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497화 (497/669)

#497.

“그럼 이거 가는 길에 빨리 분석해 달라고 전달해줘요.”

“네.”

다른 사건 때문에 국과수로 들어가는 직원 편으로 고윤이 버리고 간 캔 음료수와 피 묻은 물티슈 그리고 과도(果刀)를 보낸 주철의 시선이 최 반장을 향했다.

“그런데 이학준 아니 김고윤.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아무튼 그 인간 어떻게 잡으실 건데요?”

주철이 안경 너머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일단 김 형사 연락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당장 고윤을 잡으러 갈 것처럼 말은 했지만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 맨땅에 헤딩하듯 고윤을 찾으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일단 지금은 성진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 형사 연락은 아직이에요?”

“네.”

“연락해보셨어요?”

“해봤는데 연락이 없네. 쫓고 있는 건지.”

채린의 말에 최 반장이 여전히 묵묵부답인 핸드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내렸다.

김 형사와 편의점 앞에서 잠복하던 형사들이 고윤을 뒤쫓은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하는 소식이 없자 답답해진 최 반장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같이 간 다른 형사분들에게도 해 보셨어요?”

“어. 그쪽도 연락 안 받긴 마찬가지더라.”

“무슨 일 있는 건 아닐까요? 김고윤 힘 장난 아니에요. 아까 창고 선반 보셨잖아요.”

채린이 불안한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세 명이나 같이 가서 무슨 큰일은 없을 거야. 김 형사도 그렇고 다 한 가닥씩 하는 녀석들이라.”

최 반장이 불안해하는 채린이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더 이상 여기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편의점 곳곳을 누비며 지문 감식에 여념이 없는 감식반을 한번 쓱 쳐다본 주철이 눈짓으로 채린이를 가리키며 최 반장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미 고윤의 표적이 된 이상.

더 이상 편의점에 채린이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당장 편의점은 그만두고 당분간은 정 선생이나 도 팀장 집에 잠시 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항상 사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인 것 같은 채린이가 안쓰럽고 안타까운 최 반장이었다.

“두 사람 집에는 왜요?”

굳이 집을 놔두고 인혜와 나연에게 채린이를 맡기려는 최 반장이 주철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채린이 지금 혼자 지내거든요. 아무래도 혼자 두는 건 좀 그래서.”

“혼자요? 어머니 같이 계시지 않나요?”

최 반장의 말에 주철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채린이의 신상명세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알기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해외에 계세요.”

채린이 살짝 굳은 얼굴로 짧게 대답하자.

“아…… 그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선뜻 묻기는 눈치 보이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말에 마침표를 찍는 주철의 표정에.

“연구원이세요. 채린이한테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채린이가 그냥 여기 남겠다고 해서.”

눈치 빠른 최 반장이 채린이를 대신해 짧은 부연 설명을 했다.

“아- 몰랐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러니 밖으로 나갈까요?”

방금 전 감식반원들 앞에서 채린이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는 것도 이상해 보일 거라 생각했고.

한편으론 별로 크지 않은 편의점 공간에서 감식반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속삭이듯 말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요.”

주철의 의도를 안 최 반장과 채린이 먼저 편의점 밖으로 나가자.

“나 밖에서 목격자분 진술 좀 듣고 있을 테니까 뭐 나오면 바로 알려줘요.”

지문을 채취하는 감식반원들과 눈을 맞추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주철이.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 해외에 나가신 거야?”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저 중학교 1학교 때요.”

“일찍 가셨네. 혼자 지내기 힘들었겠다. 어린 나이에.”

주철이 안쓰러운 얼굴로 채린이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옆에서 워낙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챙겨 주셔서요.”

채린이 최 반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아버지의 사건 이후 모든 삶의 의지를 잃은 어머니는 오랜 기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한때 나쁜 마음까지 먹으려 했지만.

자신마저 이 세상을 등진다면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채린이 생각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선택한 길이 해외에서의 새로운 삶.

사건의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딸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버지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황에서 갑자기 친구들을 두고 절대 떠날 수 없다는 채린이의 고집을 결국 꺾지 못한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해외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상 채린이가 이곳을 떠날 수 없던 이유는 단 하나.

어린 나이에도 눈앞에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는 일념(一念) 그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물론 혹자들 중에는 어린 딸을 두고 혼자 해외로 나간 어머니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 당시 자신보다 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삶의 끈을 놓으려 했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걸 채린이는 잘 알고 있었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셨듯이 자신도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 이후 어린 딸을 혼자 두고 떠난 게 마음 편하지 않은 어머니가 자주 한국에 들어오시고 또 외가 쪽에서 채린이를 지금까지 챙겨 주고는 있지만.

실상 채린이를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살뜰히 챙기는 사람은 최 반장과 인혜 두 사람이었다.

“그럼 어디로 갈 거야? 아무래도 정 선생 집이 더 편하지 않을까?”

“저 진짜 집에 혼자 있어도 돼요.”

최 반장의 말에 채린이 부담스런 얼굴로 말하자.

“안 돼.”

“안 돼. 위험해.”

최 반장과 주철이 채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시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여기서 일하는 것까지 다 알고 접근한 놈이 너 집 하나 못 찾을 리 없어. 아니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 이번에는 반장님 말씀이 옳아. 지금 혼자 있는 건 너무 위험해.”

주철이 최 반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 선생 집이 불편하면 그럼 우리 집에 와 있을래? 내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정 선생님 집에 있을게요.”

최 반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채린이 빠르게 대답했다.

항상 자식같이 챙겨 주고 마음 써주는 최 반장이 고마웠지만.

고마움과 같이 한 공간에서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

벌써부터 눈 뜨자마자 이어질 잔소리를 생각하면 어디를 선택하냐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하긴 어디를 가도 반장님 댁보다는 낫겠지. 반장님 집에 한 번이라도 가봤으니 알 거 아니야.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청소부터 해야 하는걸.”

주철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자.

“그래서 더 정 선생님 집으로 가려고요.”

채린이 주철의 말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윤 법의관님은 그거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오셨다고. 그때가 제일 집안 암흑기 때 오셔서 그랬던 거예요. 아무튼 채린아 나중에 우리 집에서 못 지냈다고 후회하지 마. 나의 필살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주려고 했는데.”

최 반장이 호탕하게 웃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네. 절대 후회 안 할게요.”

“그런데 우리 이렇게 웃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아직 김고윤도 못 잡았는데요.”

주철이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들의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다 순간 멋쩍은 표정으로 최 반장과 채린이를 바라봤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속에도 휴식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도 한숨 돌리고 살아야죠. 그래야 또 심기일전해서 쓰레기들 처리하죠. 안 그래?”

최 반장이 채린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네. 싹 다 처리해야죠.”

옅은 미소와 함께 비장한 표정을 짓던 채린이 이내.

“그런데 김고윤이 저를 노리는 이유가 뭘까요?”

고개를 갸웃하며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굳이 이런 쪽지와 사진을 든 택배를 가지고 와서는 갑자기 또 저를 칼로 죽이려고 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 X친 놈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그냥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그리고 어디서 뭘 봐서 그런 X랄 맞은 컨셉을 잡았는지. 라틴어에 쪽지는 또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뭐만 하면 다 라틴어 쪽지네. 그러면 뭐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그냥 고윤의 존재 자체가 싫은 최 반장이 이를 바득 갈며 불만을 쏟아 냈다.

“그런데 저 박스는 어디로 보내려는 거였어?”

주철이 편의점 안에 있는 고윤이 놓고 간 스티로폼 박스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본인이 직접 택배 등록을 해서요.”

“일단 아까 그런 걸 넣어둔 거 보면 입력한 주소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데. 김고윤 그전에도 여기서 택배 꽤 보냈다고 했었지.”

“네.”

“혹시 지금까지 어디로 보냈는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나?”

주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는 힘들 것 같고요. 택배사로 직접 문의해야 할 것 같은데요.”

“김고윤 집이 이 근방이라고 했지.”

이번엔 최 반장이 질문을 던졌다.

“네. 저기 뒤쪽에 있는 아파트요.”

채린이 편의점 뒤쪽으로 우뚝 선 아파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주소 알아?”

“아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뒤에 산다는 것도 거짓말 아닐까요?”

최 반장의 질문에 채린이 눈가를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런데 진짜 김 형사한테 다시 한번 연락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간이 꽤 많이 지났는데.”

손목시계를 확인한 주철이 심각한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다시 해 보려고요.”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최 반장이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띠리릭. 띠리리릭. 띠리리릭.]

여전히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성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이젠 슬슬 걱정이 되는 최 반장의 얼굴이 굳어지던 그때.

“지문 감식 다 끝났습니다.”

편의점 문을 빼꼼히 연 감식반원 한 명이 주철을 불렀다.

“네. 들어가시죠.”

주철을 필두로 최 반장과 채린이 그 뒤를 따랐다.

딩- 동

“뭐 좀 나왔어요?”

경쾌한 문 알람 소리와 함께 편의점 안으로 먼저 발을 들여놓은 주철이 감식반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문은 나왔는데요. 찾으시는 지문은 안 나왔습니다.”

감식반원 한 명이 지문 채취한 샘플들을 보여주며 입꼬리를 내렸다.

“지문이 안 나와요?”

최 반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지문 감식을 시작하기 전 지문이 나오면 바로 범죄자 DB에 돌려서 학준의 존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최 반장의 계획이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네. 딱 그 지문만 없네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채린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장갑을 끼고 다닌 것도 아닌, 온 편의점을 다 만지고 다닌 고윤의 지문이 나오지 않다니 선뜻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신기하게 찾으신다는 그 지문만 안 나왔어요.”

감식반이 다시 지문 결과를 세 사람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지문이 하나도 안 나올 수가 있어요.”

“지문을 없앤 것 같은데요.”

채린의 말에 주철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없애요?”

“가끔씩 자기 지문 없애는 놈들이 있거든요. 흔적 안 남기려고요. 약품에 담가서 녹이는 놈들까지도 있을 정도니.”

“아-”

“젠장.”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황에 최 반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때.

위이잉- 위이잉-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김 형사예요.”

급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 화면 속 성진의 이름이 보이자 채린, 주철과 눈을 맞춘 최 반장의 손가락이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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