”
성진이 태준이 들고 있는 칼을 보고 놀란 눈으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그런 것 같은데. 저 짐승만도 못한 새끼.”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최 반장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승범의 만행에 돌덩이 같은 주먹을 말아 쥐며 핏대를 세웠다.
“아니.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제발 피고인과 모든 사건을 엮지 마세요. 누누이 말하지만 그 유골함에서 나왔다고 다 피고인이 한 거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김 변호사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변론했다.
“그럼 이 노트들에 적혀 있는 모든 사건 기록들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여기 노트에 있는 내용의 대부분이 부모, 애인 죽이고 보험금 탔다는 내용 아니면 그 준비 과정. 그리고 마치 감상문처럼 사건 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써 놓은 글들인데. 변호인은 이 증거들을 보고도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태준의 분노 섞인 외침이 법정을 가득 메웠다.
“그건.”
김 변호사가 움찔하며 옆에 앉은 승범을 바라봤다. 하지만 승범은 여전히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피고인. 그리고 이번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약혼자 이승희 씨도 일부러 보험금 타려고 죽인 거 아닙니까? 아니, 혹시 당신의 이런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죽은 건가요?”
태준의 말에 방청석이 또다시 술렁였다.
“제가 한번 그날의 일을 설명해 볼까요? 사건이 일어난 그날. 두 사람은 피고인 부모님의 납골당에 함께 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갔겠죠. 여기 노트를 봐도 그때까지 저기 앉아 있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죽일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했겠죠.”
입을 굳게 닫은 채 고개 숙인 승범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태준이 그날의 진실을 하나씩 풀어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피고인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이승희 씨가 피고인 부모님의 납골당을 청소하고 다시 꾸미던 중, 우연히 저기 유골함 속에 들어 있던 살인 기록이 담긴 노트들과 살인 흉기를 발견했던 거죠.”
태준이 손으로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그날 있었던 일을 직접 본 것처럼.
“피고인은 당황했을 겁니다. 약혼자가 자신의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당황도 잠시. 피고인은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어차피 할 일을 조금 일찍 실행할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말이죠.”
방청석에서 간간이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태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피해자를 차에 태운 후 급히 차를 몰고 납골당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태준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승범의 앞으로 걸어갔다.
“피고인, 한번 대답해 보세요. 자신의 추악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비정하게 약혼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가식적인 눈물을 사람들 앞에서 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어서 대답해 보세요!”
태준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아니, 지금 무슨 소설 씁니까? 단순한 추측과 비약 그리고 상상만으로 어떻게 사람을 살인자로 몰 수 있습니까? 소설은 저희 피고인이 아니라 검사가 써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제발 증거다운 증거를 가져오고 이야기하세요.”
김 변호사가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변론을 늘어놨지만,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뒤집을 수 없는 판이라는 것을.
“안 그래도 그렇게 나오실 것 같아. 지금 수사관들이 변호인 측이 좋아하는 그 증거 가지러 피고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물론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서요. 이렇게 모든 면에서 치밀한 피고인이라면 당연히 사건이 일어난 그날 납골당 안에서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찍힌 CCTV도 어떻게든 구해 따로 보관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태준이 김 변호사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방청석에 앉아 있는 최 반장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상자를 건네주며 했던 최 반장의 말대로였다.
유골함도, 그 유골함에 들어 있던 증거들도,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도 궁금한 그날 납골당 안에서의 일들까지.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말해 주는 최 반장의 모습에 그에 대한 소문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휴-”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한 김 변호사가 더 이상의 대응을 포기한 듯 지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과 증거물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셔서 저기 앉아 있는 피고인에게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흐흐, 흐흐흐…… 흐흐흐. 하하하.”
고개 숙이고 있던 승범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내가 다 죽였어.”
갑자기 웃음을 멈춘 승범이 고개를 들어 섬뜩한 눈빛으로 방청석과 태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 그게 무슨 잘못이야? 다들 날 사랑했던 사람들이야. 나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럼 날 위해 죽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안 그러냐고!”
광기. 살의를 온몸으로 뿜으며 절규하듯 소리 지르는 승범의 모습에 순간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숨죽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어! 왜 나한테만!”
탕. 탕. 탕. 탕. 탕.
그리고 점점 격해지는 감정에 수갑 찬 손으로 피고인석을 치며 발광했다.
“피고인. 조용히 하세요. 경위, 끌고 나가세요. 그럼 잠시 휴정……”
“내가 뭘 잘못했냐고. 이 개새끼야!”
그 순간.
판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줄에 묶여 있던 미친개가 줄을 끊고 달려 나가듯, 수갑을 찬 승범이 눈 깜짝할 새 피고인석을 뛰어넘었다.
“죽어!”
그리고 당장이라도 태준의 목을 물어뜯어 죽여 버리겠다는 얼굴로 미친 듯이 검사석으로 뛰어갔다.
“야! 잡어.”
“빨리 잡으라고.”
법정 안 모든 사람이 승범의 돌발 행동에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야! 김승범!”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난 성진이 승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도 죽어!”
그러자 목표물을 바꾼 승범이 성난 이빨을 드러내며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순식간에 승범의 멱살을 휘어잡은 성진이 온 힘을 실어 엎어치기로 승범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포효했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