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529화 (529/669)

#529.

“그게 무슨 말이야!”

채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물었다.

“못 들었어? 너랑 저기 있는 최 반장 아들을 같이 납치했었다고.”

학준이 채린과 최 반장을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X새끼야.”

“반장님 참으세요.”

당장이라도 학준의 숨통을 끊어놓을 듯 총구를 들고 뛰어가려던 최 반장을 성진이 온몸으로 막았다.

“흥분하지 마. 그리고 방금 전까지는 화도 잘 참는 것 같더니 자기 아들 일에만 이렇게 열 내는 것도 꼴사나워 보이니까.”

“이학준! 죽여 버리겠어.”

학준의 말에 최 반장의 눈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아니, 그렇게 죽인다고 말만 하지 말고 그냥 당겨. 당기라고!”

“이학준!”

“반장님, 제발 진정하세요. 동우 찾으셔야죠. 정말 이렇게 끝내실 거예요?”

학준을 향해 겨눈 총구를 손으로 잡은 성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말하자.

“하- 하-”

잠시 머뭇거리던 최 반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었던 총구를 마지못해 내렸다.

성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 학준을 죽인다고 해결되는 건 순간의 분노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폭발해버릴 것 같은 심장과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그래야 동우를 찾을 수 있었다.

“봐봐. 자기한테 도움 될 것 같으니까 바로 또 조용해지는 거. 사람이 원래 저런 동물이지. 진짜 극혐.”

학준이 최 반장을 바라보며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반장님 아들을 어떻게 한 거야!”

최 반장이 혹시라도 방아쇠를 당길까 노심초사하던 채린이 한발 물러선 최 반장의 모습에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학준에게 집중했다.

“말했잖아. 너랑 같이 납치했다고. 아! 이건 기억 속에 들어와서 알아내야 하는데…… 그래 뭐 물어본 건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학준이 히죽거리며 채린을 바라봤다.

“난 납치를 당한 기억이 없어.”

“채린아, 꼭 기억나는 것만 경험한 건 아니지.”

학준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런 일을 기억 못 할 일이 없어.”

“너 옛날 일들 기억 잘 못 하지 않아?”

“…….”

학준의 말에 채린의 말문이 막혔다.

“내가 말했지. 네가 기억 못 한다고 그 일이 안 일어난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네가 충격으로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웠을 수도 있지.”

“내가?”

채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최 반장이 말 안 해?”

“…….”

채린의 시선이 저절로 최 반장 쪽을 향했다.

“말 안 했나 보네. 흐흐흐.”

학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채린과 최 반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왜 말 안 했을까?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설마 채린이가 최 반장이 아들은 사라지고 자기만 산 걸로 죄책감 받을까 봐 일부러 말 안 한 거야?”

“…….”

속마음을 들킨 최 반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당시 사라진 동우를 찾기 위해 온 사력을 다하던 최 반장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제보 전화.

어느 외곽지역 공장에서 동우를 봤다는 제보 전화에 한달음에 달려간 최 반장이 공장 안 낡은 캐비닛 안에서 찾은 건.

동우가 아닌, 기절해 있는 채린과 그 옆에 놓여있는 동우의 신발 한 짝이었다.

그 이후 채린을 통해 동우를 찾기 위해 최면 치료부터 모든 방법을 백방으로 써봤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한 충격에 납치된 충격까지 더해진 채린은 자신이 납치된 기억은 물론 그 당시 1년 동안의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학준의 말처럼 동우의 실종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과, 자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채린이 힘들어할까 봐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침묵을 선택한 최 반장이었다.

“오- 맞나 보네.”

사색이 된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최 반장의 모습에 학준이 무슨 퀴즈 문제라도 맞힌 듯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아- 그리고 그런 것도 있었겠네. 그때 채린이도 당신 아들 납치됐을 때 비슷한 타이밍으로 실종신고 됐었는데, 자기 아들 찾느라 하나도 신경도 안 썼던 것도 좀 미안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지?”

‘저 인간이 어떻게 저 일을 다 알고 있는 거야.’

쉽게 알 수 없는 과거 기록들까지 줄줄 꿰고 있는 학준의 모습에 최 반장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채린아, 너 좋겠다. 최 반장이 너 엄청 생각하나 보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너 상처 받을까 봐 지금까지 안 한 거잖아.”

“동우는 어디 있지?”

“그래도 뭐 최 반장이 아들 대신 너를 딸처럼 잘 키웠으니 다행이지, 뭐. 안 그래? 이런 걸 보고 꿩 대신 닭이라고 하나? 하하하.”

“묻는 말에나 대답해. 지금 동우는 어디 있어.”

채린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물었지만.

“참 인연이라는 게 신기해. 아니, 자기 아들 찾으러 갔는데 뜬금없이 자신이 수사하던 사건 피해자의 실종된 딸을 찾으면 무슨 기분일까? 최 반장 무슨 기분이야?”

계속 최 반장의 아픈 가슴을 후벼 파는 학준의 모습에 채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학준! 말해! 동우를 어떻게 했냐고!”

그 순간.

“맨 처음에는 너만 납치하려고 했어. 그런데…….”

학준이 채린의 질문에 갑자기 다른 대답을 꺼냈다.

“나만? 나를 왜.”

채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채린아, 말 끊지 마. 짜증 나니까.”

“후-”

지금은 최 반장의 아들과 자신의 납치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게 우선이었기에 채린이 어쩔 수 없이 입을 닫았다.

“아무튼 너를 차에 태우려는데, 누가 그걸 빤히 보고 있는 거야.”

“설마…….”

이야기를 듣던 최 반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그게 최 반장 아들, 동우야.”

학준이 아연실색한 최 반장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어떡하겠어.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니까 그냥 같이 차에 태웠지.”

“이 X새끼야!”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의 아들이 너무나 허무한 이유로 납치됐다는 이야기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반장님!”

성진이 다시 최 반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 최 반장. 날 원망하면 안 되지. 그때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던 당신 아들이 잘못인 거야.”

그 당시 채린이 살던 곳과 최 반장이 살던 곳은 꽤 가까운 거리.

학교는 달랐지만 또래 아이들이 노는 곳은 뻔했기에 동우의 납치 추정 장소도 채린의 집 인근이었다.

“지금 동우는 어디에 있어.”

“아니, 아니. 질문이 잘못됐어.”

“뭐?”

학준의 말에 채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왜 너만 살아있냐고 물어봐야지.”

“뭐?”

“안 돼. 안 돼.”

동우의 사망신고나 다름없는 학준의 말에 최 반장이 절규했다.

“서, 설마 죽인 거야?”

“그건 나도 몰라.”

떨리는 채린의 말에 학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거렸다.

“네가 납치했다며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첫 번째 질문 답변 끝.”

학준이 정색을 하며 채린의 말을 끊었다.

“X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 안 해! 우리 동우 지금 어디 있냐고!”

최 반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흥분해서 무슨 질문을 한다고. 최 반장 탈락. 이제부터 나한테 지금 질문할 수 있는 건 채린이뿐이야.”

“X친놈.”

그저 지금 이 상황을 하나의 게임 정도로만 생각하는 학준의 모습에 성진이 최 반장을 온몸으로 막으며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좋아. 그럼 두 번째 질문이야. 반장님 아들을 어떻게 했지? 아니, 지금 어디에 있지?”

깊게 숨을 고른 채린이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말했잖아. 나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게 날아가고. 흐흐흐.”

“이학준!”

“채린아, 고윤 언니라고 해야지. 고윤 언니.”

“당신은 미쳤어.”

광기(狂氣)라는 단어 외에 학준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질문 하나 남았어. 잘 생각해서 물어봐.”

마지막 남은 카드 한 장.

순간 폐공장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여기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학준으로부터 가장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 채린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없으면 그냥 끝내고.”

“누구를 위해서 이러는 거지?”

“뭐?”

채린의 마지막 질문에 학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구를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고.”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생각하는 학준에게.

배후가 있다는 질문은 항상 학준의 아킬레스건처럼 그를 흥분하게 만드는 스위치라 생각했다.

“있긴 누가 있어!”

역시 채린의 예상대로 학준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과거 나나 최 반장님 아들을 납치한 것도 다 누가 시킨 거지? 맞지?”

“시키긴 누가 시켜. 우린 절대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아.”

“우리?”

학준의 짧은 말을 캐치한 채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납치를 혼자 했을 리는 없고. 그때도 김재영, 최영수와 같이 한 건가?”

“오- 예리해. 역시 채린이가 똑똑하다니까. 아무튼 과거 이야기는 재미없으니까 그만두고…….”

학준이 히죽거리며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하자.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거지?”

채린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재영이와 영수를 물어보는 걸로 마지막 질문은 끝난 것 같은데.”

히죽거리던 학준이 정색을 하며 채린이를 노려봤다.

“내가 한 질문에는 아직 대답 안 했잖아.”

“채린아, 치사하게 왜 이래. 됐다. 그만하자.”

“대답해. 누구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거냐고!”

“몇 번을 말해! 난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

채린의 재촉에 학준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던 그때.

♬-♩♬-♬♩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아이씨. 진짜!”

바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학준이 짜증 난 얼굴로 버럭 소리 질렀다.

♬-♩♬-♬♩

“받아 봐.”

채린이 학준의 바지 주머니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

“야! 너 빨리 차나 가지고 와!”

학준이 갑자기 성진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중요한 전화 같은데 먼저 전화부터 받지.”

당황하는 학준의 모습에 채린이 다시 학준을 몰아세우자.

“야! 빨리 차 가져오라고!”

성진을 향한 학준의 고함 소리가 더 커졌다.

♬-♩♬-♬♩

“주인 전화 같은데 빨리 받아봐.”

“채린아, 내가 봐줄 수 있는 선이라는 게 있어.”

학준이 채린을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흐- 빨리 받아. 전화 늦게 받아서 욕먹지 말고.”

흔들리는 학준의 모습에 찬욱이 괴로운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움직이자.

“닥쳐라. 진짜 뒤진다.”

학준이 화난 얼굴로 있는 힘껏 찬욱의 목에 수갑 끝을 들이밀었다.

♬-♩♬-♬♩

“흐- 흐- 전화 안 받으면 네가 뒤질 것 같은데.”

“젠장, 씨.”

끊어지지 않는 전화와 찬욱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학준이.

♬-♩♬-♬♩

“가만히 있어. 허튼수작하면 바로 목 그어 버릴 테니까.”

♬-♩♬-♬♩

왼손으로 찬욱의 목에 수갑을 더 깊숙이 가져댄 채, 오른손으로 바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학준의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하며 자세가 무너지던 그때.

최 반장과 눈을 맞춘 찬욱이.

갑자기 꼭 쥔 손안에 감추고 있던 열쇠고리가 달린 작은 접이식 칼을 학준의 허벅지에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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