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12화 (212/669)

#212.

상식의 선고공판일.

“피고인 곽상식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다.”

판사의 말이 법정 안을 울리자.

세상모르고 날뛰던 상식도 ‘사형’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앞으로 떨어뜨렸다.

“후-”

텅 빈 방청석.

유일하게 자리를 채운 세 사람이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네요.”

방청석 맨 뒤에 앉은 성진이 개운한 얼굴로 옆에 앉은 최 반장을 바라봤다.

“끝났네.”

최 반장이 교도관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식을 바라보며 금연사탕 하나를 입에 밀어 넣었다.

“이런 걸 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겠죠.”

“그렇지.”

“단순히 인정받고, 관심받고 싶어서 사람들을 죽였다니…… 여전히 전 이해가 안 되네요.”

성진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이해할 수 도 없는 인간이니까.”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성진이 텅 빈 방청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진짜 기사 한 줄 안 나왔잖아요.”

상식 앞에서 한 주철의 호언장담대로.

상식의 사건은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히 상식의 이름도 그의 존재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나도 솔직히 그건 좀 의외야.”

상식이 원하는 엔딩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최 반장의 부탁에 태준이 모든 언론사의 데스크를 통해 협조를 부탁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완벽히 상식의 사건이 묻히리라고는 최 반장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허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이, 상식이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낸 거라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요.”

자신이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상식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다.”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상식의 웃음소리에 최 반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무슨 기분이실까요?”

성진이 방청석 맨 앞에 앉아있는 주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감이 교차하겠지.”

최 반장이 달달한 사탕을 입안에 굴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쾅-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상식이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고 이내 문이 닫히자.

“후-”

주철이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기도하듯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흐느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때.

어떤 위로나 격려의 말보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게 우선이었다.

잠시 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든 주철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뒤.

“후-”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내듯 다시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주철은.

꽤 개운한 표정으로 방청석 뒤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 반장을 바라보며 진심이 담긴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에- 이러지 마세요.”

최 반장이 손사래를 치며 주철을 일으켜 세웠다.

“아닙니다. 반장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시작도 못 했을 겁니다.”

“다 채린이가 선택한 일인데 내가 인사받을 게 있나요. 그리고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최 반장이 빙그레 웃으며 주철의 팔을 지그시 잡았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김 형사도 도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요. 그리고 뭐 저 혼자 했나요.”

주철의 감사 인사에 성진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

“다 끝났어요?”

법정 문을 빼꼼히 열며 인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

“어떻게 나왔어요?”

성진의 짧은 대답에 인혜 뒤에 있던 채린이 앞으로 나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사형이지.”

“정말요? 후- 다행이다.”

최 반장 말에 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 기간 내내 영수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은 걸 근거로 심신미약(心神微弱)이라 주장하는 상식이었기에.

혹시라도 무죄(無罪)가 나오는 건 아닐까 마음을 졸이던 채린이었다.

“채린아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제가 한 게 아니라 저희가 다 같이 한 거죠.”

주철의 감사 인사에 채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채린아 넌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어. 곽상식이 SD카드를 틀니 안에 숨겼다는 걸 네가 찾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겠어.”

성진의 말에 최 반장이 맞장구를 쳤다.

“민망하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띄워주세요.”

채린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인데 뭐. 그리고 정 선생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자- 그럼 이제 다 잘 끝났는데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요?”

채린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인혜가 세 사람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네 분이서 가세요. 전 영수한테 들러서 오늘 재판 결과 이야기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주철의 이야기에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가볍게 목례를 한 주철이 법정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

“앞으로도 같이 하실 거죠?”

채린이의 말에 주철의 걸음이 멈췄다.

“불러준다면 언제든지.”

안경을 밀어 올린 주철이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Episode 4.

늦은 밤.

쿵- 쿵- 쿵-

다. 다. 다. 다.

쿵- 쿵- 쿵- 쿵-

“아이씨 진짜.”

윗집에서 들리는 소음에 나연이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끼- 이- 익- 쿵-

“진짜 미쳤나.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고.”

침대 옆에 놓인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나연이 대답 없는 흰 천장만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새벽 2시.

작은 숨소리조차 단잠을 깨우는 거친 바람소리처럼 들리는 깊은 밤.

층간소음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윗집에서 들리는 소음에 나연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진짜 올라가서 확 한번 엎어?”

위에서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소음에 밤잠을 설치길 벌써 일주일 째.

같은 아파트에서 십 년을 살아도 앞집 얼굴 한 번 안 보고 사는 세상이지만.

이런 일이라면 매일이라도 얼굴을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씨 진짜 참자. 참어.”

하지만 또 명색이 경찰 밥 먹는 입장에 원래 성격대로 들이받을 수도 없는 노릇.

들썩이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으- 아- 아- 앙

하지만 이번에 위에서 들리는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소리에 나연이 다시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쿵- 쿵- 쿵- 쿵-

으-아-앙

“으- 으- 진짜 잠 좀 잡시다. 잠 좀!”

더 이상 참지 못한 나연이 천장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쿵- 쿵- 쿵- 쿵-

공허한 외침일 뿐.

위에서 들리는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야! 조용히 하라고 조용히!”

나연이 베개를 집어 들어 천장으로 던지려던 그때.

거짓말처럼 위에서 들리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뭐야. 들었나?”

갑작스런 상황에 오히려 당황한 나연이 온 신경을 윗집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의 숨소리만 들릴 뿐.

윗집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 그래. 니들도 인간이면 자야지. 그래 제발 조용히 좀 자자.”

천장을 바라보며 부탁과 같은 말을 중얼거린 나연이 베개로 양쪽 귀를 틀어막은 채 다시 씩씩거리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

[일어나 이 새끼야! 네가 아직도 처자고 있으면 인간이 아니야! / 일어나 이 새끼야! 네가 아직도 처자고 있으면 인간이 아니야! ]

탁.

“으- 아!”

자기 목소리로 녹음해 놓은 탁상 알람을 부실 듯 내려친 나연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다 순간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아이씨- 또 늦잠 잤어.”

상쾌하고 여유로운 아침은 드라마 속의 이야기.

오늘도 출근 1시간 전에 눈이 떠진 나연이 헐레벌떡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또다시 늦잠.

새벽의 그 난리는 항상 다음날 지각이라는 숙취를 남겼다.

잠시 뒤.

드라이기로 대충 머리를 말린 나연이 화장대에 앉아 메이크업을 시작하려던 그때.

♩-♬♬-♬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 아침부터.”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아침부터 웬일이야.”

갑작스런 성진의 전화에 메이크업을 하던 나연의 손이 멈칫했다.

“아-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그런 건 그냥 이따 출근할 때 알려줘도 되는데 꼭 바빠 죽을 것 같은 지금 알려줘야겠어? 아무튼 그래도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 수고 많았어.”

핀잔인지 칭찬인지 헷갈리는 말을 던지며 순식간에 눈 화장을 끝낸 나연이 이번엔 화장대 위에 있는 붉은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어느새 붉게 피어오른 입술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립스틱 뚜껑을 닫은 나연이 이번엔 앞머리에 롤을 말고 옷장으로 뛰어갔다.

“내가 이번에 그 가짜 뉴스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지.”

그리고 가지런히 정돈된 옷들 중 호피무늬 셔츠를 주저 없이 골랐다.

“그럼 밥은 언제 살 거야? 뭐? 순댓국?”

고른 셔츠를 몸에 가져다 대보던 나연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성진의 대답에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순댓국 한 그릇으로 퉁치겠다는 거야? 지금 뭔가 잊었나 본데. 예전에 나한테 빚진 거 아직도 남은 거 알지? 분명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한 가지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나연의 손길이 다시 바빠졌다.

“아무튼 일단 끊어.”

셔츠 단추를 잠그며 급하게 통화를 끊은 나연이 옷걸이에 결려 있던 핸드백과 코트를 한 번에 집어 들고 현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씨 또 늦겠네.”

***

탁. 탁. 탁.

나연이 초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 시계를 바라봤다.

“미치겠네. 진짜.”

명색이 그래도 사이버수사팀 팀장인데.

팀원들에게 모범은 보이지 못할망정 일주일 내내 지각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생겼으니.

도무지 면(面)이 서지 않았다.

“아- 어제 잠만 잘 잤어도. 이게 다 윗집 때문이야. 으- 진짜. 어떤 인간들인지 진짜 한 번만 마주쳐라.”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윗집으로 돌린 나연이 이를 바득 갈았다.

“아이씨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내려와. 또 위야.”

일분일초가 아쉬운 이 마당에 위층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나연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래. 어떤 인간들인지 얼굴 좀 보자.”

이렇게 된 마당.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다 생각한 나연이 눈에 불을 켜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6에서 천천히 15로 바뀌고.

띵- 동

[15층입니다.]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저기요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위에서 계속 잡고 있으면…… 어! 뭐야 왜 아무도 없어.”

텅 빈 엘리베이터에 나연이 당황하며 안을 살피던 그때.

“아! 깜짝이야!”

엘리베이터 문 오른쪽 구석에 몸을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미동도 없이 서 있는 6-7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누구야?”

나연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으로 닫히는 문을 막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벽만 바라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너 혹시 윗집 살아?”

나연이 다시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묻자.

“…….”

슬며시 나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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