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196화 (196/669)

#196.

“눈뜨세요.”

채린이의 목소리가 주철의 귓가에 울렸다.

“어…….”

천천히 눈을 뜬 주철이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와!”

눈앞에 보이는 멀쩡한 [김영수 정신과] 간판에 주철이 탄성과 함께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 그런 반응이에요.”

채린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시간을 세팅했다.

“이게 정말 다 사실이라니.”

어제까지도 까맣게 불탄 건물 앞에 서 있던 자신이.

지금은 멀쩡한 건물 앞에 서 있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놀라는 건 나중에 하시고요. 일단 빨리 움직이죠.”

채린이 주철을 재촉하며 먼저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어. 알았어.”

두 뺨을 가볍게 두드린 주철이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채린이의 뒤를 따랐다.

***

빌딩 로비 엘리베이터 앞.

“어디부터 갈까요?”

“1시쯤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했으니까. 일단 병원부터 확인해 볼까?”

[PM 12 : 40]

핸드폰 시간을 확인한 주철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가면 정말 영수를 볼 수 있을까?”

주철이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네. 그런데 만날 수 없는 건 잘 아시죠?”

“어.”

“아쉬우시죠.”

채린이 안타까운 얼굴로 주철을 바라봤다.

“아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주철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그저 다시 환하게 웃고 있는 영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후회와 슬픔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곽상식이 병원에서 몇 시쯤 나왔다고 했죠?”

채린이 다시 사건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12시 30분쯤.”

“그럼 만약 지금 올라갔는데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다면…….”

“곽상식이 20분에 병원을 나왔다는 건 거짓말인 거겠지. 20분에 나왔다면 지금 시간의 병원에서의 기억이 없을 테니까.”

주철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채린이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겠는데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느려.”

[5]. [4]. [3]

하나씩 천천히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들에서 주철이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잠깐 비상구 쪽으로 피할까요?”

갑자기 채린이 뭔가 불길한 표정을 지으며 옆의 비상구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왜?”

“그냥 왠지 좀 찜찜해서요. 일단 이 엘리베이터 보내고 다음 거 타요.”

“……그래.”

자신의 지식과 경험보다 지금 이곳에선 채린이의 감을 믿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계단 쪽 비상구로 몸을 피하고 잠시 후.

땡.

[1층입니다.]

“읍-”

비상구 계단 문 뒤에 숨어 로비를 지켜보던 주철은 급하게 소리지를 뻔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흠- ♩- 음- ♬♩음- ♬ ”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식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쉿!”

한 발짝 뒤에서 문틈으로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던 채린이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정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던 상식이 로비 한편에 세워진 간이 경비실 부스를 슬쩍 바라보다 걸음을 멈췄다.

“그지 맨날 없지. 히히히.”

경비실 유리창에 걸린 [순찰 중]이라 적힌 팻말을 손으로 가볍게 튕긴 상식이 거리낌 없이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뭘 하려고 저러지?”

주철이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상식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일단 이건 끄고.”

상식이 경비실 안 CCTV 전원 버튼을 내렸다.

그리고 품 안에서 꺼낸 라이터 석유를 CCTV 기계와 경비실 이곳저곳에 뿌렸다.

“저기가 맨 처음 불났던 곳 아니잖아요.”

채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처음 발화점은 5층 식당인데. 아마 CCTV 증거 없애려고 미리 저렇게 해놨던 것 같아. 나중에 불길이 로비까지 다 번졌다고 했거든.”

주철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데 왜 CCTV가 저렇게 손상됐다는 걸 몰랐을까요? 인화성 물질이라 흔적이 남았을 것 같은데요.”

채린이 선뜻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여기 입구가 싹 다 타버렸거든. 그놈의 돈 때문에…….”

건물 외벽부터 로비까지 리모델링하며 돈 아끼겠다고 쓴 값싼 소재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할 거라곤 그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돈이요?”

“어. 그 이야기 나가서 해줄게. 어! 다시 올라가는 것 같은데.”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상식의 모습에 주철이 다시 긴장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느새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상식의 모습에 채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6층? 아니면 5층? 어디지,”

주철이 인상을 쓰며 잠시 주저하던 그때.

“그럼 일단 뛰어 올라가요.”

채린이 먼저 거침없이 비상구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허- 허- 6층에 안 왔어요.”

먼저 6층 비상구 문틈으로 안을 확인한 채린이 뒤따라 올라오는 주철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내려가자.”

“네.”

잠시 후.

빼꼼히 연 비상구 문틈 사이로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걷는 상식의 모습이 보였다.

“식당으로 가는 것 같은데요.”

“그럼 정말 저 새끼가 불을…….”

주철이 격양된 얼굴로 이를 바득 갈았다.

“저것 보세요.”

채린이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시선 끝에 상식이 핸드폰 모서리 끝으로 식당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삐. 삐. 삑. 삑 .삑. - 띠로로

지-이-잉 철컥.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요?”

“그건 여기서 나가서 따로 조사해봐야 될 것 같아. 그런데 식당으로 들어가서 여기선 더 이상 안 보이는데.”

광고 포스터로 도배가 된 유리창 너머 상식의 움직이는 실루엣만 언뜻언뜻 보일 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주철은 몸이 달았다.

“가까이 가볼까요?”

채린이 몸을 들썩이며 조심스럽게 비상구 손잡이를 돌리려 하자.

“위험하지 않을까? 그러다 걸리면 바로 여기서 튕겨져 나가는 거잖아.”

놀란 주철이 채린이의 손을 막았다.

“그렇다고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도 많이 했어요.”

채린이 피식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먼저 조심스럽게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

주철이 채린이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가며 속삭였다.

“여기서 보면 될 것 같아요.”

가게 창문 앞 사람 키만큼 쌓인 주류박스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린이 창문에 붙은 포스터의 테이프 한쪽을 조심스럽게 뗐다.

“보인다.”

이제야 가게 안의 상식의 모습이 보이자 주철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이쪽 창문 위가 병원이니까…….”

상식이 팔짱을 낀 채 잠시 가게 창문들 앞에서 고민하다.

“일단 여기를 열고.”

한 창문을 활짝 열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아이씨. 드럽게 무겁네.”

주방 앞에 쌓여있던 폐식용유 통들을 하나씩 창가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 주방과 창문을 오갔을까.

“으-차.”

마지막으로 들고 온 폐식용유 한통을, 쌓아놓은 폐식용유 통들과 바닥에 골고루 뿌렸다.

“이제 폐식용유를 누가 옮겼는지는 알아냈네요. 그런데 불은 주방 쪽에서 전기합선으로 일어났다고 했는데. 왜 저기다 저런 짓을 할까요?”

가게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린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병원 쪽 창문이라는 거 보니까 저쪽에서 연기를 피우려고 했던 것 같아. 불이 났다는 걸 병원에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왜요?”

채린이 놀란 얼굴로 주철을 바라봤다.

“그래야 병원에서 다들 도망칠 테니까.”

“그럼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저런 짓을 했다는 거예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식의 행동에 채린이 아연실색했다.

“아마도……. 그리고 또 저렇게 해놔야 불길이 외벽에 쉽게 옮겨붙어서 건물 전체가 타기도 쉬울 테고.”

“그런데 왜 김 원장님은 그때 같이 대피하지 않으신 걸까요?”

채린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간호사 말로는 무슨 자료 때문에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는데. 이따 진실은 확인해 봐야지.”

주철의 눈빛이 분노와 진실을 향한 집념으로 이글거렸다.

“저건 또 뭘 하려는 걸까요?”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던 상식이 테이블 한편에 말리고 있던 행주들을 들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 음- ♬♩음- ♬ ”

그리고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 천장에 어지럽게 엉킨 전선의 피복들을 살짝 벗겼다.

“전기설비 일을 했다고 하더니 역시.”

능숙하게 전선을 다루는 상식의 모습에 주철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저걸로 불을 붙이려는 걸까요?”

“어. 이제 곧 불이 붙을 테니까 조심해.”

벗긴 피복을 가볍게 접촉시키는 상식의 모습에 주철이 긴장하며 말했다.

“네.”

그리고 잠시 뒤.

파- 팍. 파- 팍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튄 불꽃들이 전선 아래 놓은 행주들과 주변에 있는 음식재료박스들 위로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잘 타네.”

불붙은 박스들과 행주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상식이 음식집게로 활활 타는 행주들을 하나씩 집어 폐식용유 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퍼-억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폐식용유에 옮겨붙은 작은 불꽃은 어느새 주변을 무섭게 집어삼키며 몇 배로 커졌다.

“잘 탄다. 히히히히.”

상식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마치 이 모든 걸 놀이처럼 하고 있는 상식의 모습에 주철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저 핸드폰. 저 핸드폰만 있으면 끝날 것 같아요.”

채린이 화재 현장을 찍고 있는 상식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끝장내 줄 테니까.”

지금 버스 좌석에 고꾸라져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상식의 손에 들린 핸드폰만 뺏으면 저 미친놈을 끝장낼 수 있다는 생각에 주철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어! 나와요.”

뿌옇게 차오르는 연기를 뒤로하고 가게 문 쪽으로 걸어 나오는 상식의 모습에 채린이 주철의 팔을 이끌고 급하게 꺾어진 복도 뒤로 몸을 숨겼다.

“♩- 음- ♬♩음- ♬ ”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온 상식이 복도 벽에 설치된 화재경보기 앞에 섰다.

“쇼타임.”

그리고 주먹으로 화재경보기 버튼을 부서질 듯 때리며 소리쳤다.

따르르르르릉- 에- 엥 에- 따르르르르릉- 에- 엥 에-

그러자 곧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온 건물에 울렸다.

“♬ ♩- 흠- ♬♩음-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식은 마치 사이렌 소리에 스텝을 맞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상구 계단 쪽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문 앞에서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흠- 흠- 아- 아-”

그리고 잠시 후.

“불-이야. 불이야. 불이- 야”

비상구 계단을 조금 열고 목이 터져라 건물 전체에 소리쳤다.

“모든 게 다 저 새끼의 계획이었어.”

영수 병원 간호사가 처음으로 들었다는 ‘불이야’라는 소리도 상식의 짓이라는 걸 알자 주철은 상식의 치밀한 계획에 치가 떨렸다.

그리고 잠시 후.

“피해. 피해.”

“빨리 내려가.”

다다다. 다다다다.

비상구 계단 쪽에서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내려가요. 히히히. 안 그럼 죽어요. 히히히히.”

비상구 문에 귀를 댄 상식이 그 소리를 들으며 혼자 히죽거렸다.

“미쳤어.”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채린이 온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쳤다.

지금까지 인간이길 포기한 무수히 많은 인간들을 봤지만.

이놈은 진짜였다.

비상구 계단 쪽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발소리가 잦아들자.

“자- 그럼 올라가 볼까. 흠- ♩- 음- ♬♩음- ♬”

문에서 귀를 뗀 상식이 비상구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김 원장님 제가 갑니다. 히히히히.”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지러지게 웃으며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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