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60화 (260/669)

#260.

“잘하고 있겠죠?”

차 트렁크에 짐들을 싣던 성진이 아무리 생각해도 인혜 혼자 보낸 게 마음에 걸리는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가지 그랬어. 간 김에 고백도 좀 하고.”

그러자 옆에서 같이 짐을 정리하던 나연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그냥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죠. 그리고 도 팀장님이 혼자 가셨어도 걱정했을 거예요.”

성진이 발끈하며 말했다.

“오- 나 지금 고백받은 거야? 그럼 우리 예식장부터 잡을까? 자기야 우리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나연이 성진의 팔짱을 끼며 매달리자.

“아! 진짜.”

성진이 정색을 하며 팔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최 반장과 채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기야- 어디가?”

그러자 그 뒤를 나연이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끝까지 장난을 치며 따라갔다.

“다 마무리된 거야? 준비는 다 끝난 건가요?”

티격태격하며 걸어오는 성진과 나연을 향해 최 반장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 1층, 2층 다 마무리됐어요.”

“파티 준비 끝이요.”

장난치던 두 사람의 얼굴에도 일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수고했어요. 주변 통제는 어떻게 됐어?”

“지금 이 주변 도로는 다 통제 끝났고요. 혹시 이 부근에 있으면 들킬 염려가 있어서 다른 팀들은 지금 다른 장소에서 대기 중이에요. 연락하면 바로 출동하기로 했어요.”

최 반장의 말에 성진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일단 도망갈 구멍은 다 막은 것 같고. 설치도 끝났고…….”

바싹 타들어 가는 입안에 금연사탕 하나를 밀어 넣은 최 반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혹시라도 빠진 게 있을까 창고 안을 둘러봤다.

“그런데 진짜 정 선생님이 송광구를 이리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요?”

채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최 반장을 바라봤다.

모든 계획을 완벽히 세웠어도 광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시작조차 못 하는 계획.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광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정 선생의 실력을 믿어봐야지.”

불안해하는 채린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짓던 최 반장이.

짝. 짝.

“자 이제 시간 거의 다 됐는데. 준비합시다.”

계획의 시작을 알리듯 박수를 치며 비장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며.

“귀가 찢어지게 파티를 열어줘야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폐건물 로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어둠 너머에서 짜증 가득한 광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면 몰라? 돈 이잖아. 네가 원하던 돈.”

자신을 비추는 라이트를 한 손으로 가린 인혜가 바닥에 떨어진 돈바달 위로 007 가방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괜한 개수작 부리지 마. 내가 분명 무기명 채권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을 텐데.”

라이트 뒤에 숨은 광구가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번거롭게 여러 사람 손 타는 채권보다야 세탁 깔끔하게 끝낸 현금이 더 좋지 않아?”

“하하하. 하하. 볼수록 재밌는 여자야.”

자신만만한 인혜의 모습에 광구의 웃음소리가 폐건물 안을 울렸다.

“너한테 재밌을 이유 없으니까 와서 빨리 이거나 가져가.”

인혜가 바닥에 떨어진 돈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그 돈이 깨끗하다는 걸 어떻게 보장하지?”

광구의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가 라이트 불빛 너머에서 들렸다.

“내가 여기 혼자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증명되지 않을까?”

인혜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난 분명 25억이라 한 것 같은데.”

“5억이야. 계약금 정도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라이트 좀 끄지.”

인혜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비추는 라이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5억?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당신이 지금 나하고 이렇게 장난칠 상황이 아니야.”

하지만 광구는 오히려 더 라이트를 인혜의 얼굴 쪽으로 비추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좋아. 그럼 나머지 돈은 어디 있지?”

“여자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면 5억. 여자가 내 차에 타면 또 5억.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해서 모든 일이 끝나면 바로 주지.”

저번에 광구가 썼던 방법을 인혜도 그대로 썼다.

그 순간.

“하하하 하하.”

폐건물 안이 기분 나쁜 광구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눈에 너무 빤히 보이는 수를 쓰는 거 아니야? 지금 그 돈으로 나를 어떻게 유인해서 짭새랑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본데. 꿈 깨.”

“못 믿겠으면 와서 돈 확인해봐. 경찰이 이딴 일에 5억이나 쓸 것 같아? 그냥 내 뒤따라와서 잡으면 더 빠를 텐데?”

인혜가 바닥에 떨어진 돈을 집어 들어 흔들며 핏대를 세우자.

“…….”

시끄럽게 떠들던 광구의 목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가서 확인해봐.”

다시 무겁게 입을 연 광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속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내 두세 명이 인혜를 빤히 바라보며 걸어왔다.

‘걸려들었다.’

일단 돈을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광구가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

하지만 이제야 단추 하나를 끼운 상황에 들뜰 수는 없는 일.

광구를 폐공장까지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들이 인혜를 둘러싸자 곧이어 광구의 옆에 붙어 있던 남자가 인혜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돈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여기서 위조지폐라는 게 걸리는 순간.

여자의 목숨은커녕 자신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위조지폐를 만든 나쁜 놈들의 실력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넘어가. 넘어가 제발.’

인혜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대범한 표정으로 지폐를 확인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진짜 맞습니다.”

한참 동안 빛을 비춰보고 이리저리 꼼꼼히 지폐를 확인하던 남자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라이트를 향해 소리쳤다.

“확실해? 진짜 확실해?”

의심 가득한 광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네. 확실합니다. 제 실력 아시지 않습니까.”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

인혜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한편으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돈을 가방에 쓸어 담는 남자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최 반장의 말처럼 무기명 채권을 요구한 상황에서 위폐 감별기를 준비할 생각은 못 했을 거고.

또 설령 위폐 감별기를 준비했다 한들 일반적인 감별기로는 감별 못할 정도의 위조지폐라고 하더니.

휴짓조각이나 다름없는 돈을 신이 나서 쓸어 담는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멍청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다 담았으면 가져가.”

인혜가 무릎 꿇은 남자를 내리깔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007가방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인혜를 노려보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딸 깍.

광구가 돈을 확인하는 듯 가방 열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인혜를 비추던 라이트가 꺼지더니 달빛을 받으며 2층 난간에서 광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이걸 속아줘 말아?”

광구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히죽거렸다.

“사람 목숨 걸고 잔머리 굴릴 생각도 없어.”

인혜가 광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최 반장 김 형사를 다 속이고 혼자 온 거다. 돈 25억을 직접 마련해서? 왜?”

어느새 한 발자국 얼굴 앞에 선 광구가 서늘한 눈빛으로 인혜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광구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떨지 마. 떨지 말자.’

살기(殺氣)가 느껴지는 광구의 눈빛에 저절로 뒷걸음질 쳐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참은 인혜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광구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난 지금 네가 잡고 있는 여자의 이름도, 누군지도 몰라. 하지만 요 며칠 너 때문에 내 인생을 곰곰이 되짚어 보니까 말이야. 남들이 절대 알면 안 되는 비밀들이 있더라고.”

“오- 그래. 그래서.”

광구가 재밌는 얼굴로 인혜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살려달라고 걸려온 전화 속 여자, 그리고 그 여자는 나만이 살릴 수 있다고 25억을 달라고 하는 당신.”

“호-”

광구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탄성을 내질렀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거잖아.”

인혜가 손가락으로 광구를 가리키며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하하하.”

광구의 웃음소리가 다시 건물 안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리고 그 비밀의 가치는 충분히 내가 너한테 25억을 줄 만큼 내가 꼭 지켜야 하는 거거든.”

“우- 좋아. 계속해. 계속해.”

광구가 계속 이야기 하라는 듯 양손을 휘저으며 히죽거렸다.

“그래서 난 그 여자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좋아. 좋아. 지금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었어.”

광구가 인혜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니까 빨리 여자부터 내 쪽으로 넘겨. 그리고 넌 돈이나 받고 꺼져.”

인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광구를 벌레 쳐다보듯 바라봤다.

“경찰도 부를 수도, 25억을 줄 정도의 비밀이라…… 재밌어. 재밌어.”

광구가 히죽거리며 다시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제 계약은 성사된 것 같으니까. 빨리 여자가 무사하다는 걸 보여줘.”

인혜가 광구를 향해 소리쳤다.

“그 전에 왜 나머지 돈은 다른 장소에서 준다는 거지?”

광구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인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돈을 다 가져왔어 봐. 너희가 돈만 가지고 여자나 나를 가만히 둔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럼 일단 지금 저 차 안에는 10억이 있다는 소리네.”

광구가 손가락으로 인혜가 타고 온 차를 가리키며 탐욕스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서 나하고 여자를 죽이고 15억만 먹는 거야. 나머지 10억은 그냥 사라지는 거고.”

광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아는 인혜가 본격적으로 떡밥을 던졌다.

한번 돈의 맛을 본 사람의 욕심은.

이성적인 생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난 15억도 충분히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데.”

광구가 난간에 팔을 댄 채 턱을 괴며 히죽거렸다.

하지만 여유로운 말과 달리 난간 아래로 보이는 연신 다리를 떠는 광구의 모습은 지금 갈등하는 그의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래 고민되겠지.’

수중에 들어온 5억.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10억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10억이 더 탐나는 법.

60% 정도 넘어온 광구의 모습에.

“내가 경찰을 부를 수 없다는 걸 뻔히 더 잘 알면서. 10억을 포기하겠다고? 꽤 머리가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

인혜가 광구의 자존심을 긁어 마지막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일단 그 차 안에 돈이 있다는 것부터 확인해야겠어.”

광구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급하게 말하자.

“여자부터.”

어느새 자연스럽게 주도권은 인혜에게 넘어온 상황.

인혜가 단호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씨- 데려와.”

잠시 고민하던 광구가 어둠 속을 향해 소리치자.

잠시 뒤.

사진 속에서 봤던 처참한 모습의 여자가 건장한 두 남자에게 질질 끌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아.”

인혜가 나지막한 탄식을 터트렸다.

여자를 끌고 온 남자들이 마치 물건 던지듯 인혜 앞에 여자를 버려놓고 사라지자.

“괜찮아요?”

한걸음에 달려간 인혜가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요.”

하지만 인혜의 말에도 여자는 의식을 잃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괴로운 얼굴로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사람을 어떻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피투성이 된 여자의 얼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살아는 있잖아. 자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까 빨리 5억부터 내놔.”

하지만 광구는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인혜의 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기다려.”

광구를 노려보며 여자를 다시 조심스럽게 눕힌 인혜가 여자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요. 내가 구해줄 테니까.”

그리고 인혜가 차로 걸어가자.

괴로움에 일그러졌던 여자의 입가에 희미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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