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EPISODE. 2
“생존권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일방적인 공사강행 반대한다. 반대한다.”
“반대한다! 반대한다!”
화평시(市) 시청 앞. 머리에 띠를 두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연신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질서유지를 위해 몇 명의 경찰들이 그 들 주위에 서 있을 뿐.
정작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할 사람들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지쳐갈 때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니 여길 어떻게.”
앞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선창하던 시위대 대표가 확성기를 내리고 반색하며 한걸음에 자신들에게 걸어오는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제가 여러분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빛나는 하얀 치아만큼 남자의 양복 깃에 달린 배지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의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국민성 의원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러 오셨습니다.”
“와-”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민성의 등장에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다.
“여러분 제 이름 ‘국민성’의 성 자가 소리 성(聲) 자입니다.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겠다.’ 그래서 제 이름이 국민성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의 목소리를 시장에게 똑똑히 전하겠습니다.”
확성기를 건네받은 민성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와-”
민성과 함께 온 기자와 방송국 카메라가 사람들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았다.
“역시 의원님께서 와주시니 이렇게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다 나오네요. 그동안 정말 벽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시위자 대표가 민성의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제가 진작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와 죄송합니다.”
민성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가슴팍에 꽂은 행커치프를 꺼내 남자의 눈물을 닦아줬다.
“의원님. 잠시 여기 계신 분과 함께 인터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생방송 연결인데 괜찮으신가요?”
그때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가 민성 앞으로 다가왔다.
“네.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박 보좌관 나 물 좀.”
“여기 있습니다.”
민성의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깔끔한 양복차림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물병을 건넸다.
정책 조언부터 지역구관리 그리고 의원실 살림까지 모든 것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는 민성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수석보좌관인 박진호였다.
“자- 시작하시죠.”
가볍게 물로 입안을 적신 민성이 인자한 얼굴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
경찰서 사무실.
“여기 주방장 바뀌었어?”
“어! 그거 어떻게 아세요?”
짬뽕을 먹던 성진이 놀란 얼굴로 왼쪽을 바라봤다.
“국물만 딱 먹어봐도 알지.”
“여기 탕수육도 별로인데요.”
“맛없어요? 난 괜찮은데.”
성진의 고개가 이번엔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다음부터는 다른 데서 시켜. 얼마 전에 생긴 중국성이 맛있대.”
“저도 거기 맛있다고 들었는데. 도 팀장님 음식 드실 줄 아시네요.”
주철이 짬뽕 그릇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둘은 왜 여기서 먹는 거예요?”
짜장면 그릇 위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최 반장이 어이없는 눈으로 나연과 주철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죠.”
나연이 단무지를 입에 넣으며 씩 웃었다.
“나도 맨날 시체만 만지니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그런지 여기만 오면 밥맛이 좋네요. 하하하하. 도 팀장님 내일은 콩국수 어때요?”
주철이 맞장구를 치며 넉살 좋게 웃었다.
“콩국수 좋은데요. 콩국수는 또 할매 식당이 맛있는데. 윤 법의관님 그럼 내일 1시에 여기서 봬요.”
“여기가 무슨 사랑방이에요.”
성진이 최 반장의 눈치를 보며 주철과 나연을 향해 그만하라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후- 요즘 두 분 다 안 바빠요?”
최 반장이 포기했다는 얼굴로 금연 사탕을 입에 밀어 넣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한동준 사건으로 다친 그 피해자분은 좀 괜찮아요?”
주철이 서비스로 온 박하사탕을 오물거리며 슬쩍 대화 주제를 바꿨다.
“많이 좋아져서 지금 재활 중이에요. 빨리 재활 끝내서 내년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딴다고 난리에요.”
도영의 이야기만으로도 성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네. 한동준 사건은 진짜 김 형사가 집요하게 파지 않았으면 해결 못 했을 거야.”
주철이 성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칭찬했다.
“한동준 완전 사이코였다면서. 무슨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것도 있어서 깨진 헤드라이트 조각도 나무 주위에 가지런히 뿌리고 막 그랬다는데.”
나연이 다리를 꼬며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운동선수들 중에 징크스를 넘어서는 그렇게 편집증적인 사람들이 좀 있대요. 그래도 잘 해결돼서 다행이죠 뭐.”
성진이 후련한 얼굴로 TV리모컨을 들며 환하게 웃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편익을 위한다는 이유로 일부의 희생을 당연시 여긴다? 이거야말로 이기주의고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국민성이네.”
TV를 보던 주철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요즘 저 사람 TV에 많이 나오네요.”
믹스 커피를 타온 성진이 어느새 세 사람에게 커피를 돌리며 말했다.
“오 땡큐. 차기 희망당 원내대표잖아. 언론에서도 주목하는 게 당연하지.”
최 반장이 커피를 받아 후후 불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 소탈하고 열심히는 하는 것 같긴 한데…….”
“사람은 모른다는 소리를 하고 싶으신 거죠?”
도연의 머뭇거림의 의미를 성진이 대신 이야기했다.
“원래 이 바닥 쪽 일 하면 다 그런 생각가지고 살잖아. 다 까봐야 안다고.”
주철이 히죽 웃으며 종이컵을 입에 가져갔다.
“하긴 그렇긴 하죠.”
성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화면 속 민성을 바라봤다.
***
“생방송인데 잘 하시네요.”
카메라 뒤에서 민성의 인터뷰를 보던 PD가 옆에 있는 진호에게 속삭였다.
“저희 의원님께서 원래 라이브에 강하셔서요. 다음 주 저희 일정인데 시간 되시면 다시 한번 와주시죠.”
진호가 양복 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PD에게 건넸다.
“네.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살짝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PD가 봉투를 점퍼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의원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PD가 기자와 카메라맨에게 그만 가자고 손짓하며 민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도 이분들에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민성이 시위대를 가리키며 고개를 숙이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감격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국회의원.
드라마에서나 보던 국회의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민성이 이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을 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만 가죠.”
민성과 눈을 맞춘 PD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여러분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만 해산하시죠. 여러분들의 억울한 마음과 소중한 의견은 제가 지금 당장 시장을 만나 전하겠습니다.”
민성이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국민성. 국민성. 국민성”
사람들 사이에서 민성을 외치는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
“조 시장 잘 지냈지?”
“아이고 의원님.”
시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성을 보자 책상 위에 놓인 [화평시 시장 조상규]라는 명패가 떨어질 정도로 시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호들갑은 여전하네.”
민성이 자연스럽게 소파 상석에 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잘 처리했어야 하는데. 저 사람들이 의외로 독종이라.”
조 시장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역구 일인데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민성이 다리를 꼬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정치가 처음이라 그런 건데 뭐. 다 이해해.”
“그래도 신경 쓰지 않게 해드려야 하는데.”
시장이라는 직책이 무색하게 민성에게 바짝 엎드린 조 시장을, 문 쪽에 서 있는 진호가 벌레 보듯 바라봤다.
“자네가 전임 시장들보단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눈치 하나는 최고잖아. 이렇게 고개도 잘 숙이고 말이야. 하하하하.”
민성이 거들먹거리며 시장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표면적으로 화평시의 시장은 조 시장이었지만.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내리 3선을 한 그의 한마디가 화평시의 시장을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화평시의 진짜 주인은 국민성이었다.
“하- 네.”
조 시장이 씁쓸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게 놔둘 거야?”
미소 짓던 민성이 창밖에 보이는 시위대를 바라보며 순간 눈가를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일이라도 경찰을 동원해서 불법시위로 싹 다 잡아 처넣겠습니다.”
“이봐. 이봐. 이래서 조 시장이 아직 정치에서 하수라는 거야.”
민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꼬리를 내렸다.
“네?”
“내일 시위대 대표 시장실로 불러서 일주일 뒤에 공청회 한다고 발표해. 기자들은 내가 불러줄 테니까.”
“네? 왜 일을 키우려고 하십니까?”
“이 사람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게 정말 뭔지 몰라?”
“원하는 거요?”
“들어주는 거야. 들어주는 거.”
“시위대가 요구하는 조건 못 들어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 시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답답한 사람아. 저 사람들도 어차피 자기들 주장이 먹히지 않을 거란 걸 다 알아. 그런데 왜 저러겠어? 이제 와서 포기할 명분이 없는 거야. 명분이.”
민성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명분이요?”
“생각해봐. 저기 앉아서 띠 두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몇이나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서 시위할 것 같아? 저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민성이 아직도 시청 앞에 남아있는 시위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
“다- 하기 싫어해. 심지어 저 맨 앞에 서 있는 소각장 반대 위원장도 그만두고 싶을걸?”
민성이 창가에 있는 난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
조 시장이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공청회해서 저 사람들 하고 싶은 말 다 하게 둔 다음에. 시위 주도하는 윗대가리들 몇 명 따로 불러서 대충 입에 맞는 사탕 입에 물려주면 끝이야.”
“입에 맞는 사탕이라면…….”
“이 사람. 내가 다 떠먹여 줘야 해? 그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돈을 쥐여주든. 자식 놈들을 어디 자리에 꽂아주든. 앞으로 입도 뻥긋 못하게 입에 사탕을 물리란 말이야. 사탕을.”
민성이 답답한 얼굴로 소파의 팔걸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 생기지 않게 똑바로 처리하고. 아니야. 박 보좌관이 좀 도와줘. 조 시장 불안해서 안 되겠어.”
“네.”
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감사는 무슨. 소각장 건설 입찰은 다음 주지?”
민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에 있는 시장명패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개의 머리를 쓰다듬듯.
“일단 세 군데 회사가 입찰을 했습니다.”
“화평시에 중요한 공사니까 공정하고 꼼꼼히 다 따져보고 선정해.”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조 시장이 어련히 잘 하겠지. 아 참 그리고 나 새 명함이 하나 나왔는데. 아직 못 받았지?”
“명함이요? 네. 아직.”
“그럼 한 장 받아.”
민성이 갑자기 뜬금없이 조 시장에게 명함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이건…….”
명함을 받아 든 조 시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민성이 건넨 명함엔 [국민건설 대표 국민한] 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아이구. 내가 실수로 동생 명함을 줬네.”
“아닙니다.”
지금 민성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 이게 내 새 명함이야.”
민성이 전과 똑같은 명함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아- 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역시 우리 조 시장 눈치 하나는 발군이야.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민성이 조 시장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의원님 약속 시간에 맞추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듯 진호가 시장실 문을 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만 가지. 그럼 수고해 조 시장.”
민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장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