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서울의 야경(夜景)이 한눈에 보이는 백화점 옥상.
하얀 김이 올라오는 고급 찻잔을 든 명원과 미성이 아무 말 없이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어때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뗀 명원이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미성이 불편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 영업시간 중 백화점 영업이 끝난 뒤 비서실로 오라는 원성의 전화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명원과 이렇게 단둘이, 그것도 백화점 옥상에서 야경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자니.
온 몸을 감싼 긴장감과 불안함에 찻잔을 든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요즘 일은 어때요? 힘들죠?”
명원이 입으로 가져갔던 찻잔을 떼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힘들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난 항상 우리 직원들이 최우선인 거 잘 알죠?”
“……네.”
명원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미성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기 경치 좋죠.”
“네.”
“밤에 보면 더 예쁜 것 같아요.”
명원이 감격에 찬 얼굴로 야경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미성은 그저 야경이나 보여주려고 명원이 옥상에 차 까지 미리 세팅까지 해두고 자신을 이곳에 부르지 않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저 그런데 하실 말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야경(夜景)이 왜 예뻐 보이는 줄 알아요?”
명원이 미성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네?”
갑작스런 질문에 미성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아냐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미성이 굳은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어둠이 있어서 그래요.”
명원이 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
뜬금없는 소리에 미성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닫았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더 예쁘게 보이는 거예요. 낮에 보면 이런 느낌 안 나잖아요.”
“……네.”
일단 명원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한 미성이 다시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 백화점에서 빛나야 하는 사람들은 고객들이에요.”
“…….”
“그러려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어둠이 되어야겠죠. 그렇죠?”
하늘을 올려다보던 명원이 고개를 돌려 미성을 빤히 바라봤다.
“……네.”
“그런데 최 점장은 이젠 그 어둠이 되기 싫은가 봐요.”
부드럽던 명원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변하자.
이젠 더 이상 야경소리나 들으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생각한 미성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찻잔을 옥상 난간에 올려놓으며 힘주어 말했다.
“말해 봐요.”
“저 그만두겠습니다.”
미성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사표를 꺼내 명원에게 건넸다.
“진짜 그만두려고요.”
명원이 받아든 사표를 빤히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거.”
미성이 가방 안에서 또 다른 두꺼운 봉투를 꺼내 명원에게 건넸다.
“음-”
명원이 손가락으로 봉투를 살짝 열자 두둑한 수표 뭉치가 들어있었다.
“부족한 돈은 조만간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서 꼭 갚겠습니다.”
미성이 명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꼭 이래야 하나요?”
명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사표 봉투와 돈 봉투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방금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고객 분들을 위해서라면 전 기꺼이 어둠이 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
“그런데 대표님이 말씀하신 어둠은 제가 생각한 그런 어둠이 아닙니다.”
미성이 명원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난 최 점장이 내 뜻을 잘 이해해서 이 돈도 받았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명원이 두툼한 돈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성의 고개가 다시 땅을 향했다.
“실망이네요. 이렇게 신의(信義)를 쉽게 저버릴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명원이 입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난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겠어요? 많은 걸 포기해야 할 텐데.”
명원이 미성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구겼다.
“네.”
미성이 다시 한번 힘주어 대답했다.
“단호하네요. 그럼 결정을 바꿀 마음은 없다고 생각하면 되나요?”
“네.”
“아쉽네요. 꽤 오래 같이 일하게 될 줄 알았는데…….”
명원이 사표와 돈 봉투를 재킷 안에 찔러 넣으며 살짝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걱정하실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마음을 놓아라…… 꼭 무슨 협박처럼 들리네요.”
미성의 말에 명원의 눈가가 구겨졌다.
“아닙니다. 제 뜻은 그런 게 아니라…….”
“알아요. 최 점장이 입 무겁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 뽑았던 거고.”
명원이 당황한 미성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미성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 매장 직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이번 일로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다 식었네. 점장 한명 그만뒀다고 매장 직원들에게 피해갈게 있을까요?”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입에 가져댔다 뗀 명원이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차 마시고 헤어지죠. 원래 이별은 쿨하게 해야 멋진 거니까.”
명원이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자.
“네.”
미성이 옥상 난간에 올려놨던 찻잔을 다시 집어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잘 마셨습니다.”
“이 자리가 많이 불편한가 보네요. 차를 그렇게 빨리 마시고.”
급하게 찻잔을 다시 옥상 난간에 내려놓은 미성을 보며 명원이 히죽 웃었다.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성이 명원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나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옥상을 걸어가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원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바닥에 쏟아 부으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하- 차가 다 식었잖아. 짜증나게.”
***
“왜 다 갑자기 정비 중이야.”
엘리베이터 앞에선 미성이 [정비 중]이라 적힌 엘리베이터 안내표지판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마지막까지 백화점 정 떼게 하려는 거야 뭐야.”
방금 전 10층에서 명원을 만나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게 기껏해야 30분.
그런데 그 사이에 모든 엘리베이터가 정비 중 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밤에 운동하게 생겼네.”
하지만 또 한편으론 항상 백화점 폐점 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정비를 수시로 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어쩔 수 없이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철컹.
그리고 한참을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 위태로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다.
“아- 다리 아파.”
당겨오는 종아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언제 내려가.”
이제 겨우 12층.
까마득한 계단 아래를 보며 미성이 입꼬리를 내리던 그때.
“최미성 씨.”
갑자기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같이 가요. 엘리베이터 점검 중이라 이리로 내려가는 거죠?”
저절로 돌아간 시선의 끝에 명원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네.”
방금 사표를 내고 왔는데 이렇게 명원과 같이 내려갈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라도 뛰어 내려갈걸. 이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마지막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 급하게 따라왔어요.”
“아닙니다.”
아까는 또 쿨하게 이별해야 멋이라더니.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명원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쉽게 사표를 받아줄 거로 생각지 못했는데.
이렇게 작별 인사까지 해주러 뛰어 내려왔다는 걸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죠. 마지막인데.”
“괜찮은데…….”
“잘 가요. 수고했어요.”
명원이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네. 그동안……”
미성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던 그때.
퍽.
명원의 손이 계단을 등지고 서 있던 미성의 어깨를 힘껏 밀었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한번 붕 뜬 미성의 시선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서늘한 미소를 띤 명원의 입가에 꽂혔다.
그리고.
쿵. 텅. 텅.
계단 위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참을 굴러떨어졌다.
쿵.
마지막 계단 아래에서 쓰러진 미성이 신음 조차 못 한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쓰러진 미성을 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명원이.
“으-”
작은 신음을 토해내는 미성을 보자.
“아씨 안 죽었네. 그냥 옥상에서 밀어버릴 걸 그랬나.”
허리를 숙여 괴로워하는 미성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때.
“대표님.”
옥상 한편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다 뒤따라 내려오던 원성이 바닥에 쓰러진 미성과 명원을 번갈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으- 으-”
“어중간하게 숨 붙어 있으면 골치 아픈데.”
신음을 토해내는 미성을 발로 툭툭 건드리던 명원이 짜증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왜…….”
“아니 차 예절을 모르잖아. 차 예절을. 그렇게 차를 빨리 마시는 게 어디 있어. 경박스럽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차가 식었어. 그거 얼마나 짜증나는 건지 알지.”
“…….”
명원의 말에 원성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깟 거 주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도 짜증나고.”
품속에서 꺼낸 미성이 건넨 사표와 돈 봉투를 흔들며 명원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래도 평소 대표님답지 않게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너 지금 나 가르치냐?”
명원이 주먹을 말아 쥐며 원성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럴 리가요. 전 대표님께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 죄송합니다.”
원성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할 시간에 빨리 마무리나 해.”
명원이 귀찮다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하던 대로 해.”
“약을 안 하던 사람이라…….”
원성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자.
“우울증 및 스트레스를 못 이겨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뭐 이렇게 대충 짜서 해.
“그런데 백화점에서 이렇게 돼 버리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그 방법을 찾는 게 네가 할 일이잖아. 그리고 엘리베이터 점검 중으로 돌려서 얘 이쪽으로 몰은 건 너잖아!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명원이 원성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슬쩍 넘기는 명원의 모습에 원성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치워.”
“네.”
주머니에서 꺼낸 장갑을 끼며 목에 건 사원증을 빼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은 원성이.
쓰러진 미성을 옮기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순간.
“사. 살……으- 사,”
살짝 정신을 차린 미성이 마지막 힘을 내 살려 달라 소리치자.
“비켜.”
명원이 원성을 밀치며 쓰러진 미성에게 다가가.
“그냥 좀 조용히 뒤지라고!”
퍽.
바닥에 쓰러진 미성을 다시 발로 걷어차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텅. 텅. 텅. 텅.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미성을 보자.
명원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후- 이제 좀 조용하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미성을 광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