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371화 (371/669)

#371.

놀이공원 내 의무실.

“진짜 죽은 것처럼 있네.”

성진이 신기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범진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꾹꾹 누르자.

“하지마. 그러다 깨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나연이 질겁하며 성진의 팔을 급하게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지금은 절대 못 일어나니까.”

주철이 손으로 범진의 맥박을 확인하며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봐도 진짜 효과 끝내주는데요. 다음에도 기억 속에 들어갈 일 있으면 그냥 계속 이거 쓰면 될 것 같아요.”

성진이 아무리 봐도 신기한지 완전히 기절한 범진의 얼굴 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효과는 끝내주는데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라 다음에도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네. 잘못했으면 여기가 아니라 부검실로 옮겨야 했을지도 모르거든.”

주철이 맥박을 재던 범진의 손목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져 성공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었기에 두번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검실로 바로 갔어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나연이 범진의 얼굴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잡기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며 증거를 모아 법정에 세워도.

지리한 재판 과정 중에서 또다시 파헤쳐지는 사건의 진상(眞相)들에.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들이 도리어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2차 피해를 당하느니.

아니, 사형이 유명무실하게 된 지금 김범진이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 숨 쉬는 걸 지켜보느니.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자는 듯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게 모두가 원하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했을까요?”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범진을 바라보던 채린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정 선생님하고 놀이공원을 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까 표정 보니까 아주 좋아죽던데.”

나연이 아까 범진의 웃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안 좋은지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이런 인간은 그냥 ‘아- 그냥 미친놈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야지. 뭘 분석하고 그러면 안 돼. 그냥 본능적으로 행동하거든.”

성진이 범진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원래 본능적으로 행동하는데 이렇게 머리까지 좋은 인간이 제일 무서운 법이에요.”

최면을 할 수 있게 범진의 침대 옆으로 의자를 옮기던 인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완전히 깨어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사탕을 오물거리던 최 반장이 주철에게 물었다.

“앞으로 한 3-4시간 정도요.”

“그렇게 오래 걸려요?”

“이 상태로 최면이 될까요? 뭐 말귀를 알아먹어야 최면을 걸잖아요.”

주철의 말에 성진과 나연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수면(假睡眠) 상태로 살짝 깨워서 해야죠.”

인혜가 가방에서 챙겨온 주사기를 꺼내며 말했다.

“그게 뭐예요?”

성진이 신기한 얼굴로 작은 약병에 주사기를 꽂는 인혜를 바라봤다.

“마취 깨는 주사요.”

“아- 그럴 수도 있어요?”

“재울 수 있으면 깨울 수도 있어야죠.”

“으- 그런데 어디로 들어가야 할까요.”

인혜가 범진의 팔에 주사기를 찔러 넣는 걸 보며 인상을 구긴 나연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장도성이 죽은 날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은 거기가 모든 사건의 시작이잖아요.”

“이번에는 채린이랑 누가 같이 들어갈래요.”

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 반장이 팀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제가 가야죠.”

성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분은 안 들어가실 거예요?”

최 반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철과 나연을 향했다.

“저도 같이 들어갈게요. 살인 현장도 직접 봐야 할 것 같고.”

주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럼 두 분만 가세요. 전 밖에서 백업할게요.”

나연이 의무실 책상 한편에 펼쳐놓은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순간.

“으- 흠”

인혜가 놓은 주사의 효과가 나타나는지 미동도 없던 범진이 신음을 내며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할까요?”

범진의 상태를 확인한 인혜가 비장한 얼굴로 E.Y.E.S팀을 바라봤다.

“채린아 준비됐어?”

“후- 네.”

최 반장의 말에 채린이 의무실 한편 의자에 자리를 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자.

“흠-”

성진과 주철이 옆의 의자에 자리를 잡으며 살짝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세팅할게요.”

인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연이 의무실 한편에 있던 파티션을 끌고 와 범진이 누워있는 침대와 채린이가 있는 곳을 분리했다.

“시작할게요.”

인혜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들려왔다.

“준비되셨죠.”

채린이 성진 주철과 눈을 맞추자.

“응.”

“준비됐어.”

두 사람이 심호흡을 하며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최 반장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채린이를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기억 속으로 채린이를 들여보내는 건 언제나 불안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네. 다녀올게요.”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 반장과 눈을 맞춘 채린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눈을 뜬 주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본 적이 있는 곳 같은데요.”

낯설지만 또 한편으론 익숙한.

채린이 어두운 밤거리를 반짝이는 눈으로 빠르게 스캔했다.

그때.

“어! 저기 봐요. 저기 그때 우리 회식하러 왔던 식당이잖아요.”

성진이 길 건너편에 보이는 식당 간판을 가리키며 두 사람을 급하게 불렀다.

“그러네. 장도성하고 오미숙 씨 처음 봤던.”

주철도 이제야 어딘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여기지?”

“기억 속 첫 장소가 여기라는 건 이 식당에서부터 장도성을 따라다녔다는 거 아닐까요?”

성진의 말에 채린이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일단 범진의 기억 속에 저 식당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 새끼 이거 여기 어디 숨어서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채린의 말에 성진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장도성을 미행하려고 했다면 가게 쪽에서 보고 있을 것 같은데.”

주철이 가게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장도성 하고 오미숙 씨가 싸웠던 시간이 언제죠?”

“우리가 회식 마무리하고 나갈 때쯤이었으니까. 이제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채린의 말에 성진이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가게 쪽을 바라봤다.

“그럼 빨리 가자.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잠깐 만요. 그런데 갔다가 만약 김범진하고 만나기라도 하면 바로 밖으로 튕겨져 나가잖아요.”

성진이 심각한 얼굴로 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주철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들게 기억 속으로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밖으로 튕겨져 나갈 수는 없었다.

“김범진이 갑자기 최면에서 깨어나거나, 여기서 직접 신체 접촉만 하지 않으면 밖으로 튕겨져 나갈 일은 없으니까. 일단은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가게 쪽으로 가 봐요.”

채린이 걱정하는 성진을 안심시키며 먼저 조심스럽게 횡단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가게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이 일단 주위에 범진이 있는지를 확인 했다.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이게 도대체 어디서 봤기에 이 기억이 머릿속에 있는 거야.”

주철의 말에 성진이 눈가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

쨍그랑.

쿵.

[“아-”]

가게 안에서 요란한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시작된 것 같은데요. 저기 골목 쪽 창문으로 봐요.”

눈가를 찡그린 채린이 먼저 가게와 접한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살짝 열린 가게 창문 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반짝이는 눈으로 안의 상황을 살폈다.

“저 때는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채린이의 왼쪽에 딱 붙어 가게 안을 바라보던 주철이 멀쩡히 숨 쉬며 살아있는 도성을 보자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요. 사람이 한치 앞을 모르니.”

그러자 채린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은 성진도 착잡한 얼굴로 입꼬리를 내렸다.

***

미숙의 자살소동으로 가게 안이 한바탕 난리가 난 뒤.

흥분한 미숙을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 인혜와 나연이 급하게 미숙을 회식하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맞아. 저때 저랬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진이 다시 한번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 저때 밖에 상황이 저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반장님이 위험하니까 나오지 말라고 하셔서요.”

하지만 그 당시 방안에만 있던 채린이에게는 낯선 모습이기만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 돌봐주고 있을 테니까.”]

최 반장이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으며 도성을 안심시켰다.

[“네. 그리고 아까는 정말 감사합니다. 막아주지 않으셨다면 정말…….”]

도성이 방금 전 미숙의 돌발행동을 막아준 최 반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그런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에 여자 친구가 죽으려고 까지 생각한 거예요?” ]

너무나 정중한 도성의 인사에 멋쩍게 미소 짓던 최 반장이 이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제 여자 친구가 우울증이 좀 있어서요. 요즘 집에 안 좋은 일도 좀 있고요.”]

도성이 긴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저 때는 진짜 남자친구인 줄 알았는데.”

성진이 세상 착한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도성을 바라보며 눈가를 찡그리자.

“저런 표정인데 어떻게 안 속아. 다 속지. 하여튼 연기는 배우들 보다 저런 것들이 백배는 더 잘한다니까.”

주철이 성진의 말을 받으며 덩달아 입꼬리를 내렸다.

[“지금 계산해 보니까. 그쪽이 다른 테이블도 잡고 넘어져서 같이 깨진 그릇이 15개. 거기다 테이블 망가진 것까지 하면…… 그냥 30만원만 줘요.”]

급하게 주방에서 걸어 나온 식당 주인이 볼펜으로 대충 끄적거린 영수증을 도성에게 건넸다.

그때.

“그런데 이 장면까지 김범진 기억 속에 있다는 건 이 당시에 어디선가 보고 있었다는 건데. 도대체 어디서 봤던 걸까요?”

시종일관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가게 안 도성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채린이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가게 안을 볼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자신들이 지금 숨어서 보고 있는 이곳뿐.

범진이 이렇게 그 당시 가게 안의 상황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게 안에 몰래카메라라도 설치해 놓은 거 아니야?”

성진이 채린의 말에 두 눈을 더 크게 뜨고 가게 안을 빠르게 살피던 그때.

[“네. 잠시만요. 어! 지갑이. 지갑이 어디 갔지.”]

가게 주인이 건넨 영수증을 받아들고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도성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밖에서 가게 안의 상황을 살피던 세 사람의 시선이 미처 닫지 않던 벽 쪽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20대로 보이는 학생 한 명이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 여기. 아까 넘어지시면서.”]

공손한 두 손으로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도성에게 지갑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도성이 남자가 건넨 지갑을 받아들며 환하게 미소 짓던 그 순간.

“어! 어! 읍-”

“저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반대로 아연실색하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성에게 지갑을 건넨.

식당 한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학생이 바로.

범진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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