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의원님 퇴원을 축하드립니다.”
민성이 의원실로 들어오자 보좌진들이 꽃다발과 함께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보니 좋군.”
꽃다발을 받아든 민성이 환하게 웃으며 보좌진들을 바라봤다.
“정말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장수하려고 액땜했나 보지.”
민성이 받은 꽃다발을 다시 한 보좌진에게 건네며 히죽 웃었다.
“맞습니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네. 저 그런데…….”
“왜?”
“저 두 책상은 어떻게 할까요?”
보좌진이 텅 빈 진호와 현일의 책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치워야지.”
민성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박 보좌관님 책상은 대충 정리해서 유족분들께 전해드리기는 했는데. 곽 비서님 짐은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
“곽 비서는 무슨. 그냥 딸한테 보내. 애비가 그렇게 됐는데 한국 왔을 거 아니야.”
인상을 구긴 민성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게 아직 비행기 표를 못 구해서 미국에서 못 온 것 같습니다.”
한 보좌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왜?”
“돈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터져서 돈 보낼 사람이 없으니까요.”
“친척도 없어?”
“제가 알기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돈도 없는데 유학은 뭐 하러 보내냐고. 하여튼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살려고 하지. 사람이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 쯧쯧쯧.”
민성이 혀를 차며 눈가를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요?”
“다 버려버려. 뭐 중요한 것도 없을 텐데.”
현일의 자리로 걸어간 민성이 책상 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막 버려도 될까요? 개인적인 물건도 있을 텐데요. 그냥 따로 보관했다 나중에 딸 한국 들어오면 전달할까요?”
“어차피 이제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텐데. 이딴 게 뭐가 필요 있어. 다 버려버려.”
민성이 책상 위 연필꽂이에 꽂힌 [사랑하는 아빠꺼♥] 라는 네임스티커가 붙은 펜을 들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그리고 바로 수행비서 채용공고 내고. 박 보좌관 자리는 적당한 사람 찾을 때까지 당분간 공석으로 둘 테니까. 업무는 적당히 나눠서 백업하는 걸로 하고. 그리고 저 둘 책상은 재수 없으니까 오늘 안으로 당장 치워버려.”
“네.”
진호에 대한 짧은 애도의 한마디도 없이 바로 일상으로 돌아온 민성의 모습에 보좌진들이 무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다들 마음이 복잡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 잘 다잡아서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보자고. 우리가 여기서 슬퍼하기만 하는 건 죽은 박 보좌관도 원하는 게 아닐 거야. 박 보좌관이 꿈꾸던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가자고.”
그러자 그런 표정을 읽은 민성이 다시 인자한 모습으로 보좌진들을 위로하며 선거유세 하듯 그럴싸한 말들을 쏟아냈다.
“네.”
민성의 말에 보좌진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동안 다들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나 빼고 자네들끼리 거하게 회식이나 해.”
민성이 한 보좌관에게 카드를 건네며 빙그레 웃었다.
“같이 가시죠.”
“난 이따 약속이 있어서. 그리고 나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야. 하하하 자네들끼리 재밌게 놀아.”
민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오늘도 다 잊고 다시 파이팅 하자고. 파이팅!”
“파이팅!”
이런 상황에서 파이팅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보좌진들이 마지못해 같이 구호를 외쳤다.
“좋아. 하하하. 그럼 다들 일들 봐.”
민성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뭔가 후련한 얼굴로 의원실로 들어갔다.
***
최 부장의 사무실.
“부장님!”
“안 돼!”
민성의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태준과 멈추라는 최 부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렇게 증거가 충분한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태준이 현일이 건넨 수첩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증거가 뭐가 충분해. 국민성 의원을 해하겠다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가짜로 스케줄에 적어놓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러자 최 부장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국민성 의원의 모든 스케줄이 날짜, 요일, 시간까지 하나도 틀린 것 없이 꼼꼼히 적어놓은 사람이. 이런 걸 틀리게 적어놓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태준이 현일의 수첩에 적힌 공식적인 민성의 스케줄과 실제 스케줄을 비교해본 결과.
마치 프린트 찍듯 완벽히 일치하는 모습에.
뇌물을 주러 만났던 비밀 모임 스케줄도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 판단했다.
“거기에 적어놓은 돈 줬다는 사람들 중에 스케줄 안 맞는 사람도 있다며.”
하지만 최 부장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듯.
태준이 어떤 주장을 해도 반대만 하기 바빴다.
“그건 당연히 돈 준 놈들하고는 벌써 입을 맞춰서 그런 거죠. 설마 그놈들 말을 정말 믿으시는 겁니까? 왜 이렇게 몸을 사리십니까!”
태준이 수첩을 흔들며 소리쳤다.
“뭐? 몸을 사려? 이게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싸가지를 말아먹었나. 그리고 건방지게 어디서 소릴 질러!”
최 부장이 책상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그냥 덮으실 겁니까?”
하지만 태준은 물러서지 않고 더 목소리를 높였다.
“덮긴 뭘 덮어.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거잖아.”
최 부장이 다시 책상을 내리치며 핏대를 올렸다.
“그럼 그때가 언제입니까? 국민성 의원이 허락한 때 말입니다.”
“야! 박태준!”
“부장님. 부장님도 위에서 찍어 눌러서 힘드신 거 다 압니다. 그러니까 제가 총대 메고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냥 제가 하는 일 못 본 척만 해주십시오.”
일개 평검사가 부장검사에게 대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최 부장 위에 누가 있는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더 이상 말 잘 듣는 착안 아이가 될 수는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좀 봐. 지금 국민성 의원은 테러 희생자에 자기가 아끼는 보좌관까지 잃은 비운의 정치가야. 넌 뉴스도 안 보냐? 사람들이 지금 국민성 의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최 부장이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타이르듯 태준에게 말했다.
“…….”
사실 최 부장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민성에게 쏠린 언론과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노트를 증거랍시고 들이밀면서 국민성을 뇌물수수로 잡아넣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과연 뭐라고 그러겠냐? 엄한 사람 잡는다고 우리만 죽는 거야. 알아?”
“물론 그건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습니까. 그럼 모든 사건을 사람들의 눈치를 봐가며 처리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준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눈치를 보래? 지금 타이밍이 안 좋다는 거잖아. 그리고 지금 국회 회기 중인 거 몰라? 어차피 못 잡아. 불체포특권 몰라?”
괜히 방탄국회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현행범이 아닌 이상 민성을 체포할 명분도 방법도 없었다.
“지금 못 잡더라도 그물은 쳐놔야지 고기가 잡히는 거 아닙니까.”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야! 그물도 던질 때가 있는 거라고!”
최 부장이 다시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부장님!”
“그리고 내가 저번에 경고했지. 들쑤시지 말라고. 아무튼 국민성 뇌물수수 사건은 올 스톱하고. 이번 국민성 보좌관 살인사건이나 경찰에서 넘어오면 빨리 처리해서 끝내.”
최 부장이 더 이상 이야기할게 없다는 듯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후-”
꽉 막힌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답답함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았으면 그만 나가봐.”
“……네.”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하다 생각한 태준이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쾅.
부장실의 문을 닫고 나온 태준이 안경 너머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물 던지는데 때가 어디 있어. 잡을 때까지 던지는 거지.”
***
할매 식당.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는 채린의 말에.
바쁜 시간을 쪼갠 둘이 오랜만에 채린이와 늦은 점심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채린이 물컵을 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
고개를 숙이고 입안으로 국수를 밀어 넣던 최 반장이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물었다.
“곽현일 씨 그분이요.”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최 반장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제가 일하는 편의점 단골이셨어요.”
“진짜? 그 사람 어땠어?”
성진이 입안을 오물거리며 흥미롭단 얼굴로 물었다.
“그냥 점잖고 성실하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채린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뭔가 좀…….”
“왜? 뭐가 좀 달라?”
묘한 채린이의 표정에 최 반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그래서.”
“사실 나도 뭔가 좀 그렇긴 해.”
성진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의외의 반응에 채린이가 의자를 끌어당겼다.
“아니 그냥 뭔가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춰 끝내려는 느낌? 지금 검찰에서도 빨리 수사 끝내고 사건 올리라고 엄청 재촉하거든.”
모든 증거가 현일을 향하는. 이미 답이 정해진 사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장님도 그렇게 느끼세요?”
“음- 국민성이 좀 묘한 것 같긴 한데…….”
채린의 말에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제가 좀 알아볼까요?”
채린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번엔 쉽지 않아.”
“왜요?”
“일단 국민성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건 만나기도 힘드니까 거의 불가능하고. 곽현일 씨도 조사할 때 외에는 접근이 철저히 금지돼서 힘들어.”
성진이 입꼬리를 내리며 최 반장의 대답에 부연설명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두 분 언제 시간 좀 괜찮으세요? 뭐 좀 확인할게 있어서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채린이 자연스럽게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를 꺼냈다.
“확인? 뭘?”
성진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채린이를 바라봤다.
“정 선생님하고 같이 확인해볼 게 있는데. 두 분 아니면 불가능한 거라서요.”
“그게 뭔데?”
최 반장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선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언제 시간 되세요?”
채린이 주방 쪽에서 삶은 콩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할머니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너무 바빠서 다음 주쯤에나 시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지만. 최대한 시간 내볼게.”
최 반장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다음 주에 정 선생님 병원에서 뵙는 걸로 해요. 그런데 많이 바쁘시면 다음에 하면 되는 거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그런데 뭘 확인해본다는 거야?”
“재밌는 거요.”
채린이 묘한 미소를 짓던 그때.
드르륵.
요란스럽게 가게 문이 열리며.
“할머니. 콩국수 하나 시원하게 말아줘 봐요.”
송 사장이 껄렁거리며 똘마니 몇 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네 놈한테 팔 국수는 없어. 장사 끝났으니까 그만 나가.”
테이블 위에서 삶은 콩을 손질하던 할머니가 송 사장을 보자 파르르 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기 밥 먹는 사람들도 있구만. 할머니 장사할 때 사람 가려 받으면 되나. 내가 공짜로 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송 사장이 인상을 구기며 가게 안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채린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최 반장과 성진은 뒤돌아 앉아있어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네 놈들한테는 팔 국수 없으니까 빨리 나가.”
할머니가 송 사장을 밀치며 소리쳤다.
“좋아요. 안 판다는데. 안 먹지 뭐. 그럼 이 가게나 빨리 팔아요.”
송 사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할머니를 노려봤다.
“이 도둑놈아. 그 돈에 이 가게는 절대 못 넘긴다.”
“할머니. 그 돈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잘 판단해요. 이 가게 불법증축에 위생관리 위반에 뭐 걸 거 천지더구먼. 그냥 내가 가게 그만하게 해줄까요? 나이도 있는데 이제 좀 쉬셔야지.”
송 사장이 할머니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히죽거렸다.
“나가. 나가라고. 이 도둑놈아!”
팔을 뿌리친 할머니가 테이블 위에 있던 삶은 콩을 송 사장에게 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아 진짜.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송 사장이 핏대를 올리며 고함을 치던 그때.
“어떤 새끼가 개념 없이 식당에서 이렇게 떠들어!”
성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