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설마 만난 거 아니지?
“진영 씨. 어떻게 마음은 좀 편해지셨나요?”
“네. 조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이랑 대화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진 것 같아요.”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진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인혜가 환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옆에 놓아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스톱워치의 숫자가 00:10:00에 멈춰 있었다.
정확히 10분.
10분 동안 기억 속에서 채린이 뭔가를 찾아냈기를 바라며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스톱워치를 화면에서 지웠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마치 무슨 꿈을 꾼 것 같네요. 그리고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진영이 뻐근한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너무 대화에 집중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제 이야기에 이렇게 집중해 주셔서 전 기쁜데요.”
인혜가 싱그러운 미소로 진영을 바라봤다.
“그런가요? 전 정 선생님 미모에 취해서 그런 것 같은데.”
진영이 끈적끈적한 눈길만큼이나 느끼한 멘트를 날렸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런데 진짜 어떠셨어요? 스트레스 해소에 좀 도움이 되신 것 같으세요?”
인혜가 진영의 눈빛을 가볍게 넘기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괜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입 밖으로 새어 나오던 말을 다시 입안으로 삼킨 진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불편하셨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뜬금없이 생각나서.”
“무슨 기억인데요? 안 좋은 기억인가요?”
“뭐…… 그런데 대화하다가 좀 이상한 게 있었어요.”
진영이 인혜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어떤 점이요.”
인혜가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옛날 일이 생각났는데, 옛날에 진짜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네?”
인혜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채린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방으로 향했다.
“오래전 기억이긴 한데…… 제 기억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일이요?”
똑. 똑.
“끝나셨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그때 기다렸다는 듯 최 반장이 취조실 안으로 머리를 슬쩍 들이밀었다.
“아니요. 지금 방금 끝났어요. 들어오세요.”
인혜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최 반장을 맞았다.
최 반장의 얼굴을 보니 다행히 채린이에게는 별일 없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벌써요? 벌써 끝났다고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진영이 상담이 끝났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아쉽네요. 그런데 제가 다른 분들 상담도 해야 해서요.”
“네. 그럼 이따 약속 잊지 않으셨죠?”
진영이 핸드폰을 흔들며 묘한 미소를 짓자 최 반장의 시선이 저절로 인혜에게 향했다.
“아- 네.”
그러자 인혜가 어색한 미소로 최 반장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정 선생님. 오늘 갑작스러운 부탁인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바쁘실 텐데 빨리 가 보셔야죠.”
그 눈빛을 받은 최 반장이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며 인혜에게 옆방으로 가 있으라 눈짓했다.
“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진영 씨, 그럼 잘 해결되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인혜가 미소 머금은 얼굴로 진영에게 인사하며 취조실 문을 열었다.
“저. 정 선생님. 잠시만요.”
그때 갑자기 밖으로 나가는 인혜를 진영이 불러 세웠다.
“네? 왜 그러세요?”
“저-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갑작스러운 진영의 행동에 인혜와 최 반장이 순간 긴장했다.
혹시라도 채린이가 기억 속에 들어갔던 걸 눈치챈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뭐가요?”
“아까 제가 마지막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네.”
안 그래도 따로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물어보고 싶던 내용이었다.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없었던 일인 것 같은데, 선생님하고 상담하고 나니까 왜 제가 기억도 못 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걸까요?”
진영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인혜를 바라봤다.
분명 채린이 때문이었다.
진영은 지금 기억 속에서 채린이가 한 어떤 행동 때문에 자신의 기억이 변형되어 혼란스러워하는 거였다.
“그래서 많이 불편하신가요?”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기억 속 진영과 마주쳤다면 채린이의 얼굴을 아는 진영이 채린이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직접 마주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자기가 최면을 거는 사이 뭔가 사달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신기해서요.”
진영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이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일상적인 일들이 이번 대화를 통해 자극받아 순간 선명해진 것 같네요. 아마 진영 씨가 이번 사건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그런 것 같네요. 별일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기억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애써 난감한 표정을 감춘 인혜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댔다.
“하긴, 제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긴 하죠. 진짜 선생님 병원 한번 가 봐야겠네요.”
인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진영이 다시 환하게 웃었다.
“윤진영 씨. 정 선생님한테 이제 더 이상 궁금한 거 없죠? 그럼 뭐 먹을래요. 설렁탕 먹을래요?”
옆에서 난감해하는 인혜를 도와주려고 최 반장이 얼른 화제를 돌리며 인혜에게 빨리 나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뭔 설렁탕이에요?”
진영이 최 반장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그럼 전 이만.”
어수선한 틈을 타 인혜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제가 이따 전화드릴게요.”
진영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는 인혜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쾅.
“진영 씨, 어떻게, 괜찮았어요?”
문이 닫히자 그제야 최 반장이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것보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겁니까?”
하지만 인혜가 나가기 무섭게 진영은 다시 날을 세우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그전에 우리 밥이나 먹고 합시다. 설렁탕 먹을래요? 이 동네 설렁탕 잘하는데.”
“뭘 아까부터 계속 설렁탕이에요. 짜증 나게. 빨리 끝내나 줘요.”
“김 형사가 와야 하는데. 일이 좀 늦어져서. 일단 밥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요. 그럼 순댓국? 뼈다귀?”
하지만 최 반장은 진영의 볼멘소리에도 메뉴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씨- 진짜 짜증 나게…… 순댓국이요.”
진영이 못 이긴 척 메뉴를 툭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솔직히 배가 고프긴 했다.
“OK! 그럼 조금만 쉬고 있어요. 금방 시켜 줄게요.”
최 반장이 벽면 유리를 향해 슬쩍 윙크하며 밖으로 나갔다.
***
“채린아. 너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상기된 표정으로 관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혜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창백해? 그곳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야? 진짜 괜찮아?”
채린이의 창백한 얼굴을 본 인혜가 놀란 얼굴로 뛰어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진짜 괜찮아요.”
채린이 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지럽거나 매슥거리거나 두통 같은 건 없어?”
하지만 괜찮다는 채린이의 말에도 인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채린이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진짜 없어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이 옆에 있는 물로 목을 적시며 숨을 골랐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그런데 김 형사님은 어디 가셨어?”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지 인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영 오빠 기억 속 여자 찾으러 가셨어요.”
“그럼 그 알리바이 여자는 찾은 거야?”
“네.”
“다행이다. 그 여자는 누구야?”
“그것보다 저 진영 오빠 기억 속에 혼자 들어갔다 왔는데요.”
채린이 인혜가 원하는 대답 대신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들어갔다 왔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예상대로였다.
“네.”
“갑자기 왜? 이제 혼자 들어가지 않기로 했잖아.”
“그냥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좋아.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너 혹시 기억 속에서 윤진영 만났니? 조금 전에 윤진영이 이상한 이야기 하던데.”
인혜가 특수 유리 너머 잔뜩 인상 쓰고 있는 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영 오빠가 뭐라고 하는데요?”
채린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예전에 없던 기억이 갑자기 생긴 것 같다고 하던데.”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채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마주친 거야?”
“아니요. 만나지는 않았어요. 만날 뻔했죠.”
채린이가 조금 전 기억 속 창고 일을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나는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만날 뻔?”
아리송한 말에 인혜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네. 최면 시간 10분이 지나서 걸리기 직전에 저절로 빠져나왔어요.”
다시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정말? 어디서 만날 뻔한 거야?”
“진영 오빠 집 창고에 숨어 있었는데 거기서 들킬 뻔했어요.”
“그런데 왜 다시 들어간 거야?”
퍼즐 조각 같은 채린이의 말을 이제 본격적으로 맞춰 보겠다는 듯 인혜가 채린이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아까. 진영 오빠가 힘든 일 있었다고 했을 때, 그냥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들어갔다 왔는데요.”
“그냥 느낌이 그래서 들어갔다고? 예전 김승범 때처럼?”
“네. 그런데 진짜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여자 비명 소리도 들었고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비명 소리에 채린이가 떨리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비명 소리?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기억 속에서?”
인혜가 떨리는 채린이의 두 손을 꼭 잡아 주며 물었다.
“비명 소리라니. 채린아, 그게 무슨 말이야.”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최 반장의 미간이 채린이의 말에 일그러졌다.
“윤진영은 어떡하고 벌써 이리로 오세요. 혼자 저렇게 둬도 괜찮아요?”
인혜가 유리 벽 너머 옆방 취조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진영과 최 반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괜찮아요. 지금 밥 시켜 주고 오는 길이니까. 채린아, 비명 소리라니 자세히 좀 말해 줄래. 아니, 그 전에 그게 언제 기억이야? 요즘이야?”
최 반장이 인혜에게 신경 쓰지 말라 손짓하며 혹시 진영의 여죄(餘罪)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으로 채린이를 쳐다봤다.
“아니요. 2013년 11월 기억이니까. 고3 수능 끝나고 기억 같아요.”
“고등학교 때 기억이라고? 꽤 오래된 기억이네.”
인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네. 지금 오빠 나이가 25살이니까요.”
“그 비명 소리는 정확히 어디서 들은 거야?”
최 반장이 수첩을 펴며 채린이 앞 의자에 앉았다.
“진영 오빠 집 안이요.”
“집 안?”
뭔가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겼다.
“네.”
“어떤 집? 지금 윤진영이 사는 빌라?”
“진영 오빠가 지금 어디 사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요. 제가 본 집은 엄청 큰 단독주택이었어요.”
“그럼 윤진영 본가 같은데…… 그래서 그 비명을 누가 지른 건지 봤어?”
“아니요. 그걸 알아내기 전에 나와서요.”
“그래…….”
최 반장이 수첩을 접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좀 이상했던 건요.”
“이상한 거?”
하지만 채린이 다시 말을 잇자 최 반장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네. 진영 오빠 집 안에서 진짜 절규에 가까운 여자 비명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요.”
“집에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야?”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혜가 설마 그랬겠냐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집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진영 오빠 친구들도 셋이나 있었고 무슨 중년 남자도 있었고 또 집에 아줌마도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집 안에 사람이 많았는데 비명 소리를 듣고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최 반장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네. 아무도요.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제가 느끼기엔 오히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 같았어요.”
“왜?”
인혜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걸 확인하고 싶었는데 중간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채린이 아쉬운 얼굴로 어느새 순댓국을 먹고 있는 진영을 바라봤다.
“분명 여자 비명 소리였어?”
최 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
“그럼 혹시 예전에 같이 살았다는 그 운전기사 딸 비명 소리 아닐까?”
“한민지요?”
“그래. 한민지. 그 여자 비명 소리 아닐까?”
“그런데 한민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같이 사는 사람의 비명 소리를 듣고도 그렇게 모른 척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진영 오빠 집에 환자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일부러 모두 모른 척했을 수도 있고, 일단 그 부분은 한번 조사해 봐야겠다. 채린아. 그럼 조금 전에 거기에 있었다는 사람들 얼굴 보면 다 알 수 있어?”
“네. 다 알 수 있어요.”
“그럼 혹시 이름 같은 거 들은 거 없어?”
“이름이요? 아! 있어요. 무슨 국선 아저씨라고…….”
“김국선?”
최 반장이 놀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 성은 잘 모르겠는데. 국선 아저씨라고 했어요.”
최 반장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빈손으로 기억 속에서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반장님. 이건 또 다른 사건이에요? 이번 윤진영 사건하고 다른 거예요?”
인혜가 자기에게도 설명해 달라는 얼굴로 말했다.
“일단은 조사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위- 위윙- 윙.
그때 최 반장의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어- 어. 뭐? 죽어?”
전화를 받은 최 반장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