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채린이를 노렸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인혜가 불안감에 휩싸인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죠.”
“…….”
주철의 말에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원장실에 흘렀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선 시광을 쫓아왔다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채린이를 기다렸다는 건 좀 억측 같은데요.”
“제가 생각해도 그건 좀.”
“괜히 채린이 겁주지 마세요.”
하지만 곧이어 이어진 나연의 반론에 인혜와 성진까지 동조하며 주철의 의견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겁준다기보다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유시광이 채린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는 건 그냥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야.”
“…….”
한편으론 선뜻 반박할 수 없는 주철의 말에 세 사람의 입술은 다시 굳게 닫혔다.
“후-”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채린이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지그시 이마를 짚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속.
마치 자신을 노리고 있는 미지(未知)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하며 위험한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지금처럼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인혜가 불안해하는 채린이를 안심시켰다.
“그래 채린아. 그리고 우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 걱정하지 마.”
성진이 넓은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인혜의 말에 맞장구쳤다.
“걱정 안 해요.”
하지만 말과 달리 채린이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때.
“여보세요.”
나연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전화인데 그렇게 받으세요?”
하지만 일순간 심각해진 나연의 표정에 성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병원.”
나연이 짧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보였다.
“무슨 병원이요”
“아까 유시광 입원한 병원에 제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했거든요.”
인혜의 말에 나연이 채린이를 슬쩍 바라보며 무거운 표정을 짓자.
“그럼…….”
이미 나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다는 듯 성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죽었대. 방금.”
“…….”
무언(無言)의 불안감이 또다시 원장실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흠-”
채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채린아.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우린 최선을 다 했으니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나연이 채린이의 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솔직히 시광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 충격은 나연의 뒤통수를 때렸지만.
지금은 일단 내색하지 않고 채린이의 놀란 마음을 달래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듯 최선을 다한 거야.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인혜도 가볍게 떨리는 채린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위로했다.
“후- 네. 괜찮아요.”
채린이 긴 한숨을 땅에 토해내며 두 사람의 위로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론 한숨 한 번에 마음속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털어낼 순 없었지만.
코 빼고 혼자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팀원들의 위로나 받으며 폐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죽은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유시광에 대해서 조사는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나연이 최 반장과 성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채린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유시광에 대해 확실히 알아두는 게 중요했다.
“이름 적어놨어요.”
성진이 시광의 이름을 적은 수첩을 흔들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계속 일하는 것 괜찮을까요?”
“그러게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인혜의 말에 성진이 수첩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맞장구를 쳤다.
“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이 두 사람의 걱정에 꽤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당분간 쉬는 게 좋지 않을까? 꼭 이번일 뿐만이 아니라 요즘에 이상한 인간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거 무서우면 아무것도 못 하죠. 그리고 이것보다 더 한 것들도 겪어봤는데요 뭐. 괜찮아요.”
걱정하는 나연의 말에 채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반장님도 채린이 일하는 거 반대시죠.”
나연이 입을 삐쭉 내밀며 최 반장의 등을 떠밀었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 피한다고 꼭 지는 건 아니니까.”
채린이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 반장은 에둘러 자신의 불안함을 말할 뿐이었다.
“네.”
“그런데 오늘 왜 모이라고 한 거야?”
더 이상 채린이의 마음을 돌리는 건 무리라 생각했는지 나연이 성진을 바라보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게…….”
“저번에 회식 제대로 못 했으니까 그냥 같이 밥이나 먹자고.”
최 반장이 성진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미숙에 대한 사건을 E.Y.E.S. 팀에서 해결해 보자고 모인 모임이 한순간 그저 회식으로 바뀌자.
성진과 주철의 당황한 시선이 동시에 최 반장에게로 쏠렸다.
“진짜 그것 때문에 모이자고 하신 거예요?”
채린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최 반장에게 되물었다.
“어. 밥 먹자고.”
“진짜요? 반장님 지금 뭐 숨기시는 거 있죠?”
최 반장의 대답에 나연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취조하듯 묻자.
“내가 숨기긴 뭘 숨길 게 있다고. 뭐 먹을까요?”
최 반장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젓다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이렇게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나연이 마치 진격을 명령하듯 손을 공중으로 쭉 뻗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괜찮은 곳 알아놨는데 그리로 갈까요?”
“OK.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로 갑시다.”
인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 반장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어느 고깃집 앞.
“잘 먹었습니다.”
“반장님 오늘 돈 너무 많이 쓰신 것 아니에요? 무리하신 것 같은데요.”
“무리는 무슨. 퇴직금 미리 정산받죠 뭐. 하하하하.”
인혜의 말에 살짝 취기가 오른 최 반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썰렁한 농담을 늘어놨다.
“야- 그런데 오늘 채린이 좀 달라 보이는데. 진짜 아이돌 같은데.”
성진이 채린이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칭찬을 하자.
“이런 스타일 처음 입어봐서.”
채린이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멋쩍어했다.
“예쁘지? 내가 골라줬어. 내가. 나 잘했지?”
술기운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나연이 채린이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빨리 자기 칭찬을 해달라고 성진에게 칭얼거렸다.
“옷도 예쁘지만 채린이가 스타일이 좋아서 그런 거죠.”
“그럼 난? 나도 한 스타일 하잖아. 나도 이거 산 건데? 나도 아이돌 같지 않아?”
나연이 성진의 대답을 재촉했다.
“전 오늘 술을 많이 마셔서 잘 모르겠어요. 반장님께 여쭤보세요.”
무슨 말을 해도 나연의 후폭풍이 두려운 성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최 반장에게 폭탄을 돌렸다.
“반장님 오늘 저 어때요? 채린이랑 듀엣으로 데뷔해도 괜찮겠죠?”
짝.
“자-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최 반장이 나연의 시선을 피하며 급하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반장님. 대답해주셔야죠. 반장님.”
나연이 최 반장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오늘따라 제대로 주사를 부리던 그때.
“대리 부르신 분.”
구세주처럼 대리기사가 나타나자.
“여기요. 마침 진짜 잘 오셨어요. 자- 자- 빨리 타세요.”
성진이 이때다 싶어 나연을 자동차 뒷좌석에 급하게 태웠다.
“어. 나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도 팀장님 아이돌 같아요. 완전. 됐죠.”
뒤 창문을 내리고 반쯤 풀린 눈으로 소리치는 나연을 다시 차 안으로 밀어 넣은 성진이.
“그럼 조심히 잘 부탁드릴게요.”
대리기사의 손에 돈을 쥐여주며 빨리 가달라고 눈짓했다.
“아까 술 많이 드시는 것 보니까 오늘 말은 안 하셔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나 봐요.”
멀어지는 나연의 차를 보며 인혜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말은 안 하셔도 힘드셨겠죠. 하루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롤러코스터 타듯 이어진 시광의 일들이 내색은 안 했지만 나연에게도 큰 충격인건 분명했다.
“채린이도 오늘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지.”
최 반장이 안쓰럽게 채린이를 바라보며 말하자.
“채린이는 제가 데려다줄게요. 세 분은 어떻게 하실래요?”
인혜가 채린이의 팔짱을 끼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는 뭐 알아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얘나 나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없고. 하하하.”
최 반장이 성진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뵐게요. 가자 채린아.”
“조심히 들어가요. 채린아 잘 가.”
“네.”
채린이 세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하며 인혜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왜 아까 말 안 하셨어요.”
손을 흔들던 성진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뭘?”
“오미숙 씨 사건 이야기요.”
“아까 채린이 표정 봤잖아. 그 얼굴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손을 높이 들고 미소 띤 얼굴로 배웅을 하던 최 반장이 일순간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광의 일로 충격받고 불안해하는 채린이에게 미숙의 사건의 짐까지 지금 짊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얼떨결에 같이 손을 흔들던 주철이 뻘쭘 한 표정으로 슬며시 손을 내리며 물었다.
“원래 우리 방법대로 해야죠.”
최 반장이 금연사탕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
다음 날 경찰서.
“전 정말 나가도 되는 건가요?”
미숙이 놀란 얼굴로 성진에게 되물었다.
“네. 여기 사인하시면 나갈 수 있어요.”
“진짜. 진짜 저 나가도 되는 거죠?”
미숙이 또다시 성진의 대답을 확인하듯 물었다.
“오미숙 씨 핸드폰 통화시간하고 GPS 위치 확인해보니까 사건 발생 시간에 현장에 없었다는 게 증명돼서요. 알리바이가 입증됐어요.”
“흐- 흐”
성진의 말에 미숙이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시고요. 일단은 혐의가 벗겨졌지만 사건 때문에 몇 번 더 경찰에 출석하실 수도 있으니까 전화기 꺼두지 마세요.”
“……네.”
미숙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성진이 미숙의 앞에 핸드폰과 소지품을 돌려주며 손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핸드폰과 소지품을 챙긴 미숙이 연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곤.
“조심히 가세요.”
“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
“저 잠깐만요.”
최 반장이 미숙을 다시 불러 세웠다.
“네?”
갑작스런 최 반장의 말에 미숙이 불안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손 좀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천천히 미숙 쪽으로 걸어간 최 반장이 눈짓으로 손을 가리켰다.
“손이요?”
미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손은 왜…….”
“그냥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여기.”
미숙이 조심스럽게 양쪽 손바닥을 최 반장의 앞에 펴 보였다.
“……네. 됐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푹 쉬세요.”
빠르게 미숙의 손을 훑어본 최 반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