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유치원 부근 카페.
“형준아 이거 말고 이따 저녁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누나가 사줄게.”
나연이 아무 말 없이 조각 케이크만 먹고 있는 형준이를 바라봤다.
“…….”
“그럼 우리 어디 재밌는데 갈까?”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나연이 이런저런 말들을 형준이에게 건넸지만.
“…….”
형준이의 입은 케이크 먹을 때만 열릴 뿐.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흠-”
나연이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가득한 눈으로 형준이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자.
“팀장님.”
건너편에 앉아있던 인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연을 부르며 그런 표정을 짓지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자 나연이 깜짝 놀라며 다시 애써 환한 표정으로 형준이를 바라봤다.
형준이를 대할 때면 으레 나오던 안타깝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표정들이.
오히려 형준이의 자존감과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인혜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먹었네. 맛있었어? 형준아 그럼 가서 더 먹고 싶은 거 골라봐.”
애써 웃으며 말한다 했지만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연이 형준이를 카페 앞쪽에 진열된 케이크 쪽으로 보냈다.
“…….”
형준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앞으로 가자.
“후- 미치겠네! 진짜.”
나연이 기다렸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고르고 있는 형준이와 괴로워하는 나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인혜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연이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답답한 얼굴로 오히려 인혜에게 되물었다.
찬혁의 죄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기회라 믿었던 형준이의 진술은 예상치 못했던 함묵증이라는 벽에 막히고.
형준이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데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난감한 지금.
나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형준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마음껏 사주는 일밖에 없었다.
“일단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주찬혁하고 부인이 애들 실종신고라도 내면 일이 더 복잡해지잖아요.”
인혜가 팔짱을 끼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보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잔뜩 구겨진 나연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런데 형준이도 그렇지만 지금 다른 아이들은 괜찮을까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채린도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저도 궁금해서 아까 김 형사가 알려준 동대표 분 연락처로 전화해봤는데요. 그 분이 몇 시간 간격으로 집에 가서 확인하셨는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일 없나 봐요. 엄마도 아직 안 들어오고요.”
이런저런 고민에 타들어 가는 목을 아이스커피로 적신 나연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별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그제야 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대표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오늘 애들 엄마는 안 들어올 분위기라고 하던데. 그런데 엄마가 집에 안 들어오는 걸 애들한테 다행이라고 해야 하니…….”
그 누구보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오히려 엄마의 부재(不在)가 다행인 상황에 나연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계속 이렇게 데리고 계실 거예요?”
“음- 일단 오늘은 세 아이다 저희 집에서 데리고 있을게요.”
채린이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연이 결심한 듯 입술을 앙 다물며 말했다.
“세 아이를 혼자 보실 수 있겠어요?”
뜻밖의 대답에 인혜가 살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애들을 본 적은 없지만…… 뭐 어떻게 되겠죠.”
“그럼 제가 같이 가서 도와드릴까요?”
“저도 도울게요.”
나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혜와 채린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끝까지 책임을 지어야죠.”
나연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표정으로 여전히 케이크 앞에서 고민하는 형준이를 바라봤다.
어쩌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형준이의 손을 잡고 내린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상 최 반장님하고 김 형사가 주찬혁의 다른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 있겠죠?”
형준이에게 향하던 시선을 두 사람에게 돌린 나연이 초조한 얼굴로 말하자.
“두 분이라면 찾으실 거예요. 반드시.”
채린이 확신에 찬 얼굴로 나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
“이것들이 진짜…….”
찬혁이 분노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그리고 이건 계약서인데요. 그냥 컨설팅 체결 계약서라 이게 딱히 증거가 될 것 같지는 않네요. 진짜 이면계약은 제 뒷조사하고 한다고 해서요.”
주철이 서명하려던 계약서를 최 반장에게 건넸다.
“들었어요. 야. 그런데 앞 사람한테는 7000만원에 해준다고 하다가 갑자기 2억 이나 받아먹는 건 너무 양아치 아니냐?”
최 반장이 계약서를 접어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찬혁을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랬어요?”
주철이 기가 차는 얼굴로 찬혁을 노려봤다.
“이것들이 진짜.”
찬혁이 이를 바득 갈며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순간.
“설마…… 앞에 계약 깬 것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찬혁이 주먹을 말아 최 반장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눈치는 빠르네. 맞아. 원래 이 앞에 네가 하기로 했던 계약 있잖아. 그거 내가 깨라고 시켰어. 그러면서 소파 의자 틈 사이에 도청기 설치하면 정상참작 해주겠다고 하니까 좋다고 바로 하겠다고 하던데.”
최 반장이 여유로운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딱-
“후-”
찬혁이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부러트리며 최 반장을 죽일 듯 노려봤다.
“아무튼 제 할 일은 끝난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김 형사 수고해.”
이제는 빠질 타이밍.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단 생각한 주철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아! 잠깐만요. 부탁드릴게 하나 더 있는데.”
최 반장이 급하게 주철을 불러 세웠다.
“또요? 뭔데요?”
“검사를 좀 부탁할 게 있어서요.”
최 반장이 주철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검사요? 검사할 건 어디 있는데요?”
주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곧 가져다 드릴게요.”
“아-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면 알려주세요.”
주철이 최 반장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찬혁이라는 걸 확인하자.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야! 저 새끼 잡아.”
찬혁이 성진의 기세에 잔뜩 긴장해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건달들을 향해 주철을 잡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건달들이 다시 눈에 살기를 띄며 주철을 막아서고, 최 반장과 성진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지 마라. 다치기 싫으면.”
성진이 건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감히 날 속여? 하- 이것들 완전 양아치 새끼들이네.”
주철과 최 반장, 성진을 향해 찬혁이 차례대로 삿대질하며 기가 차는 얼굴로 말했다.
“뭐? 양아치?”
팔을 꺾어 잡고 있던 건달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성진이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니들이 양아치지 형사야? 영장도 없이 대뜸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함정수사에 불법 도청까지. 뭐해 지금 당장 김 변호사 불러. 이 새끼들 옷 다 벗겨버릴 테니까.”
찬혁이 겁에 질린 얼굴로 구석에 몸을 숨긴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실장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버하지 마. 그리고 변호사 부를 거면 경찰서로 바로 오라고해. 괜히 이리로 불러서 헛걸음 시키지 말고.”
최 반장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그런데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너희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찬혁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건방진 얼굴로 최 반장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건 오히려 최 반장의 페이스에 말리는 꼴.
물론 녹취파일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이런 걸 대비해서 그렇게 비싼 돈을 쳐들어가며 매달 대형로펌에 돈을 쏟아 부었으니.
최대한 여유로운 척 하며 자신을 구해줄 변호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거기다 이미 중요한 서류들은 은밀한 장소에 다 치운 상태.
생각해보니 이 상황이 미칠 만큼 짜증나고 화가 나지만.
크게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라 판단했다.
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자신을 바라보며 증거를 찾아 검사를 맡기겠다는 최 반장의 그 알 수 없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이유를 몰라?”
최 반장이 서늘한 눈빛으로 찬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난 그냥 부동산 컨설팅 해준 것 밖에 없는데.”
“너 계속 말이 짧다.”
“됐어. 흠- 흠.”
흥분하는 성진을 잠시 진정시킨 최 반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주찬혁 씨. 당신을 주택법 위반 및 아동학대 혐의로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할 기회와 구속적부심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고, 또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내 우렁찬 찬혁의 죄목과 함께 미란다원칙을 읊어 내려가다.
“닥치고 경찰서 가자.”
마지막으로 찬혁을 죽일 듯 바라보며 사무실이 떠나라가 소리쳤다.
짝. 짝. 짝.
“긴 거 외우느라 고생하셨겠네. 그래서 뭐?”
하지만 찬혁은 박수까지 치며 거들먹거렸다.
“저게 진짜 끝까지 반말이네. 반장님 그냥 끌고 가죠. 자- 자- 빨리 알아서 서로서로 사이좋게 손목에 차라.”
찬혁을 보며 이를 바득 갈던 성진이 주머니에서 수갑 몇 개를 꺼내 멀뚱히 서 있는 건달 앞에 던졌다.
그러자 당황한 건달들이 일제히 찬혁을 바라봤다.
“뭘 쳐다봐 이 새끼들아. 지금 저 말을 듣겠다는 거야!”
찬혁이 노발대발하며 고함을 질렀다.
“뭐하냐 동작이 느리다. 빨리 빨리 차라. 쟤는 반장님이 직접 하실 거죠?”
하지만 성진은 찬혁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건달들을 닦달하며 최 반장에게 물었다.
“그래야지.”
최 반장이 찬혁을 빤히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려던 그때.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새끼들 입니까?”
어디서 연락을 받고 왔는지 건달 열댓 명이 우르르 사무실 안으로 소리를 지르며 뛰쳐들어왔다.
“하나. 둘. 셋. 넷. 수갑 모자라겠는데요.”
들어온 건달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던 성진이 난감한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수갑 하나에 두 놈씩 줄줄이 엮어.”
“하- 이 새끼들 허세는 진짜. 야. 명색이 경찰 체면에 여기서 처맞고 질질 끌려나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나가.”
찬혁이 헛웃음을 치며 가소롭단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손짓했다.
“넌 진짜 말로 안 되겠다.”
최 반장이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며 성큼성큼 찬혁에 걸어갔다.
“뭐야.”
“죽고 싶냐?”
그러자 건달들이 일제히 최 반장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말로 안 하면 어쩔 건데. 지금 주변을 보고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하하하하.”
아무리 경찰이라지만. 겨우 두 명.
건장한 똘마니들에 돈이면 뭐든지 다 해줄 든든한 로펌까지 있으니 찬혁은 두려울 게 없었다.
“아니다. 오히려 잘됐다. 너한테는 별로 말로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여기 CCTV 없는 것 같지?
최 반장이 재킷을 소파에 벗어던지며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네. 그냥 편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성진도 같이 사무실 안을 훑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뭔 개소리야. 야. 조져.”
“네. 야-”
찬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덩치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쾅-
“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덩치를 한방에 엎어치기로 날려버린 최 반장이.
“쟤는 내 꺼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찬혁에게 달려갔다.
***
퍽- 퍽-
쾅-
쨍그랑-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 아-”
“윽-”
비명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매웠다.
“저리가! 저리가!”
구석에 몰린 찬혁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서서히 다가오는 최 반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리와. 빨리 이리와.”
머리카락이 땀으로 흠뻑 젖은 최 반장이 씩씩거리며 찬혁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그 순간.
“꺼져! 꺼지라고!”
찬혁이 바닥에 떨어진 반쯤 깨진 유리병을 최 반장을 향해 힘껏 던졌다.
쨍그랑-
간발의 차로 최 반장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유리병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어…… 피.”
살짝 찢어진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손바닥으로 슥 닦아 눈으로 확인한 최 반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 이제부터 과잉진압 아니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