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49화 (249/669)

#249.

위-이-잉 위- 이-잉

“선생님 전화 오는데요.”

현미가 눈짓으로 책상 위에 있는 인혜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위-이-잉 위- 이-잉

[발신자번호제한]

핸드폰 화면에 뜬 문구를 확인하자 인혜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인혜가 ‘침착해’라는 말을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안 받으세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인혜를 향해 현미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위-이-잉 위- 이-잉

“후- 저 그럼 잠시만.”

환자 앞에서 납치 전화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심호흡을 한 인혜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여기서 받으셔도 괜찮은데요.”

현미가 일어나는 인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위-이-잉 위- 이-잉

“아니에요. 잠시만요.”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난 인혜가 문 쪽으로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과 함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ABC보험에서 좋은 치과 보험 상품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경쾌한 목소리에.

“후-”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인혜가 멈칫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시죠? 이번에 저희 ABC 보험에서……”]

“죄송합니다. 제가 보험도 많고 지금 좀 바빠서요. 먼저 끊겠습니다.”

띠- 릭

터질 듯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빠져서일까.

핸드폰을 끊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인혜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났다.

“요즘 보험광고 전화 진짜 많이 오는 것 같아요.”

현미가 자리에 앉은 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리고 그냥 여기서 통화하셔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원래 진료 중에는 안 받는데 죄송해요. 제가 꼭 받아야 할 중요한 전화가 있어서요.”

인혜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네. 그런데 어디 불편하세요?”

현미가 창백한 얼굴의 인혜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니에요. 괜찮아요.”

인혜가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식은땀도 흘리시는 것 같고 안색도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하지만 현미는 의자 끝쪽으로 몸을 쭉 빼며 인혜에 대한 걱정스런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진짜 괜찮아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현미의 관심이 살짝 부담스런 인혜가 의자 뒤로 몸을 빼며 말을 돌렸다.

“네.”

그러자 현미도 살짝 멋쩍은 얼굴로 다시 의자에 등을 붙이며 짧게 대답했다.

“불면증은 얼마나 되셨죠?”

인혜가 만년필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음- 한 5-6년 정도요.”

“오래되셨네요. 그 전에 불면증 때문에 진료를 받으신 적이 있나요?”

만년필을 쥔 인혜의 하얀 손이 진료차트 위를 유려하게 움직이자.

“아니요.”

현미가 그 손끝을 눈으로 따라가며 짧게 대답했다.

“꽤 괴로우셨을 텐데…… 잠 못 자는 게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잖아요.”

현미가 살포시 웃음 지었다.

“잘 오셨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그냥 회사원이라고 적으셨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문진표와 진료차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인혜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 다녀요. 특별한 것 하나도 없는. 그냥 회사요.”

현미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

“스트레스 없는 직장인은 세상에 없겠죠.”

“그렇죠. 그럼 불면증의 주원인이 회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도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죠.”

현미가 손을 만지작거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씀인가요?”

진료차트 위를 움직이던 인혜의 손이 멈칫했다.

“후- 그냥 사람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현미가 긴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직장상사나 동료, 그러니까 회사 생활에서의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나요?”

대부분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주원인은 인간관계.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었다.

“안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에요.”

현미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애인 때문인가요?”

“선생님 혹시 짝사랑 해보셨어요?”

현미가 인혜의 질문에 대답 대신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짝사랑이요?”

인혜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뭐…… 그럼 마음에 두고 계신 분 때문에 잠을 못 이루시는 건가요?”

하지만 진료에서의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하는 법.

인혜가 자연스럽게 다시 대화를 이끌어갔다.

“음-”

현미가 똑 부러지는 대답 대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같은 직장 동료분인가요?”

“아니요.”

“자주 보는 분이신가요?”

“가끔요.”

“혹시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인가요? 결혼한 분이라거나.”

인혜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인혜의 질문에 무표정으로 빠르게 대답하던 현미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운명처럼요.”

잠시 뜸을 들이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운명처럼요?”

뜻밖의 대답에 현미의 대답을 진료차트에 적던 인혜의 고개가 슬며시 들렸다.

“네. 운명처럼.”

“멋지면서 쉽지 않은 말이네요. 그분에 대한 그런 마음은 언제부터 품으신 거죠?”

책상 위에 얹은 손을 떼며 의자에 허리를 기댄 인혜가 빙그레 웃으며 현미를 바라봤다.

그러자.

“5년 258일…… 10시간이요.”

현미가 벽에 걸린 시간을 힐끔 쳐다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걸 세고 계세요?”

인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거예요. 자기 나이처럼요.”

현미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네.”

인혜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만년필을 들어 차트에 빠르게 뭔가를 써 내려가던 그때.

“그런데 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해주셨는데.”

현미가 생긋거리는 표정으로 인혜에게 말했다.

“네?”

인혜가 다시 펜을 멈추며 현미를 바라봤다.

“짝사랑 해보셨냐고요.”

“그게…….”

“선생님은 짝사랑 안 해보셨죠?”

“음-”

거듭되는 난처한 질문에 인혜가 멋쩍은 미소로 대답하자.

“하긴 이렇게 멋지고 예쁘신 분이 짝사랑 같은 걸 할 리가 없죠.”

현미가 의자에 허리를 기대며 풀죽은 얼굴로 입꼬리를 내렸다.

“아니에요. 저도 해본 적은 있죠.”

상담의 기본은 공감.

일단은 현미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주기로 한 인혜였다.

“어떻게 됐어요? 이루어졌나요?”

드디어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되자 현미가 다시 의자를 인혜 쪽으로 당겨 앉으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물었다.

“대부분의 짝사랑처럼 끝났죠.”

인혜가 빙그레 웃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

미소 짓던 현미의 표정은 일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저의 이야기고. 해피엔딩도 많죠. 그리고 전 현미 씨도 그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심각한 현미의 반응에 인혜가 최대한 밝은 얼굴로 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현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그녀의 마음을 열어 치료를 효율적으로 이어가는 게 더 우선이라 판단했다.

“……그럴까요?”

그러자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현미의 미간이 슬며시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요.”

인혜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똑. 똑.

원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원장님 차 가지고 왔습니다.”

간호사가 트레이에 김이 올라오는 카모마일 차 두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앞에 차가 놓이자 두 사람이 동시에 간호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간호사가 나가자.

“선생님은 참 친절하시네요.”

현미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인혜를 바라봤다.

“제가요?”

“네. 표정도 말투로 참 화사하고 친절하세요. 봄날의 햇살 같아요.”

“너무 과찬이신데요. 드셔보세요. 카모마일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되거든요.”

인혜가 손사래를 치며 앞에 놓인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네. 후-”

찻잔 위에 피어오르는 김을 가볍게 입김으로 날린 현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댔다.

“맛있네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짝사랑하는 분도 현미 씨를 아나요?”

인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진료를 이어갔다.

“알 거예요. 애써 모른 척하는 것 같지만요.”

현미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분 생각 때문에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인가요?”

“회사 지각도 안 하고 가끔 친구도 만나고 매일 저녁에는 운동도 가요.”

“다행이네요.”

현미의 대답에 인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만년필 잡은 손을 움직였다.

“그 사람은 공기처럼 항상 제 곁에 있으니까요. 전 그냥 제 일상을 살면 되거든요.”

“아- 네.”

인혜의 손이 차트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냥 잠만 잘 못 잘 뿐이에요. 그 사람 때문에 제 삶이 어긋나거나 망가지는 건 그 사람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잘하고 계시는 거예요.”

현미의 이야기에 환한 미소로 대답하던 인혜가 밝은 표정과 달리 차트 위에 짧게 한 단어를 휘 갈렸다.

[집착.]

“일단 현미 씨 불면증의 원인이 그 마음에 두고 계신 분 때문이라는 거는 현미 씨도 인정하시는 거죠?”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인혜의 질문에 현미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시 찻잔을 들던 그때.

위- 위- 윙 위- 위- 윙

책상 위에 뒤집어 올려놓은 인혜의 전화가 또 진동하자.

“…….”

인혜의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위- 위- 윙 위- 위- 윙

“선생님. 전화 오는데 안 받으세요? 중요한 전화 올 거 있다고 하셨잖아요.”

현미가 진동하는 핸드폰과 인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후- 네.”

이번에도 보험이나 여론조사 광고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진짜 협박 전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향해 뻗은 손엔 어느새 식은땀이 흘렀다.

위- 위- 윙 위- 위- 윙

핸드폰을 집어 들자 보이는 [발신자제한표시] 표시에 인혜의 가슴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엔 진짜인가?’

“후- 저 죄송한데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인혜가 현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급하게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천천히 통화하고 오세요.”

“……여보세요.”

혹시라도 전화가 끊길까 문손잡이를 돌리며 통화버튼과 녹음버튼을 동시에 누른 인혜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인혜야…….”]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또다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자리 좀 비켜줘요.”]

병원 대기실로 나온 인혜가 입을 뻥긋거리며 간호사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손짓하자.

갑작스런 인혜의 행동에 간호사들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일제히 데스크 안쪽 사무실로 자리를 피했다.

혼자 남은 대기실.

“당신 누구야.”

인혜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인혜야 도와줘…….”]

“그러니까 누구냐고!”

[“인혜야 도와줘…….”]

“너 누구야! 누구냐고!”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여자를 향해 인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흥분하지 마.”]

수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혜.”]

“…….”

낯선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인혜는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각.

인혜가 미처 꽉 닫지 못하고 나온 원장실 문틈 사이로 현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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