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57화 (257/669)

#257.

다음 날.

인혜의 병원.

“이 자가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예요.”

성진이 프로젝트 화면에 띄운 광구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를 협박한 사람이 저 사람이라고요?”

화면에 뜬 낯선 남자의 얼굴에 인혜의 눈가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네. 이름은 송광구. 일명 송 회장으로 불리는 조직폭력배 출신 사채업자인데.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악질로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해요.”

성진이 준비한 자료를 읽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한테 왜.”

인혜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저 사람한테 돈 빌려 쓴 적 있어요?”

최 반장이 화면 속 광구와 인혜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제가 왜 저런 사람한테 돈을 빌려요.”

인혜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 중에 저 인간한테 돈 빌린 경우도 없고요?”

“없어요.”

인혜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최 반장이 까슬까슬한 턱을 쓰다듬으며 프로젝트 화면 속 광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 송광구라는 것까지는 밝혀냈지만.

광구가 인혜를 지목한 이유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묵묵히 대화를 듣던 채린이 궁금한 얼굴로 성진에게 물었다.

“공중전화에 지문이 묻어있었어.”

“공중전화요?”

“어.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위치추적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핸드폰을 부수고 부하들에게 데리러 오라고 공중전화로 연락을 한 것 같아.”

“아- 그래서 이런 게.”

채린이 테이블 앞에 있던 비닐팩에 든 깨진 핸드폰 조각을 들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자기 딴에는 증거가 남을까봐 부순 핸드폰까지 다시 챙겨가긴 했는데. 그래도 당황하긴 했는지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한 거지.”

“저 CCTV는 어디서 구한 거예요?”

인혜가 화면 속 전화 거는 광고의 모습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끔씩 공중전화를 터는 애들이 있어서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설치한 거라는데. 다행히 공중전화에서는 저 CCTV가 안 보이더라고요.”

“그럼 이제 송광구는 잡을 수 있는 거죠?”

인혜가 불안한 얼굴로 최 반장과 성진을 바라봤다.

“지금 수배 때렸으니까 곧 소식이 있겠죠.”

최 반장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놓친 거예요?”

가뜩이나 광구를 놓쳐서 예민한 최 반장이나 성진의 기분이 상할까 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 진짜 이 새끼가 우리가 이미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다시 생각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성진이 씩씩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요?”

인혜가 소파 앞으로 몸을 당기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부러 창고 쪽으로 우리 시선을 돌리고 어수선한 틈을 봐서 도망친 것 같아요. 거기다 부하들 틈에 섞여 있으리라고는…… 아-우 내가 조금만 더 확인하고 따라갔어야 했는데.”

성진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하자.

“갑자기 3층에서 뛰어내려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까지 따돌리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니까 당연히 송광구라고 생각하죠. 누구라도 속았을 거예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인혜가 성진을 위로하자.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다치시면서까지 결국 누구인지 밝혀내셨잖아요.”

채린이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3층에서 뛰어내린 충격에 오토바이 추격, 거기다 교통사고까지.

다른 사람이라면 벌써 병원에 입원했을 상황이었지만.

광구를 잡기 전까지는 아플 자격도 없다는 성진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잡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두 사람의 위로에도 광구를 놓쳤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에 성진은 구겨진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반장은 난데 네가 왜 심각해. 괜히 오바하지 마.”

최 반장이 성진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얼굴로 눈가를 찌푸리며 투박하게 위로했지만.

하지만 사실 지금 성진보다 더 속이 쓰린 건 최 반장 본인이었다.

“그런데 거기 급습하는 장소는 두 분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인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혹시라도 정보가 샐까봐 투입되는 다른 형사들한테도 도착 전까지는 어디 사무실이라고 설명 안 했는데…….”

“혹시 다른 곳에서 정보가 샌 거 아닐까요?”

성진의 말을 이어 채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곳이라면?”

최 반장이 다리를 꼬며 채린이를 바라봤다.

“그 위치를 처음으로 알려준…….”

그러자 채린이를 대신해 인혜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도 팀장님이요? 아니에요. 도 팀장님이 나중에 급하게 실시간 위치추적프로그램까지 만들어서 보내줬는데요. 그래서 그나마 송광구라는 것도 찾은 거예요.”

성진이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도 팀장님 정말 괜찮은 분이에요?”

인혜가 다리를 꼬며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성진에게 물었다.

“정 선생님도 몇 번 겪어봐서 잘 알잖아요. 좀 독특한 면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우리 팀에 도움이 될 거예요.”

“도움보다 믿을 수 있는 분이냐는 게 중요하죠.”

성진의 대답에 인혜가 뼈있는 말을 던졌다.

“믿을 수 있으니까 반장님이 허락하셨겠죠. 그리고 제가 보장할게요. 앞에서 하면 했지 뒤통수 칠 분은 아니에요.”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솔직히 저도 반장님이 도 팀장님 받아들이셨다고 했을 때 좀 놀라긴 했어요.”

갑작스럽게 나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최 반장의 결정을 채린이도 이해하긴 했지만.

솔직히 의외이긴 했다.

“두 사람에게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그런데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이해해줘요.”

최 반장이 채린이와 인혜를 향해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반장님의 판단을 믿어봐야죠. 그런데 납치된 여자는 사무실에 없었던 거죠?”

개운치 않은 입안을 차로 헹군 인혜가 다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럼 그 여자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최 반장의 대답에 인혜가 답답한 얼굴로 눈가를 찡그리며 되물었다.

“지금 잡힌 부하 놈들을 조사하고 있으니까 뭔가 곧 나오겠죠.”

“무사하겠죠?”

채린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사하길 바라야지. 그런데 아직 연락은 안 왔죠?”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을 한 최 반장이 인혜 앞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그런데 다시 연락이 올까요?”

성진이 어두운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다시 광구가 연락하리라는 걸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고 봐야지.”

최 반장이 긴 한숨을 내쉬던 그때.

위- 이 잉- 잉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인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설마…….”

급하게 핸드폰을 들은 인혜가 놀란 얼굴로 화면을 세 사람에게 돌리자.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자 제한표시] 글자에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위- 이 잉- 잉

“어떻게 해요?”

“일단 진정하고. 받아봐요.”

불안해하는 인혜를 향해 최 반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영상통화인데요.”

“영상통화요?”

예상치 못한 방법에 최 반장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네. 어떻게 해요?”

“일단 받아요. 우린 저쪽으로 가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통화 중에 모습이 보일까 최 반장이 급하게 소파에서 일어나자 성진과 채린이 그 뒤를 따라 원장실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위- 이 잉- 잉

“후- 네.”

인혜가 떨리는 마음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통화 시작하면 바로 도 팀장한테 연락해서 발신자추적 부탁해.”

“네.”

최 반장의 지시에 성진이 긴장된 표정으로 핸드폰의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놨다.

“받아요.”

“……여보세요.”

최 반장의 신호에 인혜의 긴 손가락이 핸드폰 통화 버튼을 가볍게 스치자.

[“듣던 대로 미인이네.”]

핸드폰 화면 속에서 광구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인혜를 빤히 바라봤다.

“송광구.”

[“오- 내 이름도 알고. 영광이네. 그럼 통성명은 생략하고 시간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송광구 그만 자수해. 다 끝났으니까.”

뻔뻔하기 그지없는 광구의 모습에 인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순간.

[“10억”]

광구가 갑자기 정색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10억?”

갑작스런 광구의 말에 인혜를 비롯해 방안의 모든 사람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가 판을 키웠으니. 나도 몸값을 올려야지.”]

“지금이라도 자수해. 그게 당신이 살 수 있는 길이야.”

[“하-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15억.”]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고개를 저은 광구가 인혜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20억.”]

“장난치지 마.”

[“25억”]

인혜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광구가 원하는 몸값은 점점 커져만 갔다.

“송광구!”

더 이상 참지 못한 인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그 예쁜 입술 평생 보고 싶으면 말이야.”]

그러자 광구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인혜의 입술을 가리키며 살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은.

핸드폰을 넘어 등줄기를 서늘케 하는 광구의 살기에 인혜의 말문이 막혔다.

[“겁먹었네. 흐흐흐. 겁먹었어.”]

인혜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광구가 소파에 등을 기대 다시 히죽거렸다.

“너 같은 거에 겁먹지 않아.”

인혜가 단호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이런 놈들과의 대화는 주도권싸움.

여기서 밀린다면 광구도 납치 된 여자도 찾을 수 없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광구가 빈정거리며 인혜의 성질을 건드렸다.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 지금 모든 경찰이 당신을 찾기…….”

[“25억 무기명채권으로 내일까지 준비해. 장소는 따로 연락하지.”]

인혜의 말을 가볍게 끊은 광구가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순간

나연과 통화를 마친 성진이 조심스럽게 원장실로 들어와 최 반장의 귓가에 속삭이자.

[“좀 더 끌어요.”]

최 반장이 손을 빙빙 돌리며 인혜를 향해 입을 뻥긋거렸다.

“여자가 안전한지부터 보여줘.”

최 반장의 사인을 받은 인혜가 시간을 끌기 위해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하자.

[“아마 거기 다 모여 있을 것 같은데. 나와서 얼굴 좀 보여주지.”]

광구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인혜가 놀란 가슴을 애써 숨기며 정색하며 말했지만.

[“최 반장. 김 형사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그만 나와.”]

광구는 더욱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정 선생 이리 줘요.”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핸드폰 뒤에 숨은 건 광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

굳은 표정의 최 반장이 인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장님.”

“괜찮으니까 이리 줘요. 송광구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자수해.”

핸드폰을 넘겨받은 최 반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광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옆에 김 형사도 있지? 오늘 당한 건 조만간 갚아 줄 테니까 기다려.”]

광구가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여자는 어디 있어?”

[“내가 잘 데리고 있어.”]

“일단 여자부터 괜찮은지 보여줘.”

[“오- 그래도 여자를 살릴 맘은 있으신가 봐. 좋아. 보여주지. 데리고 와.”]

광구가 핸드폰 화면을 돌리자.

[“사. 살. 살려주……세요.”]

화면에 산발이 된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피범벅 여자가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아!”

처참한 여자의 모습에 인혜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이런 쓰레기 새끼.”

최 반장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이. 인혜야 살려줘. 제발 사. 살려줘. 인혜야! 아- 악!”]

인혜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화면 속 여자가 갑자기 절규하기 시작했다.

“너 이름. 이름이 뭐야!”

그러자 인혜가 다급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소리쳤지만.

[“됐지.”]

화면은 다시 광구의 얼굴을 향했다.

“송광구!”

[“25억이야. 다시 연락하지.”]

최 반장의 분노 가득한 포효에 피식 웃음을 흘린 광구의 얼굴이 화면 속에서 사라지자.

“당장 도 팀장 연결해.”

최 반장이 성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 시각.

“후-”

최 반장과의 통화를 끝낸 광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의자에 묶인 채 피범벅 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일어나.”

그때 옆에 있던 부하 하나가 여자의 팔을 잡으며 일으켜 세우려 하자.

“더러운 손 치워.”

고개 숙인 여자가 짜증난 목소리로 남자의 팔을 뿌리쳤다.

“이게 진짜.”

“됐어. 가 봐.”

발끈한 남자에게 그만 가보라고 손짓한 광구가.

“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고개 숙인 여자를 향해 몸을 숙이며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묻자.

“당신은 그냥 돈이나 받아.”

피칠갑이 된 얼굴을 천천히 든 현미가 머리에 쓴 가발을 벗으며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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