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검찰청 태준의 사무실.
“긴장되세요?”
홍 수사관이 창밖을 바라보던 태준에게 캔 커피 하나를 건네며 물었다.
“긴장은요.”
캔을 받아든 태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자들 진짜 많이 왔네요. 못해도 100명은 온 것 같은데요.”
홍 수사관이 같이 창밖을 힐끔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민성이잖아요.”
유력 정치인의 비자금 사건.
언론이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올 때 되지 않았나요?”
홍 수사관이 목을 쭉 빼 검찰청 정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10분 안에 올 것 같은데요.”
태준이 살짝 초조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 시계를 바라봤다.
“자신 있으시죠?”
홍 수사관이 캔 커피를 벌컥 들이켜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이뤄진 민성의 검찰조사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까지.
이미 판은 완벽히 깔렸으니.
이제부터 태준과 민성의 1대1 진검승부였다.
“해봐야죠.”
태준이 창가에 걸터앉으며 손에 쥔 캔 커피를 만지작거렸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 아시죠?”
지는 쪽은 모든 것을 잃는.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지려고 시작하는 싸움도 있나요?”
태준이 빙그레 웃으며 캔 커피를 따 벌컥 들이켰다.
“역시.”
홍 수사관이 양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럼 슬슬 마중 나가볼까요?”
단숨에 들이켠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넣은 태준이 창가에서 엉덩이를 뗐다.
유력 정치인들이 조사를 받으러 오면 1층 엘리베이터로 마중을 가는 게 일반적.
유력정치인에 검찰 선배기까지 한 민성을 마중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대신 나갈게요.”
기선제압이 중요한 지금.
홍 수사관은 굳이 태준이 먼저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아니요. 제가 갈게요. 포토라인에 선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태준도 민성을 마중 나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많은 언론 앞에서 당황한 민성의 표정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긴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저도 같이 갈까요?”
당황한 민성의 얼굴만 상상해도 즐거운지 홍 수사관이 씩 웃으며 의자에 걸어둔 재킷을 벗겼다.
“저 혼자 갈게요.”
자신의 전장(戰場)으로 불러들인 적장(敵將)을 마주하러 나가는 건 장수가 할 일.
마치 일대일 승부를 가리러 나가는 장수처럼 태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홍 수사관님은 다시 한번 취조실 세팅 확인만 좀 해주세요.”
“네. 그럼 다녀오십시오.”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볼까요.”
태준이 한쪽 팔을 재킷에 넣으며 힘찬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법원 ⦁ 검찰청 Court & Prosecutor`s Office]
운전대를 잡은 성진의 눈앞에 검찰청 표지판이 보였다.
‘아직 멀었나?’
이제 곧 검찰청.
하지만 아직까지 채린이 기억 밖으로 나왔다는 연락이 없자 성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순간.
[끝!]
짧은 인혜의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휴-”
성진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자.
“으-”
민성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깜빡 잠드셨나 봅니다.”
성진이 백미러로 민성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띵동.- 띵동- 띵동-
“아직도 도착 안 한거야?”
민성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띵동.- 띵동- 띵동-
“이제 곧 다 왔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멀어.”
민성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차가 좀 막혀서요.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성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기억 속을 휘젓고 다닌 채린이의 잔상이 민성의 기억 속에 남아 저런 건 아닐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띵동.- 띵동- 띵동-
“저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 당장 저것 좀 고쳐.”
“아- 네.”
민성의 대답에 한숨 돌린 성진이 대시보드 위 카메라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검찰청 정문 사거리.
“이제 다 왔는데. 준비하시죠.”
마지막 신호에 차를 멈춘 성진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
그러자 여유롭던 민성의 얼굴에도 어둔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내 걱정하지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지.”
‘성깔하고는.’
민성의 퉁명스런 대답에 성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던 그때.
옆 좌회전 차선으로 차 한 대가 빠르게 성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 반장님!’
그리고 그 차의 살짝 내려간 조수석 창문 너머로 최 반장이 찡긋 눈인사를 했다.
‘이제 진짜 끝난 건가?’
모든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듯한 최 반장의 신호에 성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뭐해 안 가고.”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민성은 바뀐 신호에 머뭇거리는 성진을 향해 투덜거릴 뿐이었다.
“아- 네.”
성진이 빙그레 웃으며 검찰청 정문을 향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국민성 넌 끝났어.’
***
검찰청 안으로 들어오는 민성의 차가 들어오자.
“어! 저기 온다.”
“밀지 마요.”
“포토라인 좀 지킵시다.”
민성을 기다리던 기자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잠시 후.
미끄러지듯 들어온 차가 검찰청 로비 앞에 멈추자.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흘렀다.
“후-”
하지만 이내 뒷좌석 문이 열리며 민성이 긴 한숨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자.
“의원님. 지금 심정을 한 말씀만 해주시죠.”
“뇌물수수를 인정하십니까?”
숨 막힐 듯한 정적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들로 금세 산산조각 났다.
“국민들께 한 말씀 해주시죠.”
한 기자가 얼굴 앞까지 들이민 마이크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민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진실을 밝히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민성의 예상치 못한 첫 마디에 여기저기서 플래시들이 터졌다.
“그럼 뭐 때문에 출석하신 건가요?”
“전 정치논리로 움직이는 검찰 시스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민성이 마치 선거유세 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검찰이 정치논리로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전 오늘 이런 강압적이고 명백한 정치적 탄압을 끊기 위해, 그리고 이 나라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날조된 거짓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마치 독립투사라도 되는 듯 민성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냥 빨리 들어오지. 밖에서 뭐라는 거야.”
그리고 그 모습을 현관문 안쪽에서 민성을 기다리던 태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짓 진실이란 무얼 말씀하시는 거죠?”
“모든 것입니다. 저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와 잘못된 진실. 그 모든 것과 싸우겠습니다. 제 이름 국민성처럼. 국민의 목소리를 제가 오랜 시간 몸담았던 사랑하는 검찰에 제대로 전달하고 나오겠습니다.”
민성이 흥분한 얼굴로 마지막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의원님 그만 들어가시죠.”
더 이상 저런 가식적인 모습을 볼 수 없는 태준이 로비 밖으로 직접 민성을 데리러 나왔다.
“흠-.”
하지만 민성은 먼저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듯 태준을 본체만체하며 먼저 검찰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 오늘 하루가 길겠네.”
태준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뒤를 따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검찰 조사실.
“더 이상 똑같은 질문 할 거면 그만하지. 그리고 지금 이따위 차를 준비해놓고 나를 부른 건가?”
민성이 앞에 놓인 찻잔을 태준 앞으로 밀며 혀를 찼다.
“차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주 앉은 태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애써 억지 미소를 지었다.
조사 내내 모든 혐의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살살 성질을 돋우는 민성의 모습에 속에선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딱 자네 수준 같네. 차도 질문들도.”
민성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태준을 도발하자.
“전 의원님의 수준에 맞춰드린 건데.”
태준도 지지 않고 바로 맞받아쳤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자네가 이긴 것 같지?”
민성이 의자를 끌어당겨 태준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이글 바득 갈았다.
“이 상황이 게임이 아니라 이겼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고. 전 그저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태준이 민성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배짱 하나는 좋군. 자네도 정치하면 잘 하겠어.”
거침없는 태준의 모습에 민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가 그쪽은 관심이 없어서요. 잠시만.”
태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최 반장님입니다. 일단 듣기만 하세요.”]
“네.”
[“지금 국민성 재킷에 배지 달려 있나요?”]
최 반장의 말에 밖으로 나가던 태준이 슬쩍 고개를 돌려 민성의 옷깃을 확인했다.
쾅.
“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것보다 증거는 찾으셨어요?”
조사실 밖으로 나온 태준이 옆방의 관찰실로 자리를 옮기며 질문을 쏟아냈다.
민성을 보내버릴 결정적인 한방이 없는 지금.
최 반장이 반드시 찾아오겠다 확언했던 그 증거가 절실히 필요했다.
[“네.”]
“그게 뭐예요? 아니 지금 가지고 오실 수 있죠?”
관찰실 유리 너머 거만한 얼굴로 마치 승리를 예감한 듯 히죽거리는 민성의 표정에 태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지금 눈앞에 보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국민성 배지요. 그 배지가 증거예요.”]
“정말요?”
태준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래서 말인데 그 배지 좀 저한테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배지를요?”
태준의 시선이 유리너머 민성의 배지에 꽂혔다.
[“국과수에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압수수색 영장 받아서 가져오기에는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또 국민성이 호락호락 내줄 것 같지도 않아서요. 가능할까요?”]
“그것보다 저 배지가 확실한가요?”
혹시라도 만약 저 배지가 아니라면 오히려 역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국회사무처에 확인했는데 추가로 배지 발급받은 게 없으니 그 배지가 확실해요.”]
국회의원 등록 순서대로 배지에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었기에 다시 재발급받으려면 반드시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30분 이따 받으러 오세요.”
태준이 벽에 걸린 시계와 유리 너머 민성을 번갈아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
“더 이상 할 것 없으면 그만 끝내지. 벌써 점심시간…….”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는 태준을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민성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실 줄 알고 식사 준비했습니다.”
태준의 뒤로 홍 수사관이 국밥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흠-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으시다.”
점심까지 들고 오는 걸 보니 해가 떠 있을 때 이곳을 나가긴 틀린 것 같았다.
“나이도 있으신데. 잘 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곱빼기로 시켰으니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태준이 빙그레 웃으며 홍 수사관에게 눈짓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러자 홍 수사관이 민성 앞에 국밥쟁반을 놓고 뒤돌아서며 슬쩍 쟁반을 손으로 쳤다.
쨍그랑.
“아! 뜨거!! 아!!”
재킷 위로 쏟아진 국밥에 민성이 펄쩍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괜찮으십니까? 화상 입으시겠습니다. 빨리 그것부터 벗으시죠.”
그러자 태준이 놀란 얼굴로 급하게 민성의 재킷을 벗겼다.
“에- 이씨. 야! 이게 뭐야! 너 나 화상 입으면 죽을 줄 알아!”
민성이 홍 수사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바지도 빨리 벗으시죠. 제가 빨리 의료진 데리고 오겠습니다. 홍 수사관님 사무실에서 얼음 팩 좀”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홍 수사관이 먼저 밖으로 뛰어나가자 태준이 엉망이 된 민성의 재킷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빨리빨리 서둘러! 살 다 익겠어!”
민성이 팬티바람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검찰청 지하주차장.
“하- 하- 여기요.”
숨이 턱까지 차오른 태준이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진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쇼핑백 속 아직 국밥의 온기가 남은 축축한 재킷을 받아든 성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말하자면 길어요. 4시간 안에 결과 받을 수 있을까요?”
민성을 잡아둘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길어봤자 5시간,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4시간…… 빠듯한데요.”
쇼핑백을 백팩에 찔러 넣은 성진이 오토바이에 오르며 난감한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부르릉-
“꼭 부탁드려요.”
“네. 그럼 그동안 국민성 좀 잘 잡고 계세요.”
부르릉- 우-아앙
성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헬멧 쉴드를 내리며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