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줄 거요?”
갑작스런 범진의 말에 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뭘…….”
주머니에 찔러 넣은 범진의 손이 왠지 신경 쓰이는 나연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한발 뒤로 물러서며 되물었다.
“이거요.”
“어! 이건.”
주머니에서 빼낸 범진의 손엔 저번에 잃어버린 경찰신분증이 들려있었다.
“팀장님거 맞으시죠.”
“네. 제거 맞아요. 이걸 어디서 찾았어요?”
신분증을 받아든 나연이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편의점 뒤쪽에서요.”
“고마워요.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쓰레기 더미 주변에 있던데요.”
범진이 나연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요? 거기도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찾아줘서 고마워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연이 이내 환한 얼굴로 범진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그냥 경찰서로 보내주거나 채린이 편의점에 맡기면 되는데. 괜히 여기까지 오고 고생했네요.”
나연이 미안할 얼굴로 말했다.
“이런 건 직접 가져다드려야죠.”
“바쁠 텐데 고마워요.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잔 마실래요?”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가봐야죠.”
나연의 말에 범진이 손사래를 쳤다.
“그럼 다음에 채린이랑 셋이서 밥 한번 먹어요.”
“네. 그리고 저번에 주신 복권은 다 꽝이었어요.”
범진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쉽네. 그럼 그거 미안해서라도 더 밥 한번 먹어야겠네요.”
나연이 아쉬운 듯 입을 삐쭉거리다 다시 환한 미소로 말했다.
“네. 그럼 전 이만.”
범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봐요. 아! 연락처 좀 알려줘요, 그때 못 물어봐서.”
나연이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네. 010- XXXX- XXXX”
“그럼 조만간 연락할 테니까 밥 먹어요.”
범진이 불러주는 번호에 빠르게 두 엄지를 움직인 나연이 저장 버튼을 누르며 빙그레 웃었다.
“네.”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줘서 고마워요.”
나연이 경찰신분증을 가볍게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아니에요. 그럼 푹 쉬세요.”
“조심히 가요.”
꾸벅 인사를 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범진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던 나연이 다시 공동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삑.
[공동 현관문이 열립니다.]
카드키를 인터폰에 가져대고 열린 현관문으로 장본 짐들을 들고 들어가려던 나연이.
“어!”
순간 걸음을 멈추며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범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알았지?”
***
다음 날.
진료가 끝난 인혜의 병원.
똑. 똑.
“안녕하세요.”
노크와 함께 원장실 문을 열고 채린이 들어오자.
“어서와.”
“Hi.”
인혜와 나연이 반가운 얼굴로 채린이를 맞았다.
“아직 다 안 오셨네요.”
빈 소파들을 보며 채린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젠 출석 체크가 가능할 만큼 어느새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어. 조금 다 늦으신다고 했어. 홍차, 커피 뭐 줄까?”
인혜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홍차 주세요.”
“피곤해보이네.”
나연이 채린이를 빤히 바라보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조금요. 오늘 손님이 좀 많아서요.”
채린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살짝 지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너무 무리하지 마.”
인혜가 채린이 앞에 홍차를 놓아주며 말했다.
“네. 후- 그런데 뭐 새로운 소식은 없어요?”
입김으로 하얀 연기를 한숨 날린 찻잔을 든 채린이 궁금한 얼굴로 나연을 바라봤다.
“응. 아직까지는. 아이씨. 그런데 이게 오랜만에 사람 집중하게 만드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단서들에 속이 끓고 은근 자존심도 상하는 나연이었다.
“곧 나오겠죠.”
위이이. 위이잉.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여보세요. 네. 그 학회 자료 어제 메일로…….”
인혜가 통화를 위해 핸드폰을 들고 원장실 밖으로 나가자.
“요즘별일 없어?”
나연이 기다렸다는 듯 채린이 쪽으로 몸을 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누가 찾아오거나 하지도 않고?”
“네. 왜 그러세요?”
심상치 않은 나연의 표정에 채린이 덩달아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요즘 그 학생 안 와?”
나연이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누구요?”
“그 있잖아. 사탕.”
“아 김범진 씨요?”
사탕이라는 말에 순간 채린이 눈앞에 범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 요즘 안 와?”
“네. 그때 선물 전해준 후로는 안 왔는데요. 왜요?”
채린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어제 우리 집 앞에 찾아왔더라고.”
잠시 인혜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던 나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집 앞에요? 왜요?”
채린이 의자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이거 준다고.”
“어! 찾으셨네요.”
나연의 손에 들린 경찰신분증에 채린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찾았다기보다 찾은 걸 받은 거지.”
“김범진 씨가 이걸 찾아서 가져왔다고요?”
“어.”
“어디서 찾았대요?”
채린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편의점 뒤 쓰레기더미에서 찾았다는데. 그때 우리 거기도 다 뒤졌는데 없었잖아.”
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네. 그때 다 뒤졌는데 없었죠.”
“그리고 내가 그 후에 최 반장님하고 김 형사 그리고 윤 법의관님이 사건 현장에 있다고 해서 다시 한번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분명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이걸 어떻게 찾아왔을까?”
말을 이어가는 나연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해졌다.
“저희가 미처 못 봤던 것 아닐까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채린이 말에 나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께름칙한 뒷맛에 입맛을 다시며 입꼬리를 내렸다.
“왜요? 뭐가 찜찜하세요?”
“아니 이걸 찾은 게 찜찜한 게 아니라. 이걸 가져다준 게 찜찜해서.”
나연이 신분증을 빤히 바라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네?”
“내가 우리 집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이걸 들고 찾아왔잖아.”
“신분증에는 주소 없죠.”
“어.”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치? 그렇다고 미리 이걸 전해준다고 연락하고 온 것도 아니야. 미리 와있었던 것 같거든.”
나연이 소파에 기대 팔짱을 끼며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 전에 집을 알아보려고 미행이라도 했단 말씀이세요?”
채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촉이 좋아서 누가 미행 붙거나 하면 바로 아는데. 그런 느낌은 없었거든…… 어떻게 안 거지?”
“그때 안 물어보셨어요?”
“일단 찾아준 게 고마워서. 그때는 그런 걸 물어 볼 생각을 못 했어.”
갑자기 잃어버린 신분증을 들고 집 앞에 나타난 범진의 모습에 그 당시에는 놀람과 의심보단 고마운 마음이 더 컸던 나연이었다.
“생각할수록 좀 찜찜하긴 하네요.”
채린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좀 찜찜하지. 그래서 혹시 너한테 찾아가서 우리 집 물어봤나 해서.”
“아니요. 선물 건네준 이후로 한 번도 안 왔어요. 연락도 없었고요.”
고개를 가로젓던 채린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스토커 아닐까요?”
“스토커? 나를? 왜?”
나연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뭐 좋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한번 보고?”
편의점에서 한번 본 게 다인데 스토킹이라니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모르죠.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 지도요.”
“걔가 나를 어디서 지켜봤다는 거야. 난 처음 보는데.”
채린이의 말에 심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나연이.
“이거 반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불안한 얼굴로 채린이를 바라봤다.
자신만 연관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크게 보면 채린이까지 엮인 일이었기에 그냥 넘어가기가 좀 그랬다.
“그럼 지금 당장 찾아가신다고 할걸요?”
최 반장의 성격에 눈에 불을 켜고 바로 범진을 찾아갈 게 뻔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괜히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긴. 그냥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까?”
나연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런저런 가정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니 직접 물어보는 게 더 성격에 맞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에선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지금 한번 해볼게.”
나연이 핸드폰 연락처 버튼에 엄지를 올리던 그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고 계세요.”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던 인혜가 심각한 나연과 채린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 다음에 쇼핑 어디로 갈까 그거 말하고 있었어요. 그것만큼 심각한 주제는 없잖아요.”
일단 둘만의 비밀로 하자는 듯 채린에게 눈으로 사인을 보낸 나연이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심각한 이야기 하셨네요. 그럼 저도 껴주세요. 저도 쇼핑 안 한지 너무 오래됐는데.”
인혜가 나연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씩 웃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셋이서 한번 가요.”
“좋아요.”
인혜가 빈 찻잔을 들고 커피포트 앞으로 걸어가며 눈웃음 지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네.”
나연의 질문에 찻잔에 다시 홍차를 우리던 인혜가 고개를 돌렸다.
“스토커들은 나이 같은 거 안 따지나요?”
“왜요? 누가 팀장님 스토킹해요?”
인혜가 걱정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요. 옛날에 나 좋다고 목매는 연하들의 심리가 궁금해서.”
나연이 범진의 이야기를 슬쩍 돌려 물었다.
“안 따지죠.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은 거니까요.”
“소유요?”
인혜의 말에 나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네. 얼마 전에 저 당한 거 보셨잖아요.”
인혜가 살짝 셔츠 옷깃을 제치며 현미의 광기(狂氣)가 남긴 그날의 희미한 상처를 보여줬다.
“아-”
이미 범진을 스토커로 확정지은 나연의 표정이 인혜의 상처를 보자 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신데요?”
“내가 좀 확실해지면 말할게요. 아직은 좀 긴가민가해서요.”
나연이 심란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스토커들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그리고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우발적인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남에게 알리는 거예요. 그래야 주변에서 같이 경계하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흠-”
인혜의 말에 고민이 깊어지는 나연이었다.
“누가 스토킹하는데요?”
누군가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다 확신한 인혜가 심각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게…….”
잠시 고민하던 나연이 무겁게 입을 열려던 그때.
“안녕하세요.”
성진이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 이야기는 따로 이야기해요. 지금 끝나고 오는 거야?”
나연이 인혜에게 사인을 보내며 말을 돌렸다.
“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세 분 표정이 다.”
성진이 심각한 표정의 세 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여자들만의 이야기를 너무 알면 다쳐. 그런데 반장님하고 윤 법의관님은?”
나연이 성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화장실 들렀다 오신다고.”
“늦어서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성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 반장과 주철이 헐레벌떡 원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누구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모든 소파가 채워지자 나연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목격자요.”
성진이 커피메이커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목격자라면 오미숙 씨 사건 목격자밖에 없잖아요.”
인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목격자는 고사하고 CCTV도 없는 도성이나 시광의 사건이 아니라면 목격자가 있는 사건은 오직 미숙의 살인미수 사건뿐이었다.
“그럼 오미숙 씨 기억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아직 혼수상태라고 하지 않았어요?”
“목격자가 오미숙 씨 말고 한명 더 있어요.”
나연의 말에 최 반장이 테이블 위 바구니에 있던 사탕을 집으며 말했다.
***
다음 날.
똑. 똑.
“네.”
현일이 노크소리에도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매번 듣던 의사나 간호사의 목소리가 아니자 현일의 시선이 천천히 문 쪽으로 돌아갔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흰색 가운에 안경을 쓴 인혜가 환한 미소로 현일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