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그 시각 관찰실.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채린이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범진의 모습에 다급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들어가면 일이 꼬일 것 같아서 반장님이 안 부르신 것 같아.”
밖으로 뛰어나간 최 반장의 뜻을 한 번에 알아챈 인혜가 심란한 표정으로 유리벽 너머 범진의 상태를 살폈다.
“저러다 죽지는 않겠죠?”
“머리 좀 깨진 거 가지고 뭐. 유리에 부딪히면서 살짝 찢어진 거뿐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채린의 말에 주철이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피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은데요.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붉은 가면을 쓴 것처럼 어느새 빨갛게 물든 범진의 얼굴에 채린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저 정도로 절대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약하네.”
걱정하는 채린이를 다시 안심시킨 주철이 살짝 금이 간 유리벽을 이리저리 살피며 미간을 찡그렸다.
“깨지지는 않겠죠?”
인혜가 거미줄처럼 실금이 간 유리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내렸다.
“당장은 괜찮겠지만. 반장님 오시면 일단 다른 취조실로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유리벽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던 주철이 손을 털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런 걸까요?”
범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채린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인혜를 바라봤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완벽할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자포자기. 뭐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서 저런 극단적인 자해로 나타나는 거겠지.”
“복잡하네.”
인혜의 말을 듣던 주철이 혀를 찼다.
“흠- 그냥 쉽게 말해서 마지막 발악 같은 거죠. 발악.”
인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
“발악……”
채린이 인혜의 말을 곱씹던 그 순간.
“쟤 뭐하는 거야.”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문손잡이 사이에 의자를 끼우는 범진의 모습에 주철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러면 문 못 열잖아요.”
“반장님 못 들어오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채린과 인혜가 범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 X랄을 하네. 저런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인혜의 말처럼 마지막 발악같은 범진의 행동에 주철이 미간을 찡그리며.
“아무래도 문 뜯어야 할 것 같으니까. 반장님께 말씀드리면서 다른 형사들 좀 불러올게요.”
주철이 관찰실 밖으로 나갔다.
“진짜 답도 없네.”
의자로 문을 단단히 막고 이젠 유리벽 앞에 선 범진을 바라보며 인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생각일까요?”
“말했잖아. 발악이라고. 일단 지금만 피해보자는 생각인건지.”
“저러면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거잖아요.”
채린이 의자로 막아놓은 문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빠지면 이게 마비가 되거든.”
인혜가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데 눈빛이…….”
자신의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마치 유리벽 너머 자신과 눈을 맞추는 것 같은 범진의 모습에 채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성의 끈을 놓고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범진의 눈동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너무나 차가워 보였다.
“그런데 이거 저쪽에서 안 보이는 거 맞지?”
유리벽 앞에서 떠나지 못하는 범진의 모습에 어느새 인혜도 살짝 불안한 얼굴로 채린이를 바라봤다.
“네. 저쪽에서는 그냥 거울로 보이잖아요.”
“나도 알지. 그런데 꼭 이쪽 쳐다보는 것처럼 보고 있잖아.”
마치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범진의 행동에 인혜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머리 찢어진 거 보는 거 같은데요.”
빨갛게 물든 얼굴을 소매로 대충 쓱쓱 닦은 범진이.
“티셔츠 찢어서 붕대처럼 하려나보네.”
입고 있던 티셔츠 아래를 쭉 찢어 붕대처럼 만들더니 찢어진 이마에 대충 둘러맸다.
“이제 뭘 할까요?”
채린이 불안감과 궁금함이 뒤섞인 얼굴로 범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버티기 아닐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다시 자리로 가는데요.”
한참을 유리벽 앞에 서 있다가 다시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범진의 모습에 채린이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기도 지쳤겠지. 이제 어떻게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다른 의자를 집어 자기 쪽으로 당겨 앉으려는 범진의 모습에 인혜도 구겼던 인상을 조금씩 펴던 그때.
갑자기 손에 쥔 의자를 금이 간 유리벽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지는 범진의 모습에 채린이 외비명을 질렀다.
“아!”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린 유리벽 뒤에 서 있던 채린과 인혜가 관찰실 안으로 들어온 유리파편과 의자를 피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히히. 히히히히.”
살기(殺氣)와 광기(狂氣)로 뒤범벅된 얼굴의 범진이 미친 듯이 웃으며 깨친 유리벽을 훌쩍 뛰어넘어 관찰실로 들어왔다.
“역시 둘 다 여기 있었네.”
그리고 좌우에 쓰러져있는 채린과 인혜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
“반장님.”
“여긴 왜? 무슨 일 있어요?”
의무실에서 붕대와 연고를 받아 나오던 최 반장이 문 앞에서 마주친 주철을 보자 반가움보단 불길함에 미간을 구겼다.
“김범진이 장난을 좀 치네요.”
주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장난이요?”
복도를 걷던 최 반장의 걸음이 멈췄다.
“취조실 못 들어오게 의자로 문을 막았어요.”
“이 새끼가 진짜.”
주철의 말을 들은 최 반장의 걸음이 빨라졌다.
“밖에서 쉽게 안 열려서 문을 뜯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형사들 좀 불러가야 할 것 같아요.”
“채린이하고 정 선생은 아직 관찰실에 있죠?”
“네.”
“아까 의무실 가기 전에 둘 다 그만 돌아가라고 하는 건데.”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에 최 반장이 손에 쥔 붕대를 힘껏 움켜쥐며 이제 뛰어가듯 복도를 달리던 그 순간.
쨍그랑-
메아리 울리듯 희미하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뭐 깨지는 소리 같은데요.”
아래층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에 급하게 걸음을 멈춘 최 반장과 주철이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설마…….”
불현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생각에 주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아이씨. 유리벽!”
최 반장의 질문에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주철이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채린아 피해!”
인혜가 반대편에 쓰러진 채린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있는 줄 알았어.”
범진이 쓰러진 채린이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지금까지 기억 속에서 수많은 범죄자들을 경험하면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심장을 파고드는 살기에 채린은 온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채린 네가 왜 여기 있어.”
범진이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맨 손으로 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런 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건가?”
칼날 같은 유리를 잡은 손엔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범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채린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채린아 도망가!”
뒤에서 달려든 인혜가 범진을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헛-”
그러자 콧방귀를 뀐 범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인혜를 노려보다.
“정 선생님은 내가 조금 이따 놀아줄게요. 그쪽하고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
퍽!
사정없이 팔꿈치로 인혜의 옆구리를 때렸다.
윽!
범진의 일격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인혜가 옆구리를 잡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선생님.”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채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범진에게 달려들려 하자.
“워- 워-”
범진이 붉게 물든 유리조각을 쓰러진 인혜의 목 앞에 들이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선생 죽는 거 보고 싶어?”
“후- 후-.”
어쩔 수 없이 멈춰선 채린이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솔직히 나도 죽이기는 아까워. 꽤 마음에 들었던 여자거든.”
범진이 쓰러져 신음하는 인혜의 뺨을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채린이 주먹을 말아 쥐며 이를 바득 갈았다.
“오- 눈에 힘 좀 주는데. 히히히. 왜? 나도 그때 편의점 그놈처럼 업어치기로 넘기려고?”
범진이 빈정거리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당장 정 선생님은 풀어줘.”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채린이 범진을 똑바로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유리벽 앞에 서있던 범진과 눈을 맞출 때부터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 너머에서 범진이 찾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걸.
“꼭 뭐 찾았다기 보다. 그냥 네가 눈에 들어온 거야.”
범진이 채린이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에 흘리더니.
“그런데 확실히 정 선생보다는 네가 더 재밌을 것 같긴 해.”
퍽!
쓰러진 인혜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윽!”
“하지 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은 인혜를 보며 채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 그 눈빛 좋아. 그런데 난 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지?”
범진이 이번엔 인혜의 얼굴을 향해 다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리던 순간.
“아!”
채린이 몸을 날리며 범진에게 달려들었다.
“흐흐흐.”
하지만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게 가볍게 채린이를 피한 범진이.
중심을 잃은 채린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가볍게 바닥에 쓰러트렸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채린이 미처 아파할 새도 없이 다시 재빨리 몸을 돌려 범진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난 예쁜 얼굴에 흠집 나는 거 보고 싶지 않은데.”
범진이 든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채린의 뺨을 겨눴다.
“…….”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겨누는 유리조각 보다 채린이를 더 당황스럽게 만든 건.
편의점에서 유시광에게 힘없이 넘어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가볍게 바닥에 넘겨 제압하는 범진의 모습이었다.
“왜? 편의점에서 나가떨어지던 샌님이 아니라 놀랐어? 나 이래 봬도 주짓수에 유도에 운동 좀 한 사람이야. 원래 잘 도망 다니려면 체력관리는 필수거든. 히히히.”
채린이의 놀란 눈빛을 읽은 듯 범진이 거들먹거리며 유리조각으로 채린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
“그때는 당연히 김범진이었으니까 그렇게 행동을 한 거지. 이렇게들 순진해서야. 히히히.”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없는데. 그냥 네가 여기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을 뿐이야. 아까 화장실 다녀오면서 얼핏 봤거든.”
“X소리 하지 말고.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그냥 재밌잖아. 하하하하.”
“…….”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은 범진의 광기에 채린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난리가 났는데도 경찰 한 놈이 안 오네. 이래서 우리나라 경찰이 문제라는 거야. 항상 늦어. 항상”
범진이 채린의 목에 유리조각을 들이민 채 슬쩍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내리던 그때.
“당장 그거 내려놔!”
호랑이 같은 포효소리가 범진의 뒤에서 들렸다.
“오- 드디어 등장.”
범진이 재빨리 한쪽 팔로 채린이를 감싸 안아 유리조각을 목에 가져대며 환하게 웃자.
“뒤지기 싫으면 당장 그 손 치워.”
눈에서 불이 이글거리는 최 반장이 범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