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편의점에 사정이 좀 생겨서 부득이하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서요.”
채린이 편의점 파라솔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던 남자 셋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방금 전 일단은 누가 장난으로 음료 냉장고에 칼을 넣어놓고 간 것 같다고 칼을 발견한 남자에게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남자가 음료 냉장고에서 칼을 찾은 이후부터 정상적인 영업은 불가능하다 판단한 최 반장의 결정이었다.
“할 수 없죠 뭐.”
“다른 곳에 가서 먹자.”
남자들이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들러주세요.”
채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남은 맥주를 대충 봉지에 주워 담아 비틀거리며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남자들을 바라보던 채린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딩- 동
“후-”
“다 보냈어?”
최 반장이 라텍스 장갑 낀 손으로 고윤이 놓고 간 스티로폼 박스를 계산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으며 말했다.
“네.”
“여기 사장한테는 내가 방금 전화했어.”
편의점 사장에게는 강력 사건 용의자가 편의점에 들러서 CCTV 확인 및 지문 감식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사를 위해 야간영업을 못 할 것 같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든 최 반장이었다.
“네. 다른 말은 안 해요?”
채린이 편의점 문에 [CLOSE] 안내문을 걸며 말했다.
“놀라지 뭐. 너한테 별일 없냐고 하고.”
“네.”
“그래도 너 걱정부터 하는 것 보니까 내가 더 고맙더라.”
“사장님이 좋으세요. CCTV 확인하실 거죠?”
“어. CCTV는 어디에 있어?”
“이리로 들어오세요.”
채린이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간 최 반장의 눈에 가장 먼저 고윤이 찌그러트린 선반이 보였다.
“이게 김고윤이 한 거라고.”
찌그러진 선반을 손으로 쥐어본 최 반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네.”
“네 말처럼 진짜 이거 뭐 한 방이면 뚫리겠네.”
선반에서 눈을 돌린 최 반장이 얇은 창고 문을 툭툭 두드리며 입꼬리를 내렸다.
“윤 법의관님은 언제 오신대요?”
채린이 CCTV 기계를 만지며 물었다.
“거의 다 도착했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최 반장이 창고 안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김 형사님은 지금 잠복팀하고 같이 김고윤 쫓고 계신 거죠?”
“어.”
“아직 연락 없어요?”
“후- 응.”
잠잠한 핸드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최 반장이 이내 CCTV 화면에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김고윤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보여줘.”
“네.”
CCTV와 연결된 마우스를 움직이는 채린의 손이 빨라졌다.
“여기부터 보시면 돼요. 이게 편의점 처음 들어왔을 때예요.”
“음-”
한동안 화면 속 고윤의 모습을 따라가던 두 사람의 미간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역시.”
두 사람의 예상대로 과도(果刀)의 범인은 고윤.
채린이 창고 안으로 들어간 후 과도를 챙긴 고윤이 칼을 아래로 숨기고 창고 앞으로 걸어와 문에 얼굴을 박은 채 안에 있는 채린이의 상황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후-.”
채린의 턱 밑까지 다가왔던 죽음의 그림자에 최 반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진짜 저를 죽일…….”
같이 영상을 보던 채린이 그 어느 공포 영화보다 섬뜩한 화면 속 영상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청년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화면 속 왁자지껄 떠들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들의 모습에 고윤이 급하게 음료 냉장고로 뛰어가 문을 열고 칼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런데 지금 일부러 카메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화면을 멈춘 채린이 당황한 얼굴로 CCTV 화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칼을 음료 냉장고 안에 숨기고 계산대로 걸어가는 고윤의 시선이 마치 채린과 눈을 맞추기라도 하듯 CCTV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네.”
“왜 쳐다본 걸까요?”
“어차피 냉장고에 누가 칼을 넣어놨는지 확인하기 위해 CCTV를 확인할 테고, 그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다 밝혀질 테니 굳이 감출 이유가 없다 생각한 거겠지.”
화면 속 고윤의 모습을 노려보던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젠 더 이상 저에게 숨길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마우스를 쥔 채린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경고일 수도 있지.”
“경고요?”
화면을 보던 채린의 시선이 최 반장 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경고.”
최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고윤이 찌그러트린 선반을 바라보자.
“할 수 있는데 안 했다는 건가요.”
망가진 선반과 화면 속 고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채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정면 승부야. 저 인간도 이제 죽자 살자 달려들 거라고.”
최 반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쥐자.
“네.”
화면 속 고윤을 노려보는 채린이의 눈빛도 이글거렸다.
“이따 CCTV 영상들 좀 복사해줘. 일단 나가자. 답답하다.”
최 반장이 좁은 창고 밖으로 나가자.
“네.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할까요?”
뒤따라 나간 채린이 고윤이 놓고 간 스티로폼 박스를 가리켰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문제인데.”
스티로폼 박스를 바라보는 최 반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설마 진짜 민찬욱은 아니겠죠?”
불안해하는 채린의 모습에.
“피 냄새는 안 나는데.”
최 반장이 꼼꼼하게 포장된 스티로폼 박스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포장을 엄청 꼼꼼히 해서 냄새가 안 나는 거 아닐까요?”
“다른 게 들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거요? 다른 거라면.”
채린이 불안감과 궁금함이 뒤섞인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위험한 게 들어있을 수도 있지.”
최 반장이 계산대에 한 팔을 기댄 채 스티로폼 박스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내렸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번 하긴 했어요.”
“그래? 누구랑?”
“며칠 전에 승현이가 놀러 왔는데 그때 김고윤 만났거든요. 그때도 택배 박스 가지고 왔었는데. 그거 보고 혹시 박스 안에 위험한 거 있는 거 아니냐고 승현이가 그랬거든요.”
“승현이가?”
최 반장이 의외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러면서 김고윤 뭔가 좀 그렇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승현이는 김고윤이 이상한 거 어떻게 안 거야?”
“김고윤이 저한테 갑자기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게 좀 이상하다고요.”
“승현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네.”
최 반장이 팔짱을 낀 채 옅은 미소를 짓던 그때.
딩- 동
편의점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 왔습니다.”
주철이 양손 가득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채린아 괜찮아?”
가방을 내려놓은 주철이 채린의 안부부터 물었다.
최 반장의 연락을 받고 편의점으로 오는 길에 대략적으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듣고 온 주철이었다.
“전 괜찮아요.”
“고생 많았어. 많이 놀랐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주철이 걱정스런 눈으로 채린이를 빠르게 살피며 물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짜 괜찮아요.”
“천만다행이다.”
주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식팀은요?”
최 반장이 궁금한 얼굴로 주철과 편의점 문 쪽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단 저부터 왔어요. 조금 있으면 뒤따라올 거예요. 그런데 이학준 아니 김고윤은 아직이에요?”
편의점 안을 한번 쓱 둘러보던 주철이 라텍스 장갑을 끼며 물었다.
“네. 그런데 그것도 가지고 오셨죠? 이게 그거예요?”
최 반장이 주철이 내려놓은 무거운 가방 두 개를 손으로 가리켰다.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가지고 오긴 했는데. 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 / 폭발물 처리반)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스티로폼 박스 안의 물건이 혹시 사제폭탄일지도 모르니 휴대용 X-RAY 투시기를 가지고 와달라는 최 반장의 부탁에 마지못해 기계를 챙겨오긴 했지만.
계산대 위에 있는 스티로폼 박스를 보는 주철의 눈빛은 불안하기만 했다.
“폭발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진짜 위험한 거 아닐까요?”
최 반장의 말에 채린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게 진짜 폭탄이었다면 진작 터졌을 거고. 또 김고윤이 너를 해치려고 이 칼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기 안에 폭탄이 없다는 말 아닐까?”
고윤이 놓고 간 비닐 팩에 든 과도를 집어 들어 주철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학준이 워낙 알 수 없는 인간이라. 진짜 폭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칼을 받아 들어 불빛에 대보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주철이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콧잔등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X-RAY 투시기로 확인해보면 알겠죠.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죠?”
“네.”
들고 있던 칼을 잠시 옆에 내려 둔 주철이 가지고 온 가방을 열며 짧게 대답했다.
잠시 후.
“일단 폭탄은 없는 것 같은데.”
X-RAY에 투시된 스티로폼 박스를 꼼꼼히 바라보는 주철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후- 민찬욱 씨가 아니라 더 다행이네요.”
옆에서 같이 화면을 지켜보던 채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게 뭐야.”
최 반장이 상자를 가득 메운 낯선 물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김고윤이 목걸이랑 목걸이 마네킹 들어있다고 했는데. 모양 보니까 진짜 목걸이 마네킹 같은데요. 이렇게 보면 그렇잖아요.”
채린이 화면 속 낯선 물체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설명했다.
“진짜 그냥 마네킹이라고? 그런데 뭘 그렇게 조심하라고 한 거야.”
최 반장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말하다 이내 궁금한 얼굴로 주철을 바라봤다.
“마네킹 속에 뭐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걸로 다 속까지 보여서…… 안에는 그냥 빈 것 같은데.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이런 것들은 에어캡 같고.”
최 반장의 질문에 주철이 화면을 짚으며 설명하던 그때.
“그런데 저기 있는 건 뭘까요?”
채린이 X-RAY 투시 화면에 보이는 네모반듯한 물체를 가리켰다.
“그러게. 저게 뭐야.”
최 반장이 눈을 찡그린 채 화면에 얼굴을 가깝게 가져다 댔다.
“사이즈나 두께 보면 무슨 종이 같은데요.”
주철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덩달아 화면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쪽지 같은 거 아닐까요?”
채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하자.
“일단 열어보자. 열어보면 알겠지.”
최 반장이 스티로폼에 붙은 테이프를 거침없이 뜯었다.
찌이익- 찌이익-
잠시 후.
스티로폼 상자 뚜껑을 열고 그 속에 가득 담긴 에어캡을 빼내자 예상대로 목걸이 마네킹과 함께 작은 편지 봉투 하나가 세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는 없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최 반장이 입꼬리를 내린 채 마네킹 위에 놓인 작은 편지 봉투를 장갑 낀 손으로 집어 들었다.
“편지 봉투 같은데요.”
채린이 궁금한 얼굴로 최 반장의 손에 들린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열어봐요.”
주철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최 반장을 재촉했다.
“이건 또 뭐야.”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연 최 반장의 눈에 작은 메모지와 함께 낯선 글자가 적혀있었다.
“MORS?”
처음 보는 글자에 채린이 검색을 하기 위해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이거 모스라고 읽는 거지? 이거 무슨 뜻이래?”
최 반장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단어를 읽으며 채린이를 바라보던 그때.
“모르스. 제가 아는 게 맞다면 죽음이란 라틴어예요.”
주철이 침통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죽음이라…….”
“설마.”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느낌에 최 반장과 채린이 동시에 눈을 맞췄다.
“이걸 왜 보낸 거냐.”
고윤의 의도가 궁금하기만 한 주철이 스티로폼 상자 안에서 조심스럽게 마네킹을 꺼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여기 마네킹 아래에 뭐가 꽂혀…….”
마네킹 바닥에 작은 압정으로 꽂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확인한 주철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래요?”
“그게 뭐예요? 폴라로이드 사진 아니에요?”
주철의 반응에 최 반장과 채린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흠- 보세요.”
주철이 건넨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는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고 의자에 묶여 있는 찬욱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