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관찰자 시점
“수면 마취요?”
치과 의자에 누워 있던 승한이 놀란 얼굴로 몸을 반쯤 일으켜 원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 수면 마취라고 해서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엑스레이 보시면 여기 위하고 아래 어금니 뒤쪽 사랑니가 신경 근처에서 뉘어서 났거든요. 이걸 뽑으려면 이 부분을 절개하고 치아를 부숴서 뽑아야 하는데. 이게 그냥 뽑기에는 환자분에게 좀 부담이 될 수 있어서 수면 마취를 제안드리는 겁니다.”
원장이 승한 눈앞에 있는 모니터에 띄워진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일반 마취 하고 뽑으면 안 돼요?”
승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별 거부 반응 없이 자신의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던 원장이 까칠한 승한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혹시라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 몇 번이나 성진과 연습을 했는데도 막상 눈앞에 닥치니 자기도 모르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나마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있어 당황한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저번 병원에서 안 뽑아 드린 것도 이런 경우가 신경 위에 있어서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케이스라 거절했던 것 같은데. 저희는 이런 경우 뽑아 드리기는 하지만 보통은 수면 마취 후 뽑기 때문에, 만약 이런 방법을 원치 않으신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병원에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은 원장이 승한이 주저하면 한번 튕겨 달라 부탁했던 성진의 미션까지 완벽히 수행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빨리 뽑아나 줘요. 아파 죽겠으니까.”
승한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장의 말을 수락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치통을 참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슨 마취제 쓰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쓰는 수면 마취보다는 약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웃음 가스인가 그거 쓰는 거예요?”
의자에 누워 의사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승한이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웃음 가스도 아시네요. 그런데 말씀하신 그건 아산화질소(N₂O)를 쓰는 건데. 그게 애들한테는 효과가 있고 괜찮은데, 어른들에게는 마취 효과가 적어서 저희 병원에선 다른 걸 씁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꼬치꼬치 묻는 승한의 모습에 원장이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럼 어떤 걸 쓰는데요? 또 무슨 이상한 거 써서 부작용 있거나 재수 없어서 안 깨는 거 아니에요?”
승한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의사를 노려봤다.
“그런 경우는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미다졸람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아- 미다졸람. 그거 내가 예전에 많이 해 봤는데…….”
익숙한 약 이름에 그제야 승한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말했다.
약쟁이에게 미다졸람은 어린아이 사탕 정도였다.
“예? 많이 해 보셨다고요?”
“아니, 뭐 됐어요. 빨리 시작이나 하죠.”
승한이 대충 말을 뭉개며 의사의 눈을 피했다. 굳이 약쟁이라는 걸 티 낼 이유는 없었다.
“그럼 먼저 마취 전에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수면 마취는 아예 의식이 없는 전신마취가 아니라, 약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호흡 가능하시고 제 목소리도 들리실 겁니다. 그리고 제 소리에 반응도 하실 수 있고요.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잠자면서 꿈꾸는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다 잘 아니까 빨리 뽑아 주기나 하세요. 진짜 아파 죽겠으니까.”
의사의 구구절절한 설명에 승한이 이미 잘 알고 있어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마취는 다른 선생님이 해 주실 겁니다. 김 간호사, 이 선생님 좀 모시고 오세요.”
“다른 선생님이요? 원장님이 안 하시고요?”
놀란 승한이 번쩍 눈을 뜨며 말했다.
치과에서 마취를 다른 사람이 한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 저희 병원에서는 환자분들의 안전을 위해 전문 마취과 의사분이 해 주십니다.”
“아- 그건 좋네요.”
승한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선생님, 여기 환자분 부탁드릴게요.”
잠시 뒤 인혜가 흰색 가운을 걸치고 마스크를 쓴 채 원장실에서 모델같이 걸어 나오자, 치과 의자에 누워 있던 승한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와-’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입안으로 삼키며 인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흰색 가운과 마스크도 인혜의 미모와 포스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혜의 상냥한 목소리가 승한의 귓가를 간질였다.
“안녕하세요. 마스크를 쓰셨는데도 미인이신 것 같네요.”
승한이 인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저 눈빛은.’
순간 인혜가 몸을 살짝 움츠리며 의자에 앉았다.
기분 나쁜 것을 떠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과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왜 이런 놈들은 하나같이 이런 눈빛과 분위기를 풍기는지 나중에 연구라도 한번 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말이라도 기분 좋은데요? 그럼 바로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김 간호사, 준비해 주세요.”
승한의 시답잖은 추파와 기분 나쁜 눈빛에도 시종일관 눈웃음으로 대답하던 인혜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살짝 눈짓했다.
“자, 보이시죠. 이 약으로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뒤. 간호사가 가져온 트레이에서 주사기를 집어 든 인혜가 일부러 승한의 눈앞에 보여 주며 말했다.
‘본 건 믿는다.’라는 이런 기본적인 논리가 최면에 깊게 빠지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네.”
“잠깐 따끔하니까 긴장 푸세요. 힘주시면 아픕니다.”
그리고 천천히 승한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호흡이 가빠지신다거나 심장이 뛴다거나 그런 거 없으시죠?”
인혜가 조심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폈다.
만에 하나라도 미다졸람 부작용이 있으면 낭패였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약쟁이인 승한에게 그런 부작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마음 편안하게 하시고요. 요 근래 있었던 일들 한번 떠올리시다 눈뜨시면 치료 끝나있을 겁니다. 긴장하지 마세요.”
마취에 빠져 최면에 들어가기 전 가장 최근의 일들을 떠올리게 해 승한의 기억 속 상태를 채린이가 활동하기 쉽게 세팅하려는 인혜였다.
“요 근래 내가 무슨 일…….”
잠시 후 승한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다 이내 쏟아지는 잠에 눈을 감고 몽롱한 상태로 몇 마디 중얼거리다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유승한 씨. 유승한 씨, 제 말 들리세요?”
인혜가 누워 있는 승한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마취 상태를 확인했다.
몇 번을 두드려도 눈 한번 뜨지 못한 채 죽은 듯이 곯아떨어진 승한의 모습에 인혜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실 문을 열었다.
“됐어요. 이제 시작하죠.”
“마취는 잘됐어요?”
초조한 얼굴로 밖의 상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최 반장이 원장실 문을 연 인혜를 보자 대뜸 결과부터 물었다.
“보세요.”
그러자 인혜가 대답 대신 진료 의자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승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휴- 채린아, 그럼 시작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최 반장이 옆에서 눈을 감은 채 준비하고 있던 채린이를 부드럽게 불렀다.
“네.”
천천히 눈을 뜬 채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원장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채린이가 진료 의자에 누워 있는 승한의 일그러진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아니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잠을 자는 중에도 저런 인상을 쓸 수밖에 없는 건지.
얼마나 끔찍하고 더럽고 추잡한 기억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짜 마취된 것 맞아요?”
최 반장이 승한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의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보세요. 용량도 일부러 조금 더 늘려 주사해서 절대 깨어날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인혜가 깊은 잠에 빠진 승한의 팔을 보란 듯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죠. 원장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최면 수사’를 해야 해서 집중해야 하니까 죄송하지만 간호사분들하고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대기실에서 이 상황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원장과 간호사들에게 최 반장이 ‘최면 수사’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하도 TV나 드라마에서 최면 기법으로 수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많으니 핑계 대기는 수월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2시간쯤 뒤에 들어오면 되나요?”
“네. 저희가 미리 끝나면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분도 형사님이신가요?”
원장이 앳돼 보이는 채린이를 호기심 가득한 눈짓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팀 에이스입니다.”
최 반장이 슬쩍 채린이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만들 나가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럼 이따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하라는 최 반장의 눈짓을 받은 성진이 밖으로 나가는 원장과 간호사들을 사람 좋은 미소로 문 앞까지 배웅하곤 안에서 병원 문을 잠갔다.
“반장님. 문까지 다 잠갔습니다. 이제 진짜 시작하셔도 됩니다.”
진료실로 들어온 성진이 살짝 긴장된 얼굴로 채린이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진짜 시작하죠. 채린아, 준비됐니?”
최 반장의 말에 채린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 선생, 시작해 주세요.”
사인을 받은 인혜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승한 씨. 유승한 씨는 지금 굉장히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며칠 전 있었던 이지은과 관계된 가장 중요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 둘. 셋.”
적막함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진료실에 부드러운 인혜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퍼지자 승한이 살짝 눈꺼풀을 떨며 구겨졌던 인상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
그러자 인혜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채린이를 지그시 바라보다 배웅 인사 하듯 가볍게 눈인사했다.
“네. 갔다 올게요.”
채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채린아, 눈떠도 돼?”
질끈 두 눈을 감은 성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와-”
천천히 눈을 뜬 성진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기 눈앞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자동차의 소음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과 볼을 스치는 바람까지. 자기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똑같은 모습은 몇 번을 경험해도 경이로울 뿐이었다.
“어! 저기 언니예요.”
성진이 정신 못 차리고 현실과 같은 기억 속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 채린이가 손가락으로 찻길 건너 카페를 가리켰다.
“어디? 어디?”
채린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카페 안 창가 쪽 테이블에, 잔뜩 화난 얼굴의 지은과 그런 지은 앞에 고개 숙인 채 죄인처럼 앉아 있는 승한의 모습이 보였다.
“싸우는 것 같죠?”
언제나 밝게 웃기만 하던 지은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처음 보는 그녀의 화난 모습에 채린이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러게. 여기서는 뭐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가까이 가 보자.”
답답하긴 성진도 마찬가지였다. 카페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잠깐만요.”
채린이가 길을 건너려는 성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지은의 팔을 승한이 잡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따귀를 날린 지은이 곧이어 승한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언니가 저렇게 화가 난 걸까요?”
“그러게. 아마 재판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지은도 승한도 둘 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아직 둘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때.
카페 문을 박차고 나오는 지은의 모습에 두 사람이 급하게 가로수 뒤로 몸을 숨겼다.
“언니 쫓아갈까요?”
“아니. 친구 만나러 가는 걸 거야. 얼마 전에 그렇게 진술했거든. 일단은 저놈부터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 보자.”
“네. 그런데 지금 누구랑 통화하는 걸까요?”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지은에게서 이젠 카페 안 창가 테이블에 혼자 남은 승한에게로 시선을 돌린 채린이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 기억 속 시간이 4시니까. 저 부분은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성진이 핸드폰 화면에 현재 시간과 함께 듀얼로 떠 있는 기억 속 시간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채린아. 따라가자.”
전화를 마친 승한이 잔뜩 화난 얼굴로 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어딘가로 향하자 성진이 다급하게 뒤에 오는 택시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저씨, 저기 앞에 가는 택시 좀 따라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