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131화 (131/669)

인적 하나 없는 도로.

우- 아- 앙-

자동차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어둠 속 도로를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차선과 중앙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듯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위험한 흉기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광기 어린 살인자 같았다.

둠. 둠. 둠.

스피커를 찢을 것 같은 묵직한 비트가 차 안을 넘어 밖에까지 들렸다.

속도계 위 빠르게 올라가는 빨간색 바늘과 함께 동준의 심장도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와- 하-”

귀를 찢을 것 같은 음악에 휩싸여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카 레이싱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눈은 어느새 머리끝까지 차오른 취기로 초점을 잃었고.

터져 나오는 엔진 소리에 맞춰 요동치는 심장박동은 동준의 기분을 절정으로 밀어 올렸다.

그 순간.

끽- 익-

동준이 급하게 핸들을 꺾으며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고양이 한 마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우- 하- 하하, 하하하. 죽이네.”

온몸에 털이 서는 짜릿한 기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절정에 다다른 동준이 온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부술 듯 밟았다.

“오늘 한번 달려 볼까! 하-”

***

“아들, 어디야?”

오른쪽 뺨에 있던 핸드폰을 왼뺨으로 옮긴 순금이 가스 불을 끄며 말했다.

[“이제 정리하고 가고 있어요.”]

“정리 잘했어? 문 잘 잠그고? 가스 불 끄고?”

[“네. 네. 잘했습니다.”]

“그럼 올 때 맥주 한 병 사와. 오랜만에 아들이랑 한잔해야겠다.”

오랜만에 한껏 들뜬 순금이 배시시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여자의 몸으로 안 해 본 일 하나 없이 억척같이 살아온 이유는 단 하나.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금쪽같은 아들. 도영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고 지금 사서 가고 있어요.”]

“역시 우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다, 그지?”

[“안주 뭐 사갈까요?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 몇 개 있긴 한데.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냥 와. 엄마가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푹- 끓여 놨으니까. 캬- 내가 끓였지만 진짜 죽인다.”

순금이 숟가락으로 찌개 국물을 떠먹으며 탄성을 질렀다.

***

“안 그래도 엄마가 해 준 김치찌개 먹고 싶었는데. 역시 엄마 센스 짱.”

희미한 가로등 불을 길잡이 삼아 집으로 향하는 도영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가벼웠다.

[“엄마가 또 한 센스 하잖아.”]

“내가 꼭 금메달 따서 금방 호강시켜 드릴게요.”

도영이 구름을 허리에 두른 듯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엄마 호강시켜 주고 있으니까. 네 몸이나 잘 챙겨. 엄마는 너 다치는 게 더 싫어.”]

“엄마도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요즘 무릎도 안 좋잖아요.”

[“엄마 쌩쌩하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어디쯤이야?”]

서로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세상에 둘뿐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 어떤 모자 사이보다 더 깊고 끈끈했다.

“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한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횡단보도 앞에 선 도영이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차 조심하고.”]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한테 넌 항상 애기야. 아무튼 조심해서 와.”]

“네. 금방 갈게요.”

통화를 끊은 도영이 차 한 대 없는 횡단보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차 한 대 없는데. 맨날 차 조심하래.”

***

[“오빠 어디야? 왜 안 와?”]

“지금 가고 있어.”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짜증 가득한 여자 친구의 목소리에 동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오빠 혼자 또 드라이브하다 오는 거 아니지?”]

“가고 있다고. 끊어.”

[“오빠. 오빠.”]

띠릭.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동준이 핸들 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기다려라, 은지야. 오빠 오랜만에 좀 놀다 갈게.”

취기에 여자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을 지나쳐 어쩔 수 없이 들어선 도로였는데.

서울에 아직까지 이런 곳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는 고사하고 그 흔한 CCTV 하나 없는 도로의 모습은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완벽한 드라이브 코스 같았다.

우- 우- 웅.

창문을 열자 폭발하는 엔진 음과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동준의 얼굴을 스쳤다.

“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넘어 무아지경의 경지에 도달한 듯 동준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직선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계는 이미 130km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동준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이 차도. 자신의 인생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살짝 뜬 실눈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신호등의 초록색 불빛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동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호등을 노려보며 액셀러레이터를 부술 듯 밟았다.

***

“신호가 꽤 기네.”

도영이 횡단보도 앞 붉은 신호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 하나 다니지 않는 횡단보도. 마음 같아선 그냥 건너고 싶었지만.

큰 부탁은 못 들어드려도 차 조심하라는 작은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우- 우- 웅.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동네 시끄럽게 왜 저러고 다는 거야.”

도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어둠 속을 바라보던 그때.

“바뀌었다.”

초록빛으로 바뀌는 신호등에 도영이 반가운 얼굴로 횡단보도에 한 발을 내디뎠다.

하늘로 붕 뜬 도영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보름달 허리에 걸려 있던 구름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달을 집어삼켰다.

하늘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몸에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어둠. 나무. 도로. 낯선 불빛이 마치 슬로 비디오처럼 눈앞에서 돌아갔다.

그 순간.

어린 시절부터 조금 전 엄마와의 통화까지.

자신조차 잊고 있던 인생의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 마침표 찍듯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죽는 건가?’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감촉이 얼굴에 느껴졌다.

하지만 온몸의 감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삐-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마치 심장박동기의 그래프가 끊어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죽은 건가?’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눈앞에 보이는 건 검은 아스팔트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엄마…….’

자신을 바라보며 순박하게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건가?’

삶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가슴과 눈가에 차올랐다.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지고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검은 그림자에 시선을 옮겨 보려 했지만.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하- 씨.”

원망과 짜증 가득한 탄식이 귓가에 들렸다.

“아- 진짜! 아- 짜증 나!”

‘누구지?’

움직일 수 없는 시선 앞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는 두 발이 보였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또 소리쳤지만.

“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가늘게 흘러나오는 신음뿐이었다.

“아- 씨. 살아 있잖아.”

다시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잖아?’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용솟음쳤다.

그 순간.

두툼한 검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자신의 숨이 언제 끊어질지 확인하려는 죽음의 손길 같았다.

‘보고 싶다.’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떡해서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의 얼굴을 꼭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리지.’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졸음에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갔다.

‘버텨야 해. 버티자 유도영.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어.’

도영이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마지막 힘을 다해 잡고 있던 그때.

“뒤졌나?”

무덤덤한 동준의 얼굴이 도영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

어느 종합병원 수술실 앞.

“엄마!”

잠옷 차림에 신발도 짝짝이로 신은 성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왔다.

순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성진아. 우리 도영이 어떡하니. 우리 도영이 어떡해.”

혼자 수술실 앞을 사색이 된 얼굴로 지키던 순금이 성진을 보는 순간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엄마.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진이 혼절 직전의 순금을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히며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성진아- 우리 도영이. 우리 도영이 잘못되는 거 아니겠지? 나 너무 무서워.”

순금이 성진의 품에 안겨 짧은 시간이지만 수술실 앞에서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던 두려움과 슬픔을 그의 가슴에 쏟아 냈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다 잘될 거예요.”

성진이 떨리는 순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렇겠지? 진짜 그렇겠지?”

“그럼요. 그것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갑자기 교통사고라뇨.”

몇 시간 전까지 웃으면 인사했던 도영이 갑자기 수술대 위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집에 오는 길 횡단보도에서…… 다 내 잘못이야. 그냥 같이 왔어야 하는데. 아니, 내가 정리하고 왔어야 하는데…….”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입을 열던 순금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다시 오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잘못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가해자는요? 가해자는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

“성진아, 그게…….”

순금이 성진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던 그때.

“유도영 환자 보호자 되시죠?”

마스크를 벗으며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가 순금을 불렀다.

“네. 네. 접니다. 선, 선생님. 우리 도영이. 우리 도영이 수술은 어떻게 됐나요? 잘된 거죠? 그런 거죠?”

의사의 부름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간 순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워낙 다발성 장기 손상에 늦게 이송돼서 예후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죠? 그런 거죠?”

순금이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로 물었다.

“지금 상태에선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우리 도영이. 우리 도영이 좀 제발 살려 주세요. 꼭 부탁드릴게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의사의 손을 덥석 잡은 순금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가 가볍게 순금의 손을 놓으며 수술실 앞을 빠져나가자.

“하-”

깊은 탄식을 내뱉은 순금이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수술 잘 끝났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영이 금방 털고 일어날 거예요.”

성진이 다시 순금을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히며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지금 가해자는 어디 경찰서에 있어요?”

일단 위급한 상황은 넘겼다는 걸 확인한 성진이 이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직접 알아보기 위해 핸드폰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순금에게 물었다.

“그게…… 어디 있는지 몰라.”

순금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굵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모르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성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뺑소니래.”

***

어느 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지금 도대체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3시야. 새벽 3시라고.”

현관문을 연 은지가 동준을 보자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쏟아 냈다.

“물 좀 줘.”

하지만 동준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곧장 소파로 걸어가 털썩 몸을 던졌다.

“도대체 뭐 하다 이제 온 거야? 그리고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무슨 일 있었어?”

심상치 않은 동준의 분위기에 살짝 화를 죽인 은지가 그 뒤를 따르며 쫑알쫑알 물었다.

“물. 물 좀 달라고.”

“알았어. 잠깐만.”

잔뜩 인상을 구기며 화를 내는 동준의 모습에 은지가 눈치를 보며 소파 옆에 있는 작은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건넸다.

“하-”

물 한 병을 단숨에 비운 동준이 지치고 심란한 얼굴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누가 우리 오빠를 이렇게 화나게 했어? 또 감독이 뭐라고 그랬어? 내가 대신 혼내 줄까?”

은지가 동준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손을 조몰락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술 있지? 술 좀 가져와.”

하지만 동준은 대답 대신 은지의 손을 뿌리치며 여전히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술 없어. 어제 집에서 촬영 있어서 다 치웠어. 알잖아. 나 술 한잔 못 먹는 순수한 이미지로 기획사에서 미는 거.”

요즘 청순 아이돌로 주가를 올리는 은지는 동준과 3개월째 비밀 연애 중이었다.

“그럼 가서 술 좀 사 와.”

“내가 어떻게 술을 사 와. 오빠, 나 아이돌이야.”

“마스크를 쓰고 가든 가면을 쓰고 가든. 가서 좀 사 오라면 사 와!”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설마 그때 진수 오빠가 친 사고 때문에 그래? 왜? 그 오빠가 오빠 차라고 걸고넘어져?”

얼마 전 진수에게 떠넘긴 교통사고의 내막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은지였다.

사고가 있은 직후 사고 처리가 끝날 때까지 수풀에 숨어 있다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걸 확인한 동준은 한참 동안 수풀 사이를 걸어 큰 도로까지 내려와 계획한 대로 은지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을 데리러 온 은지에게 자신의 차는 진수가 대신 가지고 가고 자긴 술을 먹고 택시를 탔다 실수로 이상한 곳에 내렸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그날의 일을 자연스럽게 묻어 버렸다.

“그 얘기가 왜 나와. 그건 다 끝났어.”

동준이 단호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이렇게 화가 났어? 그리고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은지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동준의 이마를 티슈로 닦아 주며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니까. 가서 제발 술 좀 사 오라고. 넌 왜 항상 한 번 말하면 듣지 않니.”

“오빠! 내가 후배 대하듯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

은지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동준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칭얼거렸다.

“은지야. 부탁이니까. 제발 가서 술 좀 사 와. 오빠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아. 알았어.”

괴로운 듯 머리를 헝클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동준의 표정에 살짝 겁먹은 은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하- 씨.”

동준이 소파에 머리를 기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감았다 놀라 다시 벌떡 일어났다.

“젠장.”

조금 전 온 얼굴에 피를 흘리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빠. 뭐로 사 올까? 맥주? 소주? 아님 와인?”

마스크에 모자, 거기다 후드까지 뒤집어쓴 은지가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

“그냥 아무거나 사 와.”

“알았어. 오빠 차 거기다 세워 놨지? 키 좀 줘.”

아무리 늦은 밤이지만 가끔씩 눈에 불을 켜고 집 앞을 지키는 사생팬들 때문에 몰래 이동할 땐 항상 동준의 차를 이용했다.

“없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차 가지고 온 거 아니야?”

“……어.”

잠시 머뭇거리던 동준이 서늘한 눈빛으로 은지를 바라봤다.

***

경찰서.

“뺑소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무실 문을 연 최 반장이 출근 인사 대신 대뜸 어제의 일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성진은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도영 씨는 좀 괜찮아?”

최 반장이 책상 의자에 낡은 점퍼를 걸며 다시 물었다.

“후- 네. 아직까지는요.”

성진이 스페이스 바로 보던 영상을 멈추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최 반장이 축 처진 성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친동생처럼 여기던 도영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으니. 지금 성진의 마음이 어떤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건 현장 들렀다 오시는 거예요?”

성진이 뻐근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일단은 방화 같은데. 자동차가 다섯 대에 그 옆에 있던 관리소까지 불이 번져서 어젯밤에 난리도 아니었나 봐.”

어젯밤 공영 주차장에서 일어난 차량 화재 사건 때문에 출근길에 현장에 들렀다 온 최 반장이었다.

“아침부터 고생하셨습니다.”

“이게 도영 씨 사고 현장 CCTV야?”

최 반장이 성진이 보던 모니터 앞으로 의자를 옮기며 물었다.

“없어요.”

성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괴로운 얼굴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없다니.”

뜬금없는 대답에 최 반장이 되물었다.

“사건 현장 CCTV가 없어요.”

“요즘 CCTV 없는 곳이 어디 있어.”

금연 사탕을 까던 최 반장이 멈칫하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동네가 지금 재개발 예정지라 도로 재정비 사업 한다고 저번 주에 CCTV를 다 철수했대요. 하- 진짜, 씨.”

CCTV 없이 뺑소니범을 찾겠다는 건 두 눈 가리고 범인 찾겠다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 지금 보는 건 뭐야?”

“사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주변 도로 CCTV요.”

“여기선 좀 나왔어?”

어떻게든 작은 단서라도 찾고 싶은 최 반장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나오긴 나왔는데…….”

다시 힘없이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던 성진이 절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용의 차량이 몇 대야?”

“700대요.”

“700대?”

최 반장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사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말고도 세 도로가 연결된 입구에 설치된 CCTV라 어떤 차량이 용의 차량인지 특정이 안 돼요.”

“그래도 번호판이나 차종은 확인 가능하지?”

최 반장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어렴풋한 형체하고 헤드라이트 불빛밖에 안 보여요. 하- 진짜 어떻게 사고가 나도 이런 곳에서.”

성진이 답답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요. 700대 다 뒤져야죠.”

슬며시 고개를 든 성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시 모니터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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