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512화 (512/669)

#512.

‘뭐지?’

나연이 불안한 얼굴로 채린을 바라보자.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채린이 조심스럽게 다락방 문손잡이를 잡았다.

‘소리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안의 상황이 어떤지도 몰랐고, 굳게 닫혀 있던 문 열리는 소리에 학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몰릴 수도 있는 상황.

동그랗게 눈을 뜬 나연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채린을 말렸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너무 위험해.’

채린과 나연이 문손잡이를 놓고 소리 없는 논쟁을 벌이던 그때.

[“아-!”]

또다시 다락방 안에서 희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희연의 애절한 울부짖음에.

‘들어갈게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판단한 채린이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아- 아-!”

딸각.

희연의 비명 소리에 문 열리는 소리가 묻혔고.

채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락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 진짜 미치겠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채린을 뒤따른 나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락방 한가운데 쳐진, 사람이 설 수 있을 정도의 큰 텐트.

‘역시 저기서.’

등산 가방 속 텐트의 용도를 눈으로 확인한 채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조용히 좀 해. 시끄러우니까.”

“아- 말이 틀리잖아요.”

“뭐가 말이 틀린데.”

텐트 안에서 절규하는 희연과 무덤덤한 학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나연이 불안한 얼굴로 채린을 바라봤다.

‘일단 빨리 숨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몸을 숨기는 게 급선무.

그나마 텐트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지금이 몸을 숨길 기회였다.

‘어.’

‘저리로 가요.’

빠르게 주위를 살핀 채린이 잡동사니들과 가구들이 쌓인 곳으로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

‘후-’

잠시 뒤 두 사람이 가구들 뒤에 몸을 숨긴 채 잠시 숨을 고르던 그때.

“아-”

갑자기 텐트 안에서 희연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진짜 사람 짜증 나게 할래?”

“아!”

하지만 바로 뒤따라 나온 학준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희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사,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바닥에 쓰러진 희연이 눈물을 흘리며 공포와 원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학준을 노려봤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내 얼굴을 아는 게 좀 그래서 말이야.”

허리를 살짝 굽힌 학준이 손가락으로 희연의 두 눈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말 안 한다니까요. 진짜 말 안 할게요. 죽을 때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고쳐 앉은 희연이 두 손을 비비며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허리를 편 학준이 시큰둥한 눈빛으로 희연을 내리깔아봤다.

“절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드리는 돈을 믿으세요. 제가 제 전 재산 다 드린다고 했잖아요.”

“흠- 전 재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학준이 텐트 옆에 있던 이삿짐 박스에 살포시 걸터앉으며 팔짱을 꼈다.

“네. 제가 가지고 있는 거 다 드릴게요.”

“너 돈 많아?”

“그래도 전세 보증금 빼고 예금, 적금 다 깨면 족히 몇억은 될 거예요.”

“네 목숨값이 몇억이라는 거지.”

“제 목숨값이 그 정도가 아니라 제가 드릴 수 있는 걸 모두 다 드린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

“내일 아침에 바로 다 정리해서 드릴 수 있어요.”

다시 조금씩 마음이 기우는 듯한 학준의 모습에 희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너 진짜 살고 싶은가 보다.”

학준이 희연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네. 저 진짜 살고 싶어요. 정말 미치도록 살고 싶어요.”

희연이 눈물을 흘리며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간절한 얼굴로 학준을 바라봤다.

“좋아. 일어나.”

학준이 희연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진심이 통했다 생각한 희연이 드디어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쁨에 가슴 벅찬 표정으로 연신 학준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가까이 와.”

학준이 옅은 미소를 띠며 눈짓으로 희연을 자기 앞으로 불렀다.

“네? 네.”

희연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좀 더 가까이 와.”

“……네.”

희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학준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의 거리에 서자.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 항상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네?”

갑작스러운 학준의 말에 희연이 불길한 얼굴로 되묻던 순간.

“그리고 너무 간절해 보이면 난 좀 꼴사나워 보이더라. 없어 보이고.”

어느새 학준의 손에 들린 주사기가 희연의 팔을 찔렀다.

“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완전히 패닉에 빠진 희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내- 내가 돈 돈도 준다고 했잖아…….”

금세 퍼진 약 기운에 희연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학준을 향해 원망의 손을 뻗었다.

“물론 돈이 중요하지만, 사람이 꼭 돈 때문에 움직이는 건 아니야.”

학준이 희연의 손을 꽉 잡으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제, 제발- 사, 살려…….”

‘저 X새끼.’

결국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학준의 품에 힘없이 쓰러진 희연의 모습에 나연이 이를 바득 갈았다.

“흠-”

품에 쓰러진 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학준이 이내 기절한 희연을 텐트 안으로 옮기자.

‘가까이 가서 볼게요.’

나연과 눈을 맞춘 채린이 몸을 들썩였다.

텐트 안으로 들어간 학준이 뭘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너무 가까이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여기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불안해하는 나연을 설득하듯 채린이 앞을 가로막은 짐들 사이로 고개를 빼며 텐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텐트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안 돼. 너무 위험해!’

나연이 몸을 움직이는 채린이의 팔을 급하게 잡아당겼다.

‘저기밖에 방법이 없어요.’

뒤편에 살짝 열린 텐트 지퍼만이 진실을 확인할 유일한 창문이었다.

‘그러다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요.’

걱정하는 나연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떼어놓은 채린이 비장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 미치겠네.’

그러자 머리를 쓸어 넘긴 나연이 난감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채린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잠시 뒤.

“으- ♬♩ 흠-♩♬- ♬♩- 흐-”

지옥의 장송곡(葬送曲)처럼 학준의 콧노래 소리가 들리는 텐트 뒤편에 도착한 채린이 살짝 열린 텐트 문틈에 눈을 가져대자.

뒤따라온 나연도 채린의 뒤에 빠짝 붙어 텐트 안의 상황을 같이 살피던 순간.

‘읍-’

‘아!’

두 사람의 눈앞에 생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

경찰서 취조실.

‘정 선생님. 정 선생님.’

구석 의자에 앉은 성진이 돌리던 만년필을 멈추곤 학준에게 집중하고 있는 인혜를 손짓으로 부르며 입을 뻥긋거리자.

‘네.’

학준에게 고정돼 있던 인혜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얼마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말을 하는 건 학준의 최면에 영향을 줄 수 있단 생각에 성진이 핸드폰 전광판 어플에 글자를 적어 인혜에게 들어 보였다.

‘10분 정도요.’

인혜가 열 손가락을 펴며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10분이요?’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성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최면 10분은 기억 속 하루 정도.

단지 기억 속 하루로 학준이 저지른 수많은 사건의 단서들과 찬욱의 행방까지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핸드폰 위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인 성진이 다시 전광판 화면을 인혜에게 들어 보였다.

[조금 더 늘릴 수 없어요?]

살짝 눈을 감고 있는 학준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인혜가 성진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힘들어요.’

‘흠-’

짧은 한숨을 내쉰 성진이 다시 전광판 어플에 빠르게 글씨를 입력하고 유리 벽을 향해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10분이 최대!!! 두 사람 다 별일 없죠?]

***

그 시각 다시 기억 속 다락방.

충격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무엇이 인간을 저렇게 악(惡)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아니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인지.

학준이 저지른 만행을 두 눈에 담던 채린이 식어버릴 것 같지 않은 분노와 참을 수 없는 슬픔 그리고 절망감에 고개를 떨궜다.

‘읍-’

나연이 텐트 안에서 벌어진 학준의 끔찍한 만행에 넘어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손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하지만 어렵게 열린 진실의 문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건 희연을 비롯한 피해자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저 악마를 잡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만큼 입술을 깨문 채린이 떨어뜨렸던 고개를 억지로 들어 다시 진실을 마주했다.

그렇게 지옥 같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 끝났다.”

비옷 위에 입은 방수 앞치마와 장화, 손에 낀 두꺼운 고무장갑에 페이스실드까지.

완전무장을 한 학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페이스실드를 올리고 이마에 흐른 땀을 팔등으로 닦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린과 나연이 바짝 긴장했다.

“아- 괜히 다락방에서 했나. 그냥 화장실에서 하고 옮길 걸 그랬나.”

텐트 안에 이중으로 깐 방수포 위에 세운, 비닐로 감싼 접이식 테이블.

그 위에 옷을 입은 채 테이블 밖으로 머리를 내놓은 자세로 반듯하게 누워있는 희연의 사체(死體).

그리고 그 밑에 놓인 철제 양동이 안에는 희연의 목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찰랑거렸다.

“이제 포장만 하면 되겠네.”

학준이 입꼬리를 히죽거리며 옆에 펼쳐둔 브리프케이스 속 공구들을 뒤적거리다 이내 날카로운 줄 톱을 들자.

‘후-’

희연을 위해 기도하듯 채린이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읍- 계속 볼 거야?’

진실을 밝히고 학준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사건 현장을 지켜보던 나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헛구역질을 하며 채린이의 등을 두드렸다.

‘조금만 더요.’

마음 같아선 나연과 함께 당장 기억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항상 모든 중요한 증거들은 사건 이후 나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채린은 쉽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끝났다.”

준비해 놓은 아이스박스 뚜껑을 닫은 학준이 뿌듯한 얼굴로 페이스실드를 벗으며 히죽거리다 이내.

“이걸 다 언제 치우냐.”

피로 얼룩진 자신의 앞치마와 방수포. 그리고 비닐을 깔아놨지만, 텐트 이곳저곳에 튄 핏자국들을 보며 귀찮은 듯 입을 삐쭉거렸다.

“자- 자- 일단 이것부터 치우고.”

하지만 이내 짧은 기합과 함께 다시 의욕 넘치는 얼굴로 훼손된 희연의 사체를 탁자를 감쌌던 비닐로 대충 말아 조심스럽게 텐트 밖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온 학준이.

“이것도 오늘은 정리해서 넣어야 하는데.”

피 묻은 칼과 톱이 대충 놓인 브리프케이스를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저 연장 가방만 찾으면 될 것 같은데.’

채린이 희연의 피가 묻은 칼과 연장들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가방이 학준의 것이라는 걸 밝히고, 그 안에 든 칼과 연장에서 희연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혈흔이 검출된다면.

모든 게임은 끝이었다.

“이건 진짜 좀 갈아놔야겠네.”

학준이 브리프케이스에 있는 칼 한 자루를 들어 장갑 낀 손으로 피 묻은 칼날을 쓱 닦다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

그리고 쥐었던 칼을 급하게 서류 가방 위로 내던지던 그때.

끼이익-

마당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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