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그 시각 현실.
잠시 눈을 붙인 주철과 뒷자리에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아까부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나연.
사탕을 오물거리며 범진이 들어간 주상복합 건물 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최 반장까지.
지루하게 이어지는 잠복근무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보내고 있던 그때.
“아까 김범진이 병원에 면회 왔다는 사람 이름이 남궁필 맞죠?”
조용하던 차 안에 나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왜요? 뭐라도 찾았어요?
주철이 감았던 눈을 뜨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김범진이 채린이랑 동갑이죠.”
“20살. 동갑이던데요.”
최 반장이 뒤로 몸을 돌렸다.
“30년 넘게 차이 나는 동창도 있나요?”
나연이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온 노트북 화면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며 입꼬리를 내렸다.
“이 사람이 남궁필이예요?”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을 본 최 반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62세. 남궁필 씨. 김범진이 면회하러 왔다는 동창생이네요.”
“이거 입만 열면 거짓말 이구만.”
최 반장이 입안에 굴리던 사탕을 아작 씹으며 미간을 구겼다.
“확실히 김범진이 오미숙 씨 하고 최현일 씨 보러 온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엄밀히 말하면 김범진이 아니라 이성오죠.”
나연의 말에 안경을 밀어 올리는 주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이성오가 그 습격한 범인이겠네요. 그게 아니면 거기에 올 일이 없잖아요.”
“지금 상황에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죠.”
주철이 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 정도면 바로 잡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나연이 이를 바득 갈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아직은 다 추정이잖아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데 무작정 끌고 갈 수도 없고.”
최 반장이 주상복합 건물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안 잡히는 게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네.”
나연이 답답하고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김 형사 쪽에서는 연락 없죠?”
범진 만큼이나 잠잠한 두창의 상황에 주철이 궁금한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네. 저쪽도 잠잠…….”
최 반장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다 다시 범진의 집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때.
띵-동
“어! 연락 왔어요.”
“연락 왔어요?”
“뭐라고 해요?”
최 반장의 말에 나연과 주철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였다.
“…….”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최 반장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왜요?”
“무슨 문제 생겼대요?”
심상치 않은 최 반장의 표정에 덩달아 두 사람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지금 채린이가 고두창 기억 속에 들어갔대요.”
“어떻게요? 어디서요?”
“채린이 혼자 들어갔대요? 뭐 좀 찾았대요?”
최 반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질문을 쏟아냈다.
“레스토랑 옆 바(Bar)에서 최면 걸어서 들어간 것 같은데. 채린이 혼자 들어갔대요.”
“사람 많은 바(Bar)에서도 가능한가?”
나연이 선뜻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최면은 장소를 따지지는 않아요. 그 환경이 중요하죠. 그런데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고 하지…….”
최 반장이 근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과 의논도 없이 최면을 걸어 두창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게 문제가 아니라.
혹시라도 노출된 장소에서 채린이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채린이는 괜찮대요? 잘하고 있대요?”
나연이 마른 침을 삼키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흠- 다행히 아직까지 별일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이나 정 선생이 아무 생각도 없이 기억 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안 했겠죠.”
최 반장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는 주철이 숨 좀 돌리라는 듯 물병을 건네며 안심시켰다.
“맞아요. 채린이가 잘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어! 어!”
최 반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던 나연이 갑자기 앞 유리창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왜요? 무슨 일인데…….”
나연의 말에 고개를 돌린 최 반장의 눈에 껄렁거리며 주상복합에서 걸어 나오는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숙여요!”
혹시라도 범진에게 들킬까 급하게 고개를 숙인 최 반장이 두 사람을 향해 나지막히 소리쳤다.
“저게 김범진이야 이성오야.”
자동차 창문틀에 눈만 살짝 걸친 나연이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범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들어갔을 때 옷하고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거 보니까 이성오 같은데요.”
주철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범진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캐주얼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두창의 레스토랑에서 봤던 깔끔한 슈트 차림의 범진과는 어딘가 모르게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누구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어느새 핸드폰 동영상으로 범진의 모습을 찍고 있던 최 반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택시 한 대 오는데요.”
나연이 어둠을 뚫고 범진을 향해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가리켰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택시에 오르는 범진을 보며 주철이 눈가를 찡그리자.
“따라가 보면 알겠죠.”
최 반장이 시동버튼을 누르며 범진이 탄 택시를 그림자처럼 쫓아가기 시작했다.
***
두창의 기억 속.
“자- 그럼 또 뭐가 올라왔는지 볼까.”
위스키 한 모금을 가볍게 입에 적신 두창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노트북을 열었다.
“뭘 하려는 거지?”
채린이 두창의 시선 하나 손끝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비밀금고에 숨긴 노트북.
거기다 저렇게 들뜬 표정까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에 괜히 눈가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음-♬♩♩흠- ♩♬-♬ 음-”
콧노래까지 부르며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인 두창의 눈앞에 검은색 바탕에 단순히 ID와 비밀번호만 넣을 수 있는 두 칸이 나타났다.
“어딜 들어가는 거지.”
익숙하게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하는 걸 보니 꽤 자주 들어가는 사이트 같았다.
탁.
두창이 엔터를 치자 마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듯 검은색 화면은 수많은 글자들과 조악하게 모자이크 된 썸네일들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오- 오늘은 새로 올라온 게 많네.”
책상에 발을 올린 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마우스를 배에 올려놓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 두창의 모습이.
젠틀하고 미슐랭 오너셰프라는 프라이드로 똘똘 뭉쳐있던 사람이 맞나 할 정도였다.
“이게 괜찮아 보이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배 위에서 마우스를 몇 번 휘저은 두창이 길게 늘어선 목록 위에 커서를 맞추고 클릭을 하는 순간.
딸깍.
“X친…….”
두창이 보던 화면에 뜬 영상을 본 채린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영상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여기서 현실을 외면한다면 불행을 끝낼 수 없는 법.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쥔 채린이 다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야- 역시 마스터가 올리는 건 퀄리티가 다르네. 퀄리티가.”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힌 그의 눈은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상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채린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조차 없는 것 같았다.
“악마.”
두창을 바라보는 채린이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새어 나왔다.
그때.
♬♩-♩♬♩
“아이씨.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구야.”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리자 두창이 흥이 깨졌다는 듯 인상을 쓰며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여보세요.”
[“준비해뒀어요?”]
짜증난 두창의 목소리만큼이나 핸드폰 스피커폰에서 퉁명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갑작스런 통화에 채린이 긴장했다.
“설마…….”
순간 방금 전 두창이 가게 앞에 숨겨둔 발골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져다 두라는 곳에 두기는 했는데. 그걸로 뭐 하려고요. 뭐 재밌는 계획이라도 있어요?”
통화의 상대를 확인한 두창의 얼굴에 슬며시 짜증이 걷히더니 이내 다시 묘한 설렘이 드리웠다.
[“나야 뭐 마스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마스터?”
통화를 듣는 채린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재밌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두창이 두 손을 비비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나 있으면 다행이게요. 아- 난 그 사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아니 그리고 자기가 가져가지 사람 귀찮게 왜 나를 시켜.”]
“두 사람을 움직이는 다른 한 명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마스터인가 보네.”
채린이 두 사람의 통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원래 나서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럼 마스터 직접 만나는 거예요? 난 마스터 어떤 사람인지 진짜 궁금하던데.”
두창이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인간이 모습을 보이겠어요? 그쪽한테 받아서 지하철 보관함에 넣으라고 하던데요.”]
“아- 하여튼 치밀하다니까.”
[“그런데 그래서 또 우리가 이렇게 유지되는 거잖아요.”]
“하긴. 아! 그리고 지금 사이트 들어가서 보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올리신 거죠?”
두창이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번에 제가 올린 거 죽이죠. 솔직히 마스터가 대부분 하긴 하지만 제거 좋아하는 분들도 꽤 많거든요.”]
“헛.”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에 채린이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치며 분노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또 올려주시는 거 팬이잖아요. 지금 보고 있는데 끝내주는데요. 으흐흐흐.”
두창이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번에 낚은 여자애인데. 오후- 죽이죠?”]
“그러니까요. 지금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두창이 박수까지 치며 수화기 너머 남자를 치켜세웠다.
[“이런 거 올리고 박수까지 받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인정받으니 좋네요. 하하하하.”]
“후-”
더 이상 저 두 사람의 X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고역.
채린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통화로만 하지 말고 한번 술이라도 한잔하죠. 마스터 그놈이야 절대 서로 만나지 말라고 하지만 지가 우리가 따로 만나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술 좋죠. 그런데 전 그쪽 얼굴 아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그래요? 저야 뭐 워낙 알려진 사람이라. 그런데 저도 지금 그쪽 보고 있는데.”
두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벽 한편에 걸린 TV 리모컨을 켜자 가게에 설치된 모든 CCTV 화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가게 문 앞을 찍고 있는 CCTV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저걸로 볼 수 있구나.”
채린이 화면 속 남자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요?”]
수화기 너머의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여기 CCTV로. 그런데 너무 얼굴 가리고 계시네. 얼굴 한 번 보여줘요. 그래야 유대감도 더 생기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
두창의 제안에 잠시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CCTV 속에도 고민하는 듯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 가게 위치에 얼굴까지 팔렸는데. 너무 나만 손해 같은데…….”
[“좋아요. 그럼 일단 이걸로 통성명은 한 겁니다.”]
두창의 말에 남자가 CCTV를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리며 후드를 벗는 순간.
“어! 장도성.”
CCTV 화면 속에 나타난 도성의 모습에 채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