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179화 (179/669)

#179.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늦은 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채린이 버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퇴근 후의 지친 얼굴로 띄엄띄엄 버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서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만큼은 다른 사람의 방해는 받고 싶지 않다는 듯.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정도로.

모두가 오롯이 자기만의 세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좀 늦었네.”

채린이 버스에 달린 모니터로 시간을 확인하던 그때.

위- 윙- 위

손에 쥔 핸드폰이 가볍게 울렸다.

[“채린아 어디니?”]

편의점 사장의 전화였다.

“차가 좀 막혀서요. 지금 가고 있어요.”

이미 오전에 편의점 알바는 끝났지만.

갑자기 배탈이 나 오지 못한다는 저녁 알바생 때문에 다시 편의점으로 향하는 채린이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편의를 많이 봐주는 사장님의 부탁이라 딱히 거절하기도 그랬지만.

또 막상 딱히 할 일도 없어 집에서 무료하게 있느니 차라리 돈이라도 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네. 이따 뵐게요.”

채린이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버스 앞문으로 한 남자가 성큼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삑-

버스 기사의 인사는 가볍게 무시한 채 습관처럼 교통카드를 찍고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채린이 몇 자리 앞에 자리를 잡은 남자.

상식이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이었기에 상식을 바라보던 채린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이하네.’

하지만 곧이어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상식에게로 채린이의 시선이 다시 향했다.

히히히- 히히히 크어억억억.

귀를 긁는 듯한. 아니 숨이 넘어갈 듯한.

기괴한 상식의 웃음소리가 버스 안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히히- 히- 히히히.

버스의 엔지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다들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웃음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좀 조용히 좀 하지.’

오늘따라 이어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이렇게 후회된 적이 없을 만큼.

그의 웃음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채린이에겐 여간 신경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히히- 크어억억억.- 히- 히히히.

불편함과 눈에 거슬림은 관심으로 이어지는 법.

도대체 뭘 보고 저렇게 웃는 건지 궁금한 채린이 슬쩍 고개를 앞으로 뺐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뒷자리였기에 조금만 앞으로 허리를 펴고 고개를 움직이면 앞에 앉은 상식의 핸드폰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야.’

상식이 그렇게 즐겁게 보고 있는 화면을 확인한 채린이의 미간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웃어.’

셀카나 SNS에 올릴 영상을 찍다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의 끔찍한 동영상을 마치 예능프로 보듯 너무나 즐거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착- 착-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보다 채린이의 신경을 더 거슬리게 하는 건 아까 전부터 그의 오른손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라이터.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으로 라이터 부싯돌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들에겐 그저 단순한 손장난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항상 사건 속에서 살아가는 채린이에겐 저런 작은 행동 하나마저도 그냥 쉽게 보이지 않았다.

“왜 저래 진짜.”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 온 짜증이 지금 채린이의 기분을 여실히 보여줬다.

히히히- 히히히 크어억억억.

상식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다시 버스 안에 울려 퍼지던 그때.

“손님. 좀 조용히 해주세요.”

버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히히히- 히히히 크어억억억.

하지만 상식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여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에 빠져있었다.

“손님! 조용히 하시라고요!”

참다못한 버스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씨. 내가 이거 공짜로 탔어요?”

그러자 핸드폰에서 고개를 든 상식이 운전기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 혼자 탄 거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하시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이 버스 공짜로 탔냐고!”

소란스런 상황에 버스에 탄 사람들이 하나둘씩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거나 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상식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

괜히 끼어들어 봉변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뭘 잘했다고 소리쳐.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까 조용하라고.”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그랬어.”

누가 하나 말릴 새도 없이 운전석까지 뛰어나간 상식이 운전기사를 위협하며 소리 질렀다.

“거 그만 합시다. 운전 중에 위험하게 뭐 하는 겁니까.”

그러자 보다 못한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상식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또 뭐야. 당신하고 상관없으니까 빠져 씨.”

상식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핏대를 올리던 그때.

“여기 2057번 버스인데요. 지금 한 승객이…….”

“야! 차 세워. 차 세우라고!”

112에 전화를 건 것 같은 운전기사의 모습에 당황한 상식이 부실 듯 벨을 누르며 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진상 한번 피고 싶었지만.

경찰까지 불러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잠시 후.

“아! 뭐야.”

“아저씨! 뭐예요.”

“비켜! 비키라고!”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추자 상식이 앞문으로 타는 사람들을 밀치며 도망치듯 버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요즘 왜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아.”

운전기사가 그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바라보며 잔뜩 인상을 구겼다.

“기사양반 괜찮아요?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

“아니요. 저런 인간들은 그냥 신고하는 척만 해도 저래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쪽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톡톡 두드리던 운전기사가 뒤에 탄 승객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다시 출발한 버스.

그리고 무심코 상식이 뛰어간 방향을 향해 뒤돌아보던 채린이의 눈에.

“진짜 뭐야…….”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쉰 채 버스를 노려보며 핸드폰에 뭔가를 입력하는 상식의 모습이 보였다.

***

어느 병원 입원실.

[302호 / 이미성]

똑. 똑.

“네.”

병실 문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어제 연락드렸던 윤주철이라고 합니다.”

큼지막한 과일바구니를 든 주철이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에 병원에 한번 오셨던 원장님 친구분이시죠?”

이번 화재 사건의 생존자이자.

영수 병원에서 꽤 오랜 기간 일한 미성이 단번에 주철을 알아봤다.

“기억하시네요. 이건 별거 아니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간호사의 모습에 주철이 옅게 미소 지으며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시네요.”

으레 병문안을 가면 하는 판에 박힌 인사를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많이 힘드시죠?”

주철이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괜찮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러자 미성이 침통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며 주철을 바라봤다.

“하지만 저보다 더 힘드실 것 같은데.”

“흠- 저야 뭐.”

주철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긴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를 그리고 함께 일한 동료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저한테 뭐 여쭤보실 게 있으시다고.”

“그날 있었던 일을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주철이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전 이미 경찰분들께 다 말씀드렸는데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요.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녹음 좀 해도 될까요?”

주철이 핸드폰을 침대 위에 올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전 상관없어요.”

미성이 별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주철이 붉은색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날이 토요일 1시쯤이었나?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다 퇴근준비하고 나갈 채비를 할 때쯤이었는데요. 갑자기 매캐한 냄새가 병원 안으로 확 들어왔어요.”

“1시쯤이요…… 그래서요.”

주철이 시간을 곱씹으며 그다음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막 울리면서 ‘불이야!’라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기에 그냥 정신없이 비상구 계단을 향해서 뛰었어요. 엘리베이터는 위험하다고 해서요.”

“그때 비상구 문은 열려 있었나요?”

“네.”

“바로 아래 5층에서 불이 났는데 비상구 계단을 통해서 대피할 수 있었나요?”

비상구가 불길에 막혀 결국 죽음에 이른 영수를 생각하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5층 반쯤 열린 비상구 문으로 연기가 엄청 새어 나와서 비상계단 전체가 연기로 가득 차긴 했지만. 다행히 불길이 치솟거나 그러지 않아서 도망치는데 문제는 없었어요.”

“영수는 왜 같이 나오지 못한 거죠?”

주철이 많은 감정이 묻은 얼굴로 나지막이 물었다.

“원장님께서 중요한 서류들하고 노트북 챙겨서 바로 뒤따라오신다고 먼저 내려가라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하던 미성이 순간 고개를 떨어뜨리며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

그녀를 원망할 순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때는 정말 주변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었어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정말 어떻게 뛰었는지도 모르게 도망쳤거든요. 그리고 원장님께서 바로 뒤에 따라오시는 줄 알고…….”

또다시 미성의 두 뺨에 굵은 눈물이 흘렀다.

“영수가 화재가 난 상황에서도 그렇게 챙기려던 자료가 뭔가요?

자기의 목숨과 맞바꾼 자료가 뭔지 궁금했다.

“요즘 책을 한권 출간 준비 중이셨는데. 그동안의 진료 내용을 적은 노트를 꼭 챙기셔야 한다고. 그리고 친구분이면 잘 아시잖아요. 원장님 아직도 수기(手記)로 차트 쓰시는 거요.”

미성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연필보다 핸드폰이 더 흔한 요즘 같은 시대에 유독 아날로그를 좋아하던 놈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혹시 이 사람 아시나요?”

침통해 하던 주철이 다시 심각한 얼굴로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미성에게 건넸다.

“곽상식 씨네요.”

오토바이에 올라 배달 헬멧을 쓰고 핸드폰으로 어딘가를 찍고 있는 상식의 모습.

며칠 전 사건현장에서 주철이 카메라로 찍은 상식의 사진이었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저희 환자신 데요. 그런데 이 분이 왜요?”

미성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 사람 사건 당일 날 왔나요?”

“네. 진료받으셨어요.”

“몇 시에 진료받았나요?”

“음- 마지막 타임이었으니까…… 12시 진료요.”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고 기억을 더듬던 미성이 이내 답을 내놓았다.

“몇 시쯤 끝났나요? 진료 마치고 바로 갔나요?”

주철이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날은 그렇게 오래 안 하셨어요. 한 30분 정도?”

“그날 뭐 특별한 점은 없었나요?”

“아니요 뭐. 특별히 항상 좀 독특하신 분이라.”

“독특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데 이 분은 갑자기 왜 물어보시죠?”

미성이 사진 속 상식과 주철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화재 사건을 물어보러 와서 오히려 상식에 대해 더 꼬치꼬치 캐묻는 주철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어떤 부분이 좀 특별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잘 아시잖아요. 말씀드릴 수 없는 걸요.”

미성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대충 대략적인 거라도. 예를 들어 분노조절 장애나. 조현병이 있었다던 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주철이 다시 한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설령 말씀드리고 싶어도 진료 차트를 원장님께서 직접 관리하셔서 저희는 정확한 병명이나 그런 건 잘 몰라요. 그저 수납하면서 쓰이는 약이나 뭐 이런 걸로 대충 짐작만 하는 거죠.”

“그럼 그 짐작만이라도.”

경찰이 조사했으면 쉽게 알아냈겠지만 주철에겐 상식의 병명 하나 알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울증과 조현병 약을 처방받았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미성이 마지못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감사합니다.”

주철이 핸드폰 녹음정지 버튼을 눌렀다.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몸조리 잘 하세요. 너무 죄책감가지지 마시고요.”

별 소득 없이 만남을 마무리한 주철이 무겁게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

“그분 유튜브 한번 들어가 보세요.”

뒤에서 들리는 미성의 한 마디가 주철의 발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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