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104화 (104/669)

#104. 흔적

며칠 뒤 인혜의 병원.

“결국 원점이네.”

성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만지작거렸다.

승한과 창수의 집과 주변 인물들을 다시 조사하고 심지어 교도소에 있는 승한의 기억 속에까지 다시 들어갔다 왔지만.

파일에 대한 단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럼 일단 김국선 사건 이후 김창수 사건 사이 그 중간의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 건데.”

최 반장이 금연 사탕을 입에 밀어 넣으며 눈썹을 실룩였다.

“역시 심현보 때 사건을 털어 봐야 할 것 같아요.”

성진이 팔짱을 끼며 턱을 쓰다듬었다.

“채린아, 너도 유승한 기억 속에서 특별히 찾은 거 없다고 했지?”

“……네.”

인혜의 질문에 채린이 살짝 시선을 찻잔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승한의 기억 속에서 비록 파일에 대한 단서를 찾진 못했지만.

왠지 예상치 못했던 큰 진실을 마주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지은의 일.

승한의 기억 속에서 본 지은의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직접 지은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 볼까도 했지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승한의 기억 속에서 언니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봤으니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말할까?’

그렇다고 지은의 이야기를 지금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했다간. 지금 당장 지은의 기억 속에 들어가 진실을 확인하자 할 게 뻔했기에 쉽사리 지은의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지은의 기억 속을 휘젓고 다니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아직까지 지은의 기억 속 그녀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채린이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채린아, 무슨 고민 있어?”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최 반장이 채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항상 채린이의 작은 표정 변화까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그였다.

“아니요. 없어요.”

채린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계처럼 툭 튀어나온 대답이었지만. 어찌 보면 고민하던 자신에게 지금 지은의 일을 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마음속 진심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언니를 한번 만나 보자.’

일단 세 사람에게 지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지은을 직접 만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지은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채린이도 사건이 잘 안 풀리니까 그런 거겠죠. 유승한 기억 속에 두 번이나 들어갔다 왔는데. 알아낸 것도 별로 없잖아요. 그때 나중에 혼자 들어간 촬영장 기억 속에서도 별거 없었다며.”

성진이 답답한 얼굴로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네.”

자신이 나가고 채린이 한 번 더 승한의 기억 속에 들어갔던 이유가 파일을 찾기 위해서라고 굳게 믿고 있는 성진이었다.

“그래도. 김국선 사건의 진범은 알아냈잖아요.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죠.”

인혜가 축 처진 세 사람을 위로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미 그 진범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감옥에 있는데. 진짜 중요한 놈은 지금 밖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니까 미치겠다는 거죠. 저걸 당장 잡아 처넣어야 하는데.”

성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신문 연예면 헤드라인엔 해외 공연을 마치고 공항에 입국하며 미소 짓는 진영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다.

“윤진영이 한민지를 성폭행한 것도, 죽은 김국선과 김창수를 비롯한 진영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진영의 사주를 받고 재판에서 거짓 증언으로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도 다 사실인 거죠?”

인혜가 다리를 꼬며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승한의 기억 속에서 확인한 바로는 확실해요. 그 일 때문에 김국선이 죽은 거니까요. 물론 다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하지만요.”

채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맨 처음 자살했다는 진영의 집에서 일했던 이명자라는 아주머니도 김창수에게 살해된 거예요?”

“아니요. 그분은 자살이 맞아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김창수가 원래는 김국선 대신 이명자 씨를 통해 윤진영을 잡을 계획이어서 먼저 과거 한민지 씨 일에 대해 슬쩍 꺼냈는데. 아무래도 그게 과거 일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둘이 이명자 씨에서 김국선으로 목표를 바꾼 거예요.”

성진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기억 속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승한이 다 진술한 거예요?”

인혜가 만년필을 손가락 위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네. 일단 지 혼자 죽을 수 없으니까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긴 하는데. 얘가 요즘 상태가 안 좋아서 조사하는 게 쉽지 않네요. 화도 주체 못 하고 헛소리도 많이 하고.”

약물에 대한 금단증상과, 진영에 대한 분노로 점점 정신 줄을 놓아 가는 승한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랬는지 혹시 물어보셨어요?”

그때 채린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성진을 바라봤다.

“어떤 거?”

“유승한이 지은 언니네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검정 비닐 봉투를 차 타고 온 하 변호사에게 건네고, 나중에 하 변호사가 다시 김창수 집 우편함에 넣어 놨던 거요. 그건 왜 그런 거래요? 그리고 김국선 집에서 피 묻은 옷 넣은 가방은 어떻게 처리했대요?”

소파에 등을 기대던 채린이 앞으로 몸을 끌어당기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아- 그거. 일단 그 가방은 그날 공터에서 다 태웠다고 했고, 검정 비닐 봉투를 하 변호사가 가지고 갔던 건. 승한이 가지고 온 머리카락하고 증거들이 진짜 이지은 씨께 맞나 DNA 검사하느라 그랬다고 하더라고.”

“정말요?”

채린이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그리고 그 봉투에 든 물건들이 이지은 씨 게 맞는다는 걸 확인한 후에 다시 김창수 집 우편함에 넣어 둔 거지. 그걸로 이지은 씨가 한 걸로 꾸미라고 말이야. 정말 지독한 놈들 아니냐? 어떻게 DNA 검사까지 할 생각을 하지?”

성진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 하 변호사도 공범이네요. 지금 당장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야기를 듣던 인혜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도 당장 잡고 싶은데. 이미 그 일에 대해선 깔끔하게 다 뒷설거지까지 해서 잡을 길이 없어요.”

최 반장이 언짢은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김창수 사건에 하 변호사가 움직였다는 건 윤진영이 그 뒤에 있다는 거고, 또 심현보 사건과 관련된 파일을 김창수에게서 가져오라고 승한에게 윤진영이 시킨 걸 보면. 그 사건도 윤진영이 개입됐다는 건데. 결국 모든 사건의 정점은 윤진영이네요.”

인혜가 지금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렇죠. 결국 윤진영이 이 모든 사건의 열쇠예요.”

최 반장이 입안에서 오물거리던 사탕을 깨물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떻게 하든 모든 사건의 끝은 진영에게로 향했다.

“그럼 윤진영 기억 속에 다시 한번 들어가 봐요. 혹시 또 뭔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채린이 절박한 목소리로 최 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영의 추악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마음도 컸지만. 한편으론 혹시 진영을 통해 지은이 정말 숨기고 있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은과 얼굴을 맞대고 그녀의 진짜 진실에 대해 묻겠다 다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맘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그녀의 숨겨진 진실에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윤진영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워낙 몸을 사려서 접근할 방법이 없어. 요즘은 경호원까지 데리고 다닌다더라.”

최 반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시 유승한 기억 속에 들어가 볼까요?”

“지금 유승한 상태에선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저번에 교도소에서도 약물중독에 의한 금단현상하고 불안정한 정신 때문에 최면 걸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더 심해졌다고 하니. 기억의 변형이나 왜곡이 많아 정확한 기억을 확인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또 중간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서 다시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인 것 같아.”

또 다른 채린의 제안에 이번엔 인혜가 반대 의견을 내놨다.

뻔히 보이는 위험 속에 채린이를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유승한은 심현보 사건에 대해서는 진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기억 속에 다시 들어간다고 해도 별 소득도 없을 거야.”

성진이 인혜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채린이 답답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윤진영하고 심현보 사건 사이의 작은 힌트라도 하나 찾으면 될 것 같은데…… 진영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요?”

곰곰이 생각하던 성진이 갑자기 세 사람을 향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제일 많이 아는 건 역시 하 변호사지 않을까요?”

인혜가 먼저 만년필을 돌리며 대답했다.

“하긴. 워낙 수족처럼 진영의 일을 봐주니 하 변호사가 제일 많이 알겠네요.”

최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머니 속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윤진영 대신 하 변호사 기억 속에 한번 들어가 볼까요?”

“윤진영보다 하 변호사 기억 속에 들어가는 게 더 힘들걸? 워낙 조심성 있고 몸을 사리는 스타일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거야.”

성진의 말에 최 반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진영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요?”

다시 고민에 빠진 성진이 다리를 꼬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꼭 사람이어야 하나요?”

채린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게 윤진영을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채린이 손에 쥔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핸드폰이?”

성진을 비롯한 두 사람이 동시에 의아한 얼굴로 채린이를 바라봤다.

“메시지나 통화뿐만 아니라 검색 기록까지. 그리고 24시간 들고 다니니 어디로 이동했는지도 알 수 있고. 그동안 윤진영이 했던 모든 것이 다 이 핸드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요?”

채린이 세 사람을 바라보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이거 잃어버리면 끝이긴 하지.”

성진이 옆에 둔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윤진영의 기억 속에 못 들어가니까. 대신 윤진영의 핸드폰을 털어 보자?”

최 반장이 주머니 속에 있던 금연 사탕을 꺼내 다시 입에 밀어 넣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이제 거의 반형사가 다 된 채린이의 모습이 기특해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네.”

채린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은 방법 같은데요.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 같고요.”

인혜가 손 위에서 돌리던 만년필을 멈추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그러려면 윤진영의 폰을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을 해 봐야 하는데.”

하지만 해결책을 찾아도 항상 해답을 구하기까지의 방법이 문제였다.

“디지털 포렌식이 뭐예요?”

인혜가 낯선 단어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것들 저장 매체에 남아 있는 각종 정보를 분석해서 범죄 단서 찾는 방법인데요. 요즘 좀 많이 쓰이거든요. 누구나 핸드폰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니까요.”

최 반장을 대신해 성진이 인혜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그럼 그거 하면 모든 기록이 다 나오는 거예요?”

“네. 인터넷 검색 기록부터, 메시지, 통화 기록, 그동안 이동했던 GPS 위치에 다운받았던 파일까지. 한 1년 치 정도는 싹 다 나와요. 어떻게 보면 이게 완전히 들고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정 선생님도 핸드폰 간수 잘하세요.”

성진이 인혜 옆에 놓인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전 찔리는 거 없으니까. 김 형사님이나 조심하세요.”

그러자 인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성진의 농담을 되받아쳤다.

“어- 그 웃음의 의미는 뭐예요? 사람 이상하게 몰고 가시네.”

“제가 뭐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발끈하세요? 지금 그런 반응이 더 이상하거든요.”

“그런데 윤진영 핸드폰을 포렌식 한다고 해도, 그걸 지금 가져올 방법이 없는데.”

두 사람의 유치한 장난을 단칼에 자르며 다시 사건 이야기로 대화의 흐름을 바꾼 최 반장이 까슬까슬한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압수수색영장 신청할까요?”

성진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들썩였다.

“지금 압수수색을 걸 명분이 없잖아.”

최 반장이 손을 가로저었다.

“그럼 저번처럼 김 형사님이 소매치기 이용해서 빼내는 건 어떨까요?”

채린이 예전 김승범 잡을 때의 방법을 떠올렸다.

“매니저에 코디에 지금은 경호원들까지 같이 다닌다는데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인혜의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채린이 간절한 얼굴로 최 반장과 성진을 바라봤다.

그 순간.

“방법이 하나 있을 것 같긴 한데.”

성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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