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464화 (464/669)

#464.

한 낡은 여인숙.

“아-”

누렇게 된 벽에 등을 기댄 찬욱이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젠장.”

낮게 짜증을 내뱉은 찬욱의 손이 뒤통수로 향했다.

손에 묻은 피.

“X발.”

붉은 피를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찬욱이 옆에 있던 빈 맥주캔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깡-

[“야! 조용히 안 해!”]

그러자 종잇장처럼 얇은 벽 너머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후- 후-”

작은 벽 하나를 두고 한 방이나 다름없는 옆방을 죽일 듯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찬욱이.

“X발.”

터져 버릴 것 같은 분노를 나지막이 중얼거린 욕으로 애써 억누르며 옆에 나뒹굴던 거울을 집어 들었다.

빨간 펜으로 그어 놓은 것 같은 이마의 찢긴 상처.

충혈된 두 눈.

땅을 파고 들어갈 듯 깊게 내려온 다크서클.

핏기없이 부르트고 다 갈라진 입술.

푸석하고 생기 없는 초췌한 피부까지.

작은 희망조차 꿈꾸지 않는 사람의 몰골이었지만.

눈빛만은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후-”

욱신거리는 뒤통수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 찬욱이 피가 흐르는 머리를 옆에 있던 휴지로 대충 닦았다.

“젠장.”

절호의 기회를 놓친 안타까움과 분함에 손에 쥔 피 묻은 휴지를 힘껏 움켜쥔 찬욱이 이를 바득 갈았다.

쉽게 병원도 갈 수 없는 상황.

작은 선반 서랍 안에 있던 반창고와 연고를 집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찬욱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이-

비명 소리 같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찬욱이 잠시 주위를 살피다 이내 빠른 걸음으로 샤워실을 향했다.

잠시 후.

[샤워실] 앞에 선 찬욱이 불투명 유리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에 입꼬리가 내려갔다.

‘설마 또 그 인간인가.’

끼이잉- 철컥.

“아- 개운하다.”

귀에 거슬리는 낡은 샤워실 문소리보다 더 귀에 거슬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찬욱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역시 그놈이었다.

초면에 반말을 찍찍 해대고 주제넘게 오지랖을 떨던.

저번에 샤워실에서 만났던 그 인간이었다.

“안녕하세요.”

낡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모습에도 굳어 있는 찬욱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무슨 또 기분이 안 좋으신 일이 있으신가.”

수건을 목에 건 남자가 찬욱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

“피비린내 나는 것 보니까 오늘도 도살장에서 일하고 왔나 봐.”

“후-”

기분 나쁘게 코를 킁킁거리며 위아래로 자신을 살핀 남자가 슬그머니 또 말을 놓자 찬욱이 불쾌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하다 다쳤어요? 아니면 싸웠나?”

남자가 찬욱의 이마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

“나랑 말하기 싫어요?”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이요?”

대답 대신 던진 갑작스런 찬욱의 질문에 남자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서로 통성명 정도는 해야죠.”

“이런 곳에서 살면서 서로 통성명은 무슨. 그냥 편하게 김 씨라고 불러요.”

남자가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슬쩍 한 발을 빼자.

“훗.”

찬욱이 헛웃음을 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치고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남의 사생활은 궁금해해도 정작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이곳에 있던 짧은 기간 동안 깨달은 찬욱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름도 안 알려주면서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서.”

“그거야 여긴 원래 다 뜨내기손님들이라 언제 바람같이 사라질지 모르니까 굳이 이름까지 서로 알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쪽이나 나나 이곳에 꽤 오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서로 통성명이나 하죠. 그리고 이왕이면 나이도 까죠. 내가 보기에 그쪽보단 내가 형님인 것 같은데.”

찬욱이 남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이는 무슨. 그리고 그냥 김 씨라고 부르라니까. 흠- 아무튼 그럼 씻고 가요.”

이름을 알려주기도 그렇다고 나이를 까서 찬욱을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남자가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자.

“훗.”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찬욱이 가소롭단 얼굴로 콧방귀를 뀌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때가 낀 뿌연 거울 앞에 선 찬욱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리고 낡은 셔츠를 벗어 샤워실 안 작은 선반 위에 올리곤, 바지를 벗으려고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려고 손을 찔러 넣던 순간.

손에 쥐어지는 낯선 종이에 찬욱이 멈칫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종이.

“흠-”

찬욱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바지 주머니 속에 있던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쪽지에 찬욱이 이를 바득 갈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젠장.”

***

“내가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어?”

조수석에 앉은 최 반장이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민찬욱 집 관리해주고 여러 가지 세금이나 이런 문제 챙겨 주던 사람은 민찬욱의 친구더라고요.”

앞에 보이는 빨간 신호에 천천히 차를 멈춘 성진이 고개를 돌렸다.

찬욱의 집에 들렀다 가지고 온 공과금 우편물들을 토대로 성진에게 찬욱의 뒤를 봐주던 사람을 알아보라고 시킨 최 반장이었다.

“친구?”

창밖을 바라보던 최 반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네. 같은 의대 동기에 같은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신경정신과 의사예요.”

“이름이 뭔데?”

“진성준이요.”

성진이 바뀐 신호에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진성준? 처음 듣는 이름인데.”

과거 찬욱의 사건을 맡았을 때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에 최 반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굉장히 친한 사이 같던데요.”

“그래?”

“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감옥에 간 친구 집 관리까지 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도 노는 사람도 아닌 대학병원 교수가요.”

“뭐 특별한 건 없어?”

“그런 사람이 특별한 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 밟은 의사던데요. 그리고 정신과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라 아마 정 선생님도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같은 학교 출신이고요.”

“나중에 정 선생한테 한번 물어 봐. 어떤 사람인지.”

“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정 선생님이 민찬욱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같은 의대 출신이잖아요.”

“알 수도 있겠지.”

성진의 말에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다는 소리 한 번도 안 했을까요?”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잖아. 둘이 나이 차도 꽤 나고.”

“한번 물어볼까요?”

“뭘?”

“혹시 민찬욱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냐고요? 또 모르잖아요 과거에 엄청 가깝던 사이 일지도요.”

“그렇게 가까운 사이면 진작 말했겠지.”

최 반장이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굳이 민찬욱하고 친하다는 걸 숨길 이유도 없긴 하네요.”

성진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만나 봤어?”

최 반장이 금연 사탕을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연락은 해봤는데요. 요즘 진료가 바빠서 쉽게 시간 내기가 힘들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약속 잡아서 이것저것 좀 물어봐. 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최 반장이 사탕을 오물거리며 성진을 바라봤다.

“네. 안 그래도 계속 바쁘다고 하면 다음 주쯤에 그냥 병원에 한번 찾아가 보려고요.”

“그런데 민찬욱 가석방된 건 알아?”

“전화 통화 할 때 자기가 먼저 말하던데요. 혹시 민찬욱 찾거나 연락 오면 꼭 알려 달라고요.”

성진이 살짝 고개를 돌려 최 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 친구 말고 민찬욱이 연락할 만한 곳은 알아봤어?”

“알아보긴 했는데요. 그 진성준이라는 친구 외에는 딱히 없어 연락할 곳도 없는 것 같아요. 부모님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고. 반장님도 아시겠지만 부인은 과거 그 사건 이후에 이미 그래서…….”

성진이 침통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세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을 허망하게 잃어 버리고.

촉망받던 의사이자 사랑하던 남편은 한순간에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자.

모든 삶의 희망을 놓아 버리고 먼저 떠나 버린 찬욱의 부인이었다.

“일단 더 갈 만한 곳이 있나 알아볼게요.”

“후- 그래.”

최 반장이 착잡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댁으로 가실 거죠?”

“경찰서로 가.”

“좀 쉬세요. 반장님 안 계셔도 다 굴러가요.”

성진이 요즘 들어 더 무리하는 최 반장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잔말 말고 경찰서로 가.”

최 반장은 느긋하게 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럼 식사라도 하고 들어가세요. 오늘도 새벽부터 일 터져서 통 못 드셨잖아요.”

“채린이한테나 가 볼까?”

최 반장이 사탕을 오물거리며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자.

“뜬금없이 채린이한테는 왜 가세요. 그냥 식사나 하러 가세요. 그리고 지금 채린이 알바 할 시간도 아니잖아요.”

“오늘 저녁 알바라고 했어.”

성진의 핀잔에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주 채린이 스케줄을 꾀고 계십니다.”

“시끄러. 채린이한테나 가.”

“식사는 안 하세요?”

최 반장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성진이 채린의 편의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거기서 대충 때우지 뭐.”

“채린이에 대한 외사랑은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성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최 반장을 바라보자.

“시끄럽고 도착하면 깨워.”

시선을 피하려고 슬쩍 고개를 돌린 최 반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

“하암-”

채린이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가게 유리 너머 텅 빈 거리를 바라보다.

“사람도 없고, 시간도 안 가고. 아- 지루하다. 지루해. 후-”

거북이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벽에 걸린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그때.

딩-동.

“어서 오세요.”

편의점 문 열리는 소리에 인사와 함께 고개가 저절로 문 쪽으로 돌아갔다.

“안녕.”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로 가게로 들어오는 사람.

“어! 안녕하세요.”

고윤이었다.

“집에 가는데 안에 있는 게 보여서.”

“네. 오늘도 야간 근무라.”

“요즘 야간 근무가 많네.”

“네 뭐 어찌하다 보니. 지금 집에 가는 길이세요?”

“응.”

“요즘 바쁘시죠?”

“좀 정신없기는 하네.”

고윤이 양손 가득한 쇼핑백을 계산대 앞에 내려놓으며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쇼핑몰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었던 것 같아.”

고윤이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때.

“손 다치셨어요?”

이곳저곳 반창고를 붙인 고윤의 손을 보며 채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 이거. 소포 포장하다 살짝 베었어. 내가 좀 덤벙대는 게 있어서.”

고윤이 반창고 붙인 손을 채린의 앞에 흔들며 빙그레 웃던 그때.

띵- 동

다시 울리는 편의점 문 열리는 소리에.

“어서 오세요.”

채린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어! 어쩐 일이세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최 반장과 성진의 모습에 놀라 되물었다.

“어쩐 일은 밥 먹으러 왔지.”

“그건 핑계신 거 알지?”

최 반장의 어색한 변명에 성진이 채린이를 향해 윙크를 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시끄러. 손님 계셨네. 먼저 일 봐.”

성진에게 핀잔을 준 최 반장이 계산대 앞에 있는 고윤을 보며 채린에게 일하라고 손짓을 하고 자리를 피해 주려던 순간.

“누구셔?”

고윤이 궁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채린에게 물었다.

“아- 저희 삼촌이랑. 삼촌 직장 동료 분이요.”

채린이 살짝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을 소개하자.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고윤입니다.”

최 반장 앞으로 걸어간 고윤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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