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
학준에게 건 최면이 불안해서 작은 소리도 영향을 줄 수 있단 인혜의 말에 최 반장과 성진, 찬욱은 잠시 2층 난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잘 되고 있는 건가요?”
찬욱이 불안한 표정으로 반쯤 깨진 유리창 너머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학준과 채린이 들어가 앉아있는 작은 사무실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조용하니까 아마도요.”
성진이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네.”
짧게 대답을 한 찬욱이 궁금한 얼굴로 최 반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채린인 지금까지 기억 속에 몇 번이나 들어갔던 거죠?”
“84번째요.”
찬욱의 질문에 난간에 기대 굳은 표정으로 있던 최 반장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걸 다 세고 계셨어요?”
성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냥 왠지 미안해서…….”
험지(險地)나 다름없는 기억 속에 채린을 혼자 보내는 게 항상 마음 쓰이고 불편했던 최 반장이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반장님은 참 좋은 분이시네요.”
찬욱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최 반장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칭찬을 해주시니 민망하네요.”
갑작스러운 찬욱의 칭찬에 최 반장이 멋쩍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세요.”
칭찬에 이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찬욱의 행동에 최 반장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시켜드린 것 같아서요.”
“솔직히 덕분에 고생이야 좀 했죠.”
최 반장을 대신해 성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거든요.”
“이해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찬욱의 어깨를 최 반장이 가볍게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학준이 김고윤이라는 건 어떻게 알고 접근하셨던 거예요.”
성진이 궁금하다는 듯 찬욱에게 물었다.
“저도 처음부터 김고윤이 이학준이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냥 어떻게 계속 그 끝을 찾아가다 보니까 김고윤이 이학준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처음부터 이학준을 찾았던 것도 아니었고요.”
“이학준이 아니었다면…….”
“채린이를 먼저 찾으려고 했죠.”
“채린이요?”
찬욱의 대답에 최 반장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네. 채린이가 저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럼 일단 채린이를 찾은 뒤에 이학준을 찾으려고 하신 건가요?”
“채린이는 출소하고 나와서 찾았어요. 당연히 정 선생하고 지금까지 연락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채린이 찾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
“그런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정 선생이 워낙 끝까지 채린이를 보호하려고 해서…….”
찬욱이 유리창 너머 학준의 곁에 앉은 인혜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 선생님이 채린이를 많이 아끼시긴 하죠.”
성진이 찬욱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씩 웃었다.
“그럼 이학준은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최 반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잘 아시겠지만. 학교 아니, 교도소에 있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거든요. 그 사람들의 손을 좀 빌렸죠. 그래도 제가 교도소에서 꽤 평판이 괜찮았거든요.”
“그래도 이학준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두 분도 아는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았죠.”
성진의 물음에 학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아는 사람이요?”
“누구?”
성진과 최 반장이 궁금한 얼굴로 동시에 물었다.
“김승범이요.”
“그 보험사기 미친놈이요?”
익숙한 이름에 성진이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그놈이 정보를 줬다고요?”
최 반장이 선뜻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이 꽤 발이 넓더라고요. 자기 말로는 작가 하면서 쌓은 인맥이라는데.”
“보험사기 치느라 쌓은 인맥이었겠죠.”
찬욱의 대답에 성진이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내렸다.
“이학준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준 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제가 필요로 하는 정보나 자료들을 잘 알아봐 줬어요.”
“그 인간이 누구 말을 쉽게 들을 인간이 아닌데.”
최 반장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하자.
“제가 교도소에서 몇 번 목숨을 살려 줬거든요.”
“아-”
고개를 끄덕인 최 반장이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김승범에게 자료를 구해달란 생각을 하셨어요?”
“우연히 신문에서 김승범 사건을 보다 그 옆에 찍힌 반장님 사진을 봤거든요.”
“제 사진을요?”
최 반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래서 맨 처음에는 반장님 이야기 물으면서 이것저것 좀 알아보려고 했는데. 자기가 먼저 저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저한테 붙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 이후로 이런저런 자잘한 자료들을 모아줬어요.”
“하긴 그 인간이면 그러고도 남죠.”
찬욱의 이야기를 듣던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학준이 살아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흠- 몇 년 전에 교도소로 편지가 한 통 왔었어요.”
최 반장의 질문에 찬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편지요?”
“네. 이학준이 살아있다는.”
“이학준이 보낸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흠-”
머릿속을 떠도는 이런저런 퍼즐 조각들에 최 반장의 눈가가 구겨졌다.
“그래서 제가 출소하면 자연스럽게 이학준이 저를 찾을 거라 생각했어요. 살아있다면 과거의 일을 그냥 덮고 지나갈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이학준이 그럴 거라는 걸 어떻게 아신 거죠?”
성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금은 이렇지만 그래도 저 나름 잘나가던 정신과 의사예요. 과거 이학준의 초·중·고 시절 생활기록부부터 소년원을 드나들며 조사받았던 조사기록과 상담기록들까지 싹 다 확인해서 내린 결론이에요.”
“그 자료들도 김승범이 구해준 건가요?”
아무리 학준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사항이었기에 최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찬욱이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누가?”
“좋은 친구와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건 없더군요.”
찬욱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친구요?”
“제 의대 동기가 변호사 통해서 합법적으로 다 구해다 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최 반장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는 찬욱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 의대 동기가 진성준이라는 분인가요?”
“네. 두 분 만나신 적 있으시죠?”
성진의 말에 찬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네. 예전에 한번. 그때 병원에서 사라지셔서 저희가 좀 열 받긴 했지만요.”
“죄송합니다. 그때는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찬욱이 성진과 최 반장에게 미안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 지난 일인데요. 아무튼 이제 거의 끝나 가는 것 같은데. 슬슬 그만 들어가죠.”
“네.”
“아. 그리고 힘드시겠지만 이따 저희와 같이 경찰서로 가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저희가 들어야 할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아서요.”
최 반장이 사무실로 발길을 돌리는 찬욱을 불러 세웠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 얼마나 남았지?”
찬욱과 가볍게 눈을 맞춘 최 반장이 성진을 바라봤다.
“이제 거의 끝날 때 됐어요.”
성진이 채 1분도 남지 않은 핸드폰 타이머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채린이가 찾았을까요?”
“후- 두고 봐야지.”
성진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최 반장이 긴 한숨을 내쉬며 초조히 마른침을 삼켰다.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반장님이라도 아드님 꼭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아드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찬욱의 위로에 최 반장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흠-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제 마음은 개운하네요.”
긴 한숨을 내쉰 찬욱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
하지만 그 표정과 눈빛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다는 걸 잘 아는 최 반장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그런데 이제 편안하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이제 제 곁에 있으니까요.”
찬욱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잘 했어야 했는데…….”
최 반장이 다시 한번 찬욱을 향해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반장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최선을 다하셨으니 그런 말씀 마세요.”
찬욱이 고개 숙인 최 반장을 일으켜 세우며 어깨를 다독였다.
“후-”
어떤 대답을 할지 모르겠는 최 반장의 입에선 그저 긴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시죠. 채린이가 뭘 찾아냈는지 궁금하네요.”
옅은 미소를 지은 찬욱이 축 처진 최 반장의 어깨를 감싸며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어때요?”
“아직까지는 순조로워요.”
성진의 말에 인혜가 학준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 끝났죠.”
최 반장이 어느새 5분이 지난 핸드폰 시간을 보며 물었다.
“네.”
“그런데 왜 채린이는 아직 안 일어나는 건가요?”
“제가 5분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시간은 아니니까요. 이제 곧 깨어날 것 같은데요.”
인혜가 미동도 없이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있는 채린을 보며 말했다.
“이 인간은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맞죠?”
엉망진창인 얼굴로 기절한 학준을 바라보는 최 반장의 눈가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네. 이제 거의 끝났으니까 일단 안대부터 씌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할게요.”
인혜의 말에 성진이 학준의 눈에 조심스럽게 눈가리개를 씌우던 그 순간.
“후-”
채린이 짧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아?”
“네. 이학준은요?”
최 반장의 걱정 어린 말에도 채린의 시선은 누워있는 학준에게 먼저 향했다.
“아직 기절해 있어.”
“네.”
“뭐 좀 찾았어?”
“네.”
성진의 말에 채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런데 그게 아직 확실하진 않아서요. 이제 확인해 보려고요.”
“확인?”
최 반장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네.”
“뭘 확인해야 하는데?”
“반장님.”
궁금해하는 성진에게 답하는 대신 채린이 조심스럽게 최 반장을 불렀다.
“어. 왜?”
“혹시 동우 어릴 때 사진 있으세요?”
“동우?”
기억 속에 들어갔다 온 채린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건 사실 동우에 대한 것이었지만, 혹시라도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들을까 불안한 마음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던 최 반장이었다.
“네.”
“있긴 한데…….”
“그럼 좀 보여주세요.”
“동우 봤어? 어때? 어떻게 됐어?”
성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살아…… 있었니?”
최 반장이 두 주먹을 꼭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후- 후-”
살아 있었다는 한 마디에 최 반장이 긴 탄식을 토해내다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동우 어디 있어? 아니, 어떻게 됐어?”
“잠시만요. 일단 동우 사진 좀 보여주세요.”
“사진은 왜?”
“이따 말씀드릴게요. 일단 사진부터 좀 있으면 보여주세요.”
“여기.”
거듭된 채린의 재촉에 최 반장이 어쩔 수 없이 지갑 속 깊은 곳에 넣어놨던 동우의 사진을 꺼냈다.
“잠시만요.”
채린이 최 반장이 건넨 동우의 사진을 들고 다시 작은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