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269화 (269/669)

#269.

“뭐라고 해서 송광구를 폐공장까지 데리고 온 거죠?”

“나머지 돈을 받고 싶으면 폐공장까지 오라고 했어요.”

주철의 말에 인혜가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순순히 송광구가 폐공장까지 왔다고요? 그 의심 많은 송광구가?”

최 반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것보다 혼자 왔다는 걸 믿었다는 게 전 더 신기한데. 송광구에게 뭐라고 했기에 정 선생이 혼자 왔다는 걸 믿은 거예요?”

주철이 다리를 꼬며 안경을 쓸어올렸다.

“비밀을 지키고 싶다고 했어요.”

“비밀이요?”

성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네. 제가 알려지길 원치 않는 비밀을 진현미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녀를 꼭 살리기 위해 여기 온 거라고.”

“알려지기 원치 않는 비밀이라면…….”

채린이 심각한 얼굴로 인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숨죽인 채 인혜의 입만 바라봤다.

“없어.”

인혜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며 짧게 대답했다.

“네?”

예상 밖의 대답에 성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비밀 없다고요. 그냥 송광구를 속이기 위해서 한 말인데 의외로 속더라고요. 25억 이라는 거금을 주고 진현미를 살리기 위해 경찰들까지 따돌리고 왔을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인혜가 책상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믿어요?”

주철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송광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 한마디에 어설프게 당할 인물은 아니라 생각했다.

“저도 불안 불안 했는데. 믿더라고요.”

“송광구가 무슨 비밀인지는 안 물어봤나요?”

인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철이 다시 입꼬리를 내리며 물었다.

“솔직히 송광구는 돈이 목적이라 크게 개의치 않더라고요. 그리고 일단은 진현미가 저를 유인해서 납치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일부러 속아준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흠- ”

하지만 인혜의 대답에도 주철은 뭔가 입맛이 개운치 않은 듯 안경 너머 눈가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그런데 어차피 송광구, 진현미 잡았으면 됐지. 정 선생님이 어떻게 데리고 온 게 뭐가 중요해요. 안 그래요?”

나연이 다리를 꼬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긴 잡았으면 됐죠 뭐. 그런데 배고픈데 다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우리 아직 제대로 회식 한번 못 했잖아요.”

성진이 나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빙그레 웃었다.

“오- 회식 좋지. 뭐 먹으러 갈까? 여기 주변에 맛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나연이 반색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메뉴를 뭘 고민해요. 회식은 역시 고기지.”

최 반장이 무슨 엄청 진지한 이야기 하듯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럼 반장님이 사시는 거죠?”

나연이 짓궂은 표정으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내. 내가?”

“반장님 너무 당황하시는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저 때문에 모두 고생하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살게요. 소고기로.”

인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소고기. 우리 그럼 정 선생님을 위해 박수 한번 칠까요?”

나연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먼저 박수를 치자.

짝. 짝. 짝. 짝. 짝.

“그런데 갑자기 박수는 왜 치는 거야?”

주철이 얼떨결에 같이 박수를 치며 황당한 얼굴로 옆에 앉은 성진에게 묻자.

짝. 짝. 짝. 짝. 짝.

“그냥 치세요. 고기 먹고 싶으면. 하하하.”

성진이 더 열렬하게 박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덩달아 다른 사람들까지 박수를 치며 인혜를 치켜세웠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아- 씨. 괜히 뽑았어.”

구시렁거리며 미간을 찡그린 채 나연을 바라보면서도 박수를 치고 있는 최 반장의 모습에.

“왜요 재밌는데요.”

채린이 박수를 치며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흘렸다.

항상 끔찍한 사건 이야기로 딱딱하고 심각하기만 했던 원장실에.

이렇게 웃음이 흘러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왜 이러세요. 사람 민망하게.”

인혜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 나갈까요? 그런데 어디로 가죠?”

성진이 벗어놓은 재킷을 챙기며 인혜를 바라봤다.

“여기 병원 뒤쪽에 새로운 집이 하나 생겼는데 거기로 가요. 그럼 먼저 내려가 계실래요? 전 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들만 금방 정리하고 나갈게요.”

현미 사건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과 우편물들이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었다.

“급한 일도 아닌데 같이 가죠 뭐. 천천히 정리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정리할게요.”

최 반장의 말에 쌓인 편지봉투들을 빠르게 훑어보던 인혜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왜요? 뭐 이상한 거 왔어요?”

심상치 않은 인혜의 표정에 성진이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현미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인혜의 굳은 표정만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성진이었다.

“……아니요. 돈 내라는 게 너무 많이 와서.”

잠시 머뭇거리던 인혜가 보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 하긴 카드 명세서 받으면 그런 표정 나오죠.”

성진이 격하게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는데. 그만 갈까요?”

“벌써요? 천천히 하세요. 시간도 많은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나연이 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다 별거 없네요. 그만 가시죠. 배도 고픈데.”

방금 본 우편물을 핸드백에 구겨 넣은 인혜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방의 한 교도소 운동장.

하루 한번 햇볕을 쬘 수 있는 유일한 운동시간.

축구장 반만 한 공간에서라도 자유를 만끽하고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죄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구기(球技) 종목과 산책을 하며 각자의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마치 물과 기름처럼 다른 죄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 벤치에 앉아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은 왜 항상 저러고 있어?”

그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스탠드에 앉아 있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죄수 하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너 저 사람 몰라?”

그러자 동년배로 보이는 죄수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저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

“아- 하긴 너 이감(移監)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구나. 저 사람 의사야.”

남자가 벤치에 앉은 남자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의사? 무슨 의사?”

그러자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놀라 되물었다.

보통 의사 정도면 대부분 돈 많은 변호사를 써서 집행유예를 받거나, 설령 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해도 이렇게 잡범들과 흉악범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교도소에 오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외과 의사인가 정신과 의사인가 그랬다는 것 같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네. 아무튼 가끔 여기서 싸움 나서 어디 찢어지거나 응급 생기면 저 사람이 치료도 해주고 그래.”

“의무관이 있는데 저 사람이 왜 해?”

“그만큼 실력이 죽인다는 거지. 밖에서 엄청 유명한 의사였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여기 왜 있어?”

들을수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죄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사람을 죽였거든.”

남자가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교도소에 있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깔끔하고 정갈한 헤어스타일과 스마트해 보이는 외모.

평범한 체격이지만 자기 관리가 잘 된 듯 군살 없는 몸매.

거기다 가끔씩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과 눈빛은 선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너도 얼굴은 강력인데 사기쳐서 들어왔잖아.”

옆에 있던 죄수가 손가락으로 남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히죽거렸다.

“네 얼굴을 보고 그딴 소리를 해. 그런데 사람을 죽였으면 의료사고로 죽인 건가?”

발끈한 남자가 다시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의사가 감옥에 올 일이면 의료사고밖에 없다 생각했다.

“아니 총으로 어떤 놈 머리를 그냥 날려버렸다는 것 같던데.”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든 남자가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대며 당기는 시늉을 했다.

“대박! 진짜야?”

알수록 놀라운 이야기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그렇게 들었어. 그래서 25년형 받았다는 것 같은데.”

“누굴 죽인 거야? 총까지 구해서 죽일 정도면 백프로 치정(癡情)인데. 부인이 바람이라도 피웠나?”

막장 드라마급 전개에 남자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들 납치한 놈을 죽였다는 것 같은데.”

“진짜?”

또다시 생각지 못한 전개에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워낙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라.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소문이 그래 소문이.”

“납치범을 죽이면 아들은 어떻게 된 건데?”

“나도 모른다니까. 소문이 그렇다고 소문이.”

“그럼 한번 물어보러 가자.”

남자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스탠드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옷을 잡아끌었다.

“그냥 있어. 어차피 가봤자 말해주지도 않을뿐더러. 원래 누구하고 엮여서 자기 이야기하는 사람도 아니야.”

“너도 솔직히 궁금하잖아.”

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남자가 옆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스탠드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리고 저 사람 잘못 건들면 저 교도관들에게 찍혀서 인생 고달파진다.”

다시 남자가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말렸다.

“왜?”

“야. 생각해봐라. 응급터지면 교도관들 다 도와주고, 심지어 교도관들 정신과 상담까지 해주는 사람인데. 비록 우리랑 같은 옷 입고 있지만. 우리랑은 급이 다른 사람이야. 저 사람 곁에 이상한 놈들 가잖아? 바로 교도관들 뛰어온다.”

“그 정도야?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남자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구로 입맛을 다시던 그때.

삐- 삐-

“자- 다 들어갑니다.”

교도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운동시간의 종료를 알렸다.

“아이씨.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저 사람이 이름이 뭐야?”

기회를 놓친 남자가 아쉬운 얼굴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민찬욱.”

벤치에서 일어나는 찬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옆에 있던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

4-5명이 누우면 꽉 들어차는 좁은 교도소 방안.

“진짜 설계 제대로 해서 내 앞으로 그냥 딱 100억이 굴러들어오는 찰나에. 아- 같이 일하던 새끼가 뒤통수를 쳐서 내가 비록 지금 여기에 있지만.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우리나라 증권 바닥은 다 내 발 밑이야.”

“허풍은. 그렇게 따지면 난 강남바닥 다 먹었어.”

빙 둘러앉은 죄수들이 무슨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듯 자기가 밖에서 했던 범죄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방구석 벽에 기댄 찬욱은 그저 두꺼운 외국원서만 읽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도 이런 찬욱의 모습이 익숙한지 크게 개의치 않으며 신나서 자기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형님. 이번에 가석방 심사시지 않습니까?”

그때 신나게 이야기하던 한 젊은 죄수 하나가 찬욱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감방 안에도 나름의 규율과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나이가 아닌 밖에서의 힘이나 권력에 따라 그 순위가 정해졌기에.

보통은 밖에서 주먹으로 힘 꽤나 쓴다는 놈들이 방장을 도맡아 했지만.

이 방은 의외로 찬욱이 자연스럽게 방장을 맡고 있었다.

지적이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거기다 교도관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그였기에.

자연스럽게 그가 방장이 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응.”

잠시 책에서 눈을 뗀 찬욱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 드디어 나가시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꼭 나가실 겁니다. 형님이 가석방 심사 통과 못하시면 여기 있는 놈들 아무도 못 나갑니다.”

설레발 떠는 남자의 말에 찬욱이 옅게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오늘 다른 곳에서 이감 온 놈 한명 들어온다는 데 이야기 들으셨죠? 아이씨 방도 좁아 죽겠는데. 아무튼 들어오면 저희가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

다른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어.”

찬욱이 다시 짧게 대답하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쾅- 쾅-

“신입이다.”

감방문을 두드리는 교도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