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154화 (154/669)

#154.

식사를 마치고 들른 카페.

“아까 그 식당 괜찮지?”

인혜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네. 맛있는데요.”

요즘 들어 꽤 자주 인혜와 식사를 하는 채린이었다.

그만큼 편해졌다는 걸까?

아무튼 하나 확실한 건 예전보다는 인혜를 대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거였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마치 하나의 미션을 성공했다는 듯 인혜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안 바쁘세요?”

“바빠도 너랑 밥 먹을 시간은 있어.”

인혜가 앞에 놓인 케이크의 한 귀퉁이를 포크로 뜨며 말했다.

“그래도 저를 만날 게 아니라 데이트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는 넌 데이트 안 해?”

“데이트는 혼자 하나요.”

20살이 되면 가슴 뜨거운 사랑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거였다.

“승현이 있잖아.”

인혜가 눈을 찡긋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채린이가 고개를 저으며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놨다.

“그런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친구사이요.”

“친구가 다 애인되고 그러는 거 아닌가?”

인혜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정 선생님은 김 형사님 만나보세요.”

“채린아~”

인혜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막 엮지 마세요.”

채린이 피식 웃으며 피치 빛 입술로 커피 잔을 가져갔다.

“참 이젠 너랑 이런 이야기도 하고…….”

살짝 내려갔던 인혜의 눈꼬리가 다시 살짝 들떴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요.”

“이렇게 농담도 하고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친밀해졌다는 거잖아.”

오랜 시간 봤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채린이를 위해.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린 인혜였다.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 전 항상 똑같은데.”

채린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커피잔으로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가렷다.

“요즘도 가끔 머리 아프거나 그래?”

인혜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윤진영 사건 이후 채린이의 능력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잠시 중단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 채린이의 상태를 체크하는 건 필수였다.

“아니요. 요즘은 그런 거 없어요.”

“어디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이상한 점 있으면 바로 말해. 알았지?”

인혜가 신신당부했다.

“불편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요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채린이 눈을 반짝였다.

“어떤 게?”

“지금까지는 보통 벽 하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로 기억 속에 들어갔잖아요.”

“대부분 그랬지. 그게 왜?”

인혜의 호기심에도 스위치가 올라갔다.

“과연 얼마나 떨어져서도 기억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채린이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음- 그러게.”

항상 최면이라는 것이 한정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었기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떨어져서도 가능할까요?”

“저번에 윤진영 사건 해결하면서 그 웨이터 기억 속에 들어갈 때는 꽤 떨어져서 하지 않았나? 그거 있잖아. 내가 전화로 보이스피싱처럼 해서 최면 건 거.”

인혜가 팔짱을 끼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선생님이 전화로 최면을 걸어서 꽤 멀리 떨어져서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김 형사님하고 저는 그 사람이 앉은 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가 들어간 거라. 평소 옆방에서 했던 거랑 별 차이는 없었어요.”

“생각해보니까 또 그러네.”

확실히 한번 연구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중에 한번 시간 내서 알아볼까요? 앞으로 사건을 해결하면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데. 미리 알아두면 좋잖아요.”

채린이 꽤 의욕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난 너만 괜찮으면 언제든지 OK야.”

“그럼 조만간 최 반장님하고 김 형사님께 말씀드려서 한번 실험해봐요.”

“그래. 그럼 난 일단 어떻게 실험해야 할지 준비해볼게.”

“네. 그럼 부탁드려요.”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 너 원래 이런 실험이나 연구하는 거 불편해했잖아.”

평소와 다르게 의욕 넘치는 채린이의 모습이 살짝 당황스러운 인혜였다.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채린이 순간 슬픔이 번진 얼굴로 찻잔을 꽉 잡았다.

***

민성의 의원 사무실.

“새끼들. 별것도 아닌 게.”

머리는 산발에 셔츠는 다 풀어헤쳐 진 민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의원님 역시 카리스마. 정말 오늘 활약 대단하셨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보좌관들이 민성을 향해 박수와 찬사를 쏟아냈다.

“그래? 카리스마 있게 화면에 나왔어?”

보좌관이 건네는 물을 벌컥 들이켠 민성이 잔뜩 들뜬 얼굴로 물었다.

“네. 아주 멋지셨습니다. 저거 보십시오. 요즘 언론에서도 야당의 실세라며 매일 헤드라인 잡아서 방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보좌관이 의원실 벽에 걸린 TV 화면 속 뉴스 프로그램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어. 하하하하하.”

민성이 뉴스 화면 속 의원들 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터로 변하는 국회에서.

민성은 마치 전장의 장수처럼 가장 선두에서 모든 현안에 목소리를 높이고, 몸싸움까지 불사하며 언론에 자신의 주가를 톡톡히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의원들을 잘 뚫으십니까?”

민성이 앞장서기만 하면 결렬하게 저항하며 앞을 막던 의원들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뭐니 뭐니 해도. 이거지. 이거.”

양 엄지를 치켜드는 민성의 자부심 넘치는 표정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엄지요?”

“카메라 안 보일 때 밑에서 상대방 옆구리나 갈비뼈 아래쪽을 사정없이 찌르면 그냥 다 나가떨어지거든.”

“아-.”

“이것도 나처럼 3선은 해야지 쓸 수 있는 고급기술이라고. 하하하하.”

의원 배지를 12년이나 가슴에 달아놓고 그동안 국회에서 배운 게 고작 저딴 거라니.

다른 보좌관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현일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십니다. 의원님.”

“역시 엄지 척 이십니다.”

하지만 다른 보좌관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박수를 치며 민성을 치켜세웠다.

“엄지 척? 그거 좋네. 하하하하.”

큰 사무실 안이 민성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던 그때.

“의원님 아까 새소망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정기 후원에 대해 의논드릴게 있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보좌관이 메모된 종이를 민성에게 건넸다.

“새소망에서?”

호탕하게 웃던 민성이 새소망 요양원이라는 말에 거짓말처럼 인상을 구겼다.

“네.”

“알았어. 그런데 박 보좌관은 어디 갔어?”

민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바쁜 시기에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민성이 있는 대로 짜증을 내던 그때.

“의원님 전화입니다.”

보좌관 하나가 의원실 책상에 있던 민성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나왔다.

“누구……아이 씨.”

핸드폰 화면에 뜬 [송 사장]이라는 이름에 민성이 눈가를 찡그리며 의원실로 들어갔다.

***

“내가 전화하지 말랬지.”

누가 들을까 의원실 문을 꼭 닫고 의자에 앉은 민성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아침부터 박태준이라는 놈이 사무실을 뒤집고 갔습니다.”]

“박태준? 박태준 검사?”

민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그 새끼가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짜고짜 아침부터 와서는 저를 만나러 왔다고 했답니다.”]

“설마 만난 건 아니지?”

[“네. 건물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올라가려는데 애들이 먼저 알려줘서 바로 피했습니다.”]

“압수수색 영장 가지고 온 거야?”

민성이 초조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아닌데. 분명 뭔가 알고 있다는 듯 계속 재개발과 의원님 이야기를 애들한테 물었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일단 애들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딱 잡아뗐답니다.”]

“이 새끼가 무슨 냄새를 맡아서.”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힘껏 구기는 민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그냥 평소처럼 똑같이 해. 애들 입조심시키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저희 애들보다 의원님 쪽 사람들 단속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빈정거리는 송 사장의 목소리가 민성의 성질을 긁었다.

“건방진 소리 지껄이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쾅-

거칠게 전화를 끊은 민성이 씩씩거리며 사무실 문을 부서질 듯 열어젖혔다.

“박진호 어디 있어! 박진호 어디 있냐고!”

“부르셨습니까?”

마침 의원실로 들어오던 진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박 보좌관 빼고 다 나가!”

민성이 보좌관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민성의 목소리에 현일을 포함한 보좌관들이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곽 비서도 남아.”

“……네.”

현일이 움찔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세 사람만 남은 사무실.

눈에 핏발이 선 민성이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노려봤다.

‘눈치챈 건가?’

현일의 등이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진호는 당황한 얼굴 하나 없이 당당한 표정으로 민성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왜 저렇게 당당해.’

현일이 이상하리만큼 기가 산 진호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그때.

“누구야.”

민성이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를 말씀이십니까?”

진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검찰에 흘린 게 누구야?”

민성이 이를 바득 갈며 다시 물었다.

‘진짜 벌써 시작한 건가?’

민성의 반응을 보면 자기가 일을 시작한 걸 알 수 있을 거라는 태준의 말이 떠올라 현일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검찰이라뇨?”

호기롭던 진호의 얼굴에 당황함이 번졌다.

“오늘 아침에 박태준이 송 사장 사무실에 갔다잖아!”

“박태준 검사가요? 최 부장이 잘 처리했다고 했는데.”

진호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잘 처리했는데. 박태준이 왜 뒤를 캐냐고!”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둘 중에 누구야.”

민성이 핏대를 올리며 둘을 죽일 듯 노려봤다.

송 사장과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진호가 어이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내가 여기서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아는 건 너희 둘뿐이고. 너희 둘 나한테 감정 많잖아. 왜? 검찰 놈들이 나 찌르면 공익제보로 한 몫 두둑이 챙겨준대?”

민성이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의원님. 제가 저까지 같이 죽을 짓을 뭐 하러 하겠습니까.”

“의원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의원님께.”

진호와 현일이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똑. 똑.

“뭐야.”

밖에서 들리는 노크소리에 민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의. 의원님. 지금 대표님께서 잠깐 뵙자고 하십니다.”

그러자 잔뜩 겁에 질린 보좌관 하나가 문을 열며 말했다.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부르는 거야. 씨. 지켜보겠어. 누가 내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하는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민성이 둘에 대한 의심은 잠시 묻어둔 채 살기등등한 얼굴로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거칠게 진호를 밀치며 밖으로 나가자.

“일들 봐.”

진호가 벗어놓은 민성의 재킷을 챙겨 그 뒤를 따르며 숨죽인 채 복도에 쪼르르 서 있는 다른 보좌관들을 향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저게 왜 저렇게 기가 살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일이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국회 의원회관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뒤에 선 민성이 문 앞에 선 진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민성의 마음에 한번 뿌려진 의심의 씨앗은 무섭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진호도 모를 리 없었다.

“의원님.”

숨 막힐 듯한 적막을 뚫고 진호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민성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의원님 보물찾기해보셨습니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뜬금없는 진호의 말에 민성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어렸을 적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참 잘했는데 말입니다.”

“헛소리할 거면 집어치워.”

민성이 짜증을 내며 진호의 말을 막았다.

“마지막까지 남들이 못 찾는 걸 제가 항상 찾아서 선물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진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시끄럽다고!”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또 보물 하나를 찾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끄럽다는 소리…….”

순간 민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금고 말입니다. 제가 어디인지 찾았거든요.”

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당황한 민성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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