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후-”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뜬 채린이 다시 눈을 찡그렸다.
“어디지?”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려 마지막 안간힘을 쓰듯 노을이 뜨겁게 타올랐다.
손을 눈썹 끝으로 가져가 얼굴을 가린 채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비포장 시골길.
그 한가운데 뚝 떨어진 자신의 모습이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맞게 들어온 건가?”
학준의 상태를 생각하면 이상한 기억 속에 들어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일단 공장부터 찾아야 하는데…….”
인적은 고사하고 황량한 논과 밭뿐인 주위를 살피며 뒤로 몸을 돌린 채린의 눈에 저 멀리 울창한 나무숲 사이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공장 지붕이 보였다.
“저긴가?”
짧게 심호흡을 한 채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공장 지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혹시 누구라도 마주칠지 몰라 수풀이 우거진 공장 뒤편으로 접근한 채린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나?”
적막하기만 한 공장 주변을 둘러보는 채린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쓸쓸한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채린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반쯤 허물어진 담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꽤 크네.”
수풀과 담벼락 때문에 밖에서 잘 보이지 않던 공장 부지는 족히 1,000평은 되어 보였다.
큰 주차장을 지나 덩그러니 서 있는 공장을 향하는 채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직 안 온 건가? 아니, 여기가 아닌가?”
텅 빈 주차장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느새 공장 바로 앞까지 온 채린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제대로 학준의 기억 속에 들어왔다면 자신과 동우를 납치한 차량은 물론, 학준과 그 일당의 모습이 보이거나.
최소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이나 동우의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아-씨. 잘못 들어온 건가.”
수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새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자 채린은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여기 아니면 진짜 끝인데.”
더구나 이렇게 학준의 기억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기에 초조한 채린이의 입술은 연신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래도 일단 모르니 공장 안부터 살펴보자.”
하지만 한편으론 혹시 아직 도착을 안 했을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린이 공장의 반쯤 부서진 옆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도대체 뭐 하던 곳이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공장 안으로 들어간 채린이 바로 어지럽게 쌓인 폐자재 뒤에 몸을 숨긴 채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정확한 용도가 불분명한 공장.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잔뜩 몸을 숙인 채린이 폐자재와 쓰레기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바스락.
발끝에 걸리는 종이에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신문?’
음식을 먹기 위해 식탁 위에 깔았다 구겨져 버린 것 같은, 군데군데 음식 국물이 떨어진 다른 쓰레기들과 달리 세월의 흔적이 묻지 않은 신문 뭉치에 채린의 시선이 꽂혔다.
‘어! 이건 동우와 내가 납치 된 날 신문이잖아.’
기억 속에 들어오기 전 최 반장과 인혜에게 자신이 잊고 있던 그 날의 기억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듣고 들어왔기에 신문에 적힌 날짜를 확인한 채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일단 시간은 제대로 맞게 들어왔다는 건데.’
다행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캐비닛 안에서 경찰에게 발견된 건 신문에 적힌 날짜보다 이틀 뒤.
만약 지금 기억 속 시간이 경찰에게 자신이 발견된 이후라면 분명 공장 이곳저곳에 쳐진 폴리스 라인과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형사들과 감식반으로 바글바글했을 텐데.
이렇게 조용한 걸 보니 일단 분명한건 납치된 자신이 발견되기 전의 시간.
거기다 지금 자신의 발밑에 있는 신문의 날짜까지 종합해 본다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 시간, 이곳 어딘가에 자신과 동우가 납치되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어디 간 건가?’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학준과 패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채린이 다시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세 사람의 흔적을 찾다 이내 넓은 공장 한 구석에 놓인 책상과 어지럽게 놓여 있는 의자들을 발견하자.
‘설마 저긴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조심스럽게 버려진 물건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
“전형적이네.”
반쯤 부서진 책상에 짝이 맞지 않는 의자와 낡은 소파.
거기다 불을 피운 드럼통까지.
딱 봐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나쁜 놈들의 아지트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에 채린이 입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캐비닛은 어디 있는 거지?”
하지만 정작 있어야 할 캐비닛이 보이지 않자 채린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
부우웅.
공장 밖에서 자동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온 건가?”
채린이 급하게 폐자재 더미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녹슨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하하하.”
“X신 새끼.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새끼야.”
경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학준?’
채린이 어딘지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찌그덕.
“시끄럽고. 너 이번에 애들 돈 받으면 뭐 할 거냐?”
낡은 소파에 몸을 날리며 시큰둥한 얼굴로 귀에 꽂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무는 사람.
성전환 수술을 하기 전의 학준이었다.
‘역시 너였어.’
예상했던 대로 자신과 동우의 납치에 학준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채린이.
‘돈?’
학준의 말에 순간 미간을 찡그리며 스스로 되물었다.
정확히 몸값을 요구했던 지한이 납치사건 당시와 달리.
앞서 일어난 최 반장 아들 동우나 자신의 납치사건 때는 따로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던 학준의 입에서 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채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이 일을 했다는 건데.’
채린이 머릿속으로 흩어졌던 퍼즐들을 하나씩 맞추며 다시 세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일단 양주 한번 찐하게 빨고 생각해봐야지. 아- X발 진짜 내가 그동안 못 먹어 봤던 거 다 먹는다.”
책상에 걸터앉은 재영이 생각만 해도 신나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너 그렇게 먹다 뒤진다. 아! 그리고 너 아침에 술 먹었으면 운전하지 마 새끼야. 누굴 골로 보내려고.”
의자에 앉은 영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야. 어차피 우리 다 무면허잖아. 무면허에 음주운전 좀 보탠다고 뭐 달라지냐? 오버하지 마. 그러는 넌 돈 생기면 뭐 할 거냐?”
“난 당연히 투자해야지.”
“요즘은 도박을 투자라고 하냐?”
거들먹거리는 영수를 향해 학준이 뿌연 연기를 공중으로 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도박이라니 새끼가 무식하게. 확률투자야. 확률투자.”
못마땅한 학준의 표정에 영수가 손가락 욕을 날리며 말했다.
“넌 그렇게 꼬라박고도 아직도 그걸 하고 싶냐. 야. 차라리 술을 먹어. 술은 내 몸에 남기라도 하지. 나한테 남는 것 일도 없는 그딴 걸 왜 하냐. 그리고 넌 돈 벌 관상이 아니야.”
“닥쳐!”
재영에게 양손으로 쌍욕을 날린 영수의 시선이 다시 학준을 향했다.
“그런데 넌 돈 받으면 뭐 할 거냐.”
“그러게. 생각해보니 한 번도 뭐 하겠다고 말 안 했네.”
재영도 덩달아 궁금한 얼굴로 학준을 바라봤다.
“나?”
학준이 코와 입으로 연기를 길게 뿜으며 누워있던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 할 거야? 술? 도박? 아니면 여자? 아니, 그냥 다 하나? 하하하.”
“이 새끼 욕심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어. 하하하.”
두 사람이 학준을 바라보며 자지러지게 웃던 그때.
“난 그냥 이거 재밌어서 하는 건데.”
“…….”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웃는 학준의 모습에 순간 두 사람의 말문이 막혔다.
“재밌지 않아? 스릴 넘치고. 돈도 생기고.”
‘미친놈.’
학준의 대답을 들은 채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아- 이 새끼는 진짜 미친놈이야.”
“나중에 진짜 한 건 제대로 해서 TV에 나올지도 모른다니까.”
두 사람이 학준을 향해 농담반 진담반으로 삿대질을 하며 혀를 내두르자.
“시끄럽고. 물건이나 내려봐. 물건 상했나 확인해야지.”
‘물건? 상해?’
학준의 말에 또다시 채린의 미간이 구겨졌다.
“야.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책상 위에서 털썩 내려온 재영이 투덜거리며 갑자기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 새끼가 좀 오버하는 게 있잖아.”
영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학준을 바라봤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몰라? 이 새끼들 도망가면 너희가 책임질래?”
시종일관 여유롭고 미소 짓던 학준의 얼굴에 살기(殺氣)가 번지자.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영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꼬리를 내렸다.
‘분명 나하고 동우가 갇혀있던 캐비닛을 말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다 숨긴 거지?’
채린이 다시 한번 학준과 두 사람 주위를 살피며 캐비닛을 찾기 위해 빠르게 눈을 돌리던 그때.
끼이익. 끼이익.
시끄러운 기계 작동음과 함께.
‘뭐야.’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채린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저기다…….’
쇠사슬에 묶여 창고 천장에 매달려 있다 천천히 내려오는 캐비닛에 채린이 아연실색했다.
‘아- 저걸 왜 못 봤지.’
당연히 바닥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캐비닛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니.
상식의 틀을 깨는 학준의 잔머리에 채린이 안타까움과 분노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조심해서 내려. 물건 상하지 않게.”
“잔소리 좀 그만해 새끼야.”
학준의 말에 재영이 크레인 스위치를 조작하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됐지?”
“이제 한 12시간 됐나?”
학준의 말에 영수가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말하자.
“빨리 내려.”
영수가 천천히 내려오는 캐비닛을 바라보며 재영을 재촉했다.
잠시 후.
쿵.
캐비닛이 바닥으로 내려오자.
약속이나 한 듯 세 사람이 캐비닛 앞으로 모여들었다.
“야.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
“그러게 처음 왔을 때는 울고불고 난리더니.”
영수와 재영이 불안한 얼굴로 캐비닛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뒤진 거 아니겠지?”
깡. 깡.
재영이 캐비닛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학준을 바라보자.
“열어.”
굳은 표정의 학준이 캐비닛에 칭칭 감긴 쇠사슬과 자물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진짜 이 새끼들 뒤지면 골치 아픈데.”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영수가 캐비닛에 두른 쇠사슬에 묶인 자물쇠를 열쇠로 열며 인상을 구겼다.
‘설마. 설마. 안 돼. 안 돼.’
머릿속을 스치는 불안한 생각에 채린이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캐비닛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뒤.
치르르르렁. 철컹.
캐비닛에 감았던 육중한 쇠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학준이 캐비닛 앞으로 다가가 따로 보관하고 있던 열쇠를 문에 꽂았다.
그리고 이내.
철컥.
열쇠를 열고 캐비닛 양 손잡이를 잡은 학준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문을 양옆으로 힘껏 열어젖히자.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손과 발이 묶인 이 두 아이가 캐비닛 안에서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듯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