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20화 (220/669)

#220.

[희망 파이낸셜 이사 주찬혁] 이란 명패가 놓인 도심의 한 사무실.

“요즘 일반 직장인 월급으로는 절대 집 못 사는 거 아시잖아요.”

소파 상석에 앉은 찬혁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각선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 그렇죠.”

30대 후반. 잔뜩 긴장한 표정의 남자가 연신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로또 두 번 당첨 되도 서울에 집 못 사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아니 불가능한 일을 제가 도와드리겠다는데 왜 망설이십니까.”

찬혁이 자신감 넘치는 거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남자를 위아래 아래로 깔아봤다.

평소 사람들 앞에선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의 찬혁이었지만.

[희망 파이낸셜 이사 주찬혁] 이라는 명패 앞에선 180도 달라졌다.

“솔직히 제가 이런 게 처음이라…….”

남자가 불안한 얼굴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쉽게 대부업체라고 생각하세요. 빌렸다. 다시 돌려준다.”

찬혁이 여유로운 미소로 주고받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좀 불안하고 찜찜해서…….”

“회사에서 월급 받으시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에 찬혁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네?”

뜬금없는 찬혁의 질문에 남자가 놀란 토끼 눈으로 말했다.

“월급 안 받으세요?”

“다. 당연히 받죠.”

“선생님은 회사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돈을 받는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언제든지 재화의 수단으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그러네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간단한 물물교환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찜찜해 하실 필요도. 괜한 죄책감 가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 네.”

말 같지도 않은 찬혁의 궤변(詭辯)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면 남자는 이런 쓰레기 같은 논리로라도 지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하지만 쉽사리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가 말씀입니까?”

“걸리지 않을까 해서…….”

“무단횡단 해보셨죠?”

그러자 찬혁이 이번에도 남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다른 비유를 들었다.

“……네.”

“무단횡단 범칙금이 얼마인지 아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모를까요? 분명 불법인데.”

“그거야 안 걸려봐서…….”

“똑같아요. 이것도 엄연히 불법이지만 절대 걸릴 일 없습니다.”

찬혁이 씩 웃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아-.”

또다시 찬혁의 궤변에 묘하게 설득당한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십니까?”

“저 그런데 만에 하나 걸리면 계약은 다 취소되는 건가요?”

하지만 조금씩 펴지던 남자의 미간은 이내 또 다른 걱정에 더 깊게 패였다.

“그럴 일은 없지만. 정말 만에 하나 재수 없게 걸렸을 때는 청약 계약 취소가 가능하다고 법적으로 말은 하지만, 이마저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모호하게 규정돼 있거든요.”

찬혁이 남자 앞으로 엉덩이를 당겨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 네.”

“그리고 좀 더 덧붙여 설명해 드리자면 일단 청약 이후에 청약을 위해 했던 조건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자체가 없어요.”

“그래요?”

어두웠던 남자의 낯빛이 다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네. 아니 공무원들이 뭔 할 일이 없다고 그걸 다시 검증하고 있겠습니까. 절대 안 해요. 절대.”

찬혁이 손사래를 치며 힘주어 말했다.

“그럼 정말 사장님만 믿으면 되는 겁니까?”

남자가 마른 침을 삼키며 찬혁을 바라봤다.

“제가 이걸로 정말 많은 분들 집 장만해드렸습니다. 솔직히 국가에서 저한테 상 줘야 해요. 서민들의 주거환경 안정을 위해 제가 얼마나 힘쓰고 있습니까. 하하하.”

찬혁이 거들먹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흠-”

“그러니까 그런 표정도 짓지 마시고 걱정도 하지 마세요. 다 잘 될 테니까요.”

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장고(長考)를 하는 남자에게 찬혁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저도 애 키우는 입장에서 역시 아이들이 마음에 좀 걸려서…….”

남자가 입꼬리를 내리며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어디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될 아이들인데. 보육원보다는 그래도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게 좋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냥 잘 쓰시고 흠 없이 돌려주시면 됩니다.”

찬혁의 미소는 마치 악마의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과 달리 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파양(罷養)이 가능하다고 하던데요.”

“저희는 프로예요. 그런 건 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 드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자 여기 준비하실 서류입니다.”

남자의 걱정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찬혁이 빙그레 웃으며 남자 앞에 준비한 서류를 건넸다.

다자녀 혜택 아파트 특별분양을 노린 허위입양 브로커.

이것이 찬혁의 진짜 본 모습이었다.

“저 그런데 직접 데리고 가지 않고 서류로만 할 수 있다고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저희가 지금 맞벌이라 애 하나 케어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요.”

완전히 마음을 굳힌 남자가 이젠 디테일한 문제를 묻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서류상으로만 했는데요. 요즘은 SNS도 있고, 또 사람들 보는 눈도 있어서 불편하시더라도 좀 데리고 있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집도 생기시는데 좋은 일 하신다 생각하시면 좋잖아요. 딱 1년인데요.”

찬혁이 검지를 치켜들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후- 네. 어쩔 수 없죠 뭐.”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정산을 좀 해볼까요?”

찬혁이 들뜬 얼굴로 양손을 비비며 남자를 바라봤다.

“네. 그러죠.”

“음- 일단 착수금 3000(만원)에. 인(人) 당 1000. 두 명이니까 2000 그리고…….”

테이블 옆에 있던 계산기를 왼손 위에 올려놓은 찬혁이 거침없이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비싸네요.”

남자가 찬혁의 말을 끊으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서울 아파트값이 얼마인 줄 아시면서. 아니 몇억이 그냥 굴러들어오는데 이 정도 투자도 안 하면 그건 도둑놈이죠.”

찬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봤다.

“알겠습니다. 계속하세요.”

방금 전까지도 불안감으로 가득 찼던 남자의 눈빛은 어느새 탐욕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까 어디까지 했죠? 아. 명의 빌리는 거 하고 진행비가 3000인데. 기분이다! 진행비에서 500 깎아드릴게요. 그럼 다 해서. 7500이네요. 아- 정말 거져다 그죠?”

테이블 위에 계산기를 던지듯 내려놓은 찬혁이 있는 대로 생색을 냈다.

“그럼 일단 오늘은 이것만.”

남자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꺼낸 두툼한 흰 봉투를 찬혁에게 건넸다.

“부족하시면 저희한테 빌려서 하셔도 됩니다.”

봉투를 확인한 찬혁이 [희망 파이낸셜]이라 적힌 유리창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아닙니다. 나머지는 2주 안에 마련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돈 더 벌고 싶으시면 일단 분양받으신 후에 저희가 전매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찬혁이 또다시 달콤한 유혹의 미끼를 남자에게 던졌다.

“피(프리미엄)가 어느 정도 붙을까요?”

그러자 남자가 바로 입질을 했다.

“최소 2억 이상은 붙겠죠? 워낙 인기 많은 곳이니까요.”

“2억이나요?”

찬혁의 말에 남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때요? 솔깃하시죠?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이런 말 들으면 또 혹하거든요. 하하하.”

“그럼 수수료는.”

“저희는 많이 먹지도 않아요. 딱 20%만 받겠습니다. 또 애들도 일단 1년 동안은 키우셔야 하니까. 제가 많이 배려해 드린 겁니다.”

“20%로는 좀 많은 것 같은데…….”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또다시 고민했다.

“거기 당첨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거 아시죠? 그리고 당첨만 됐다면 바로 로또인데요. 망설이실 게 있나요? 그리고 그것도 저희 아니면 못 합니다.”

찬혁이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뱀 같은 혀로 남자의 욕심을 자극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

마시면 마실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더해간다는 걸 찬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것도 같이 진행해 주세요.”

남자가 앞에 놓인 물 잔을 단숨에 비우며 비장한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봤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연치 않게 대출받으러 오셨다가 이렇게 집도 생기시고 이런 걸 보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정말 잘 결정…….”

“저 그런데 아이들은 괜찮나요?”

남자가 찬혁의 말을 끊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조용하고 정말 괜찮으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제가 교육을 잘 시켰거든요.”

찬혁이 다리를 꼬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씩 웃었다.

***

“도 팀장님.”

“어! 여긴 어쩐 일이야.”

운전석에서 내리는 성진을 보자 나연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냥 좀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어! 반장님도 계셨네요.”

거기다 생각지 못한 최 반장의 등장까지.

나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살아요?”

최 반장이 나연과 형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형준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나연의 뒤로 몸을 숨겼다.

“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세요?”

마치 보호자처럼 놀란 형준이의 손을 꼭 잡은 나연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쟤 좀 보러왔어요.]”

입 모양으로 나연에게 속삭인 성진이.

“안녕. 아저씨 알지? 그때 유치원에서 봤는데.”

허리를 숙이고 나연의 뒤에 숨은 형준이에게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형준인 불안한 얼굴로 더 나연의 뒤로 몸을 숨겼다.

“형준이를 보러 오신 거라고요? 왜요?”

나연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이름도 알고. 잘 아는 사이에요?”

최 반장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뭐 조금. 저희 윗집 살아요.”

“아- 그 돌아…….”

“어? 어. 어.”

나연이 형준의 눈치를 보며 성진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 지금 얘 데리고 어디 가는 길이세요?”

성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편의점에. 배고프다고 해서.”

나연이 자기 뒤에 숨은 형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저희도 편의점 가려는 길이었는데. 같이 가요.”

성진이 먼저 앞장서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

편의점 밖 파라솔.

“진짜예요?”

방금 전 나연에게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성진이 마시던 음료수를 입에서 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 좀 낮춰.”

나연이 성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편의점 안에서 과자를 고르는 형준을 바라봤다.

“똑똑히 본 거 맞아요?”

묵묵히 듣고 있던 최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네. 아까 손잡고 오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흠-”

확신에 찬 나연의 대답에 최 반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반장님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이번에도 역시 감(感)인가요?”

나연이 묘한 표정으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관심이라고 해두죠.”

최 반장이 편의점 안에 있는 형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아신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유치원 교육 갔을 때 같이 가서 보시고 이러시네요. 그냥 계속 눈에 밟히신다고.”

최 반장을 대신해 성진이 대답했다.

“아- 눈이 가는 아이긴 하죠.”

나연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편의점 유리 너머로 형준이 과자 하나를 손에 쥐고 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잠깐만요. 저 계산 좀 하고 올게요. 다 샀어?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거 더 사.”

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의외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 반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다른 사람한테는 전혀 관심 없는 것 같았는데. 의외지 않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알고 보면 괜찮은 분이라니까요.”

성진이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경찰 오기 전에 뭐하다 왔는지 알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워낙 자기 이야기 안 하시는 분이라.”

“흠- 그래.”

최 반장이 편의점 안, 형준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나연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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