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
“갑자기 회장님이 왜.”
정미가 놀란 얼굴로 홍 실장을 바라봤다.
“아마 아까 일 때문에 오신 것 같습니다.”
홍 실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미치겠네.”
정미가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회장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빠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표정 좀 풀어. 표정 좀. 회장님께 예쁨 받는 분이 왜 이렇게 긴장하셨을까.”
정필이 빈정거리며 기분 나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닥쳐라.”
정미가 정필을 향해 이를 바득 갈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던 그때.
“흠- 흠-”
마치 자신의 등장을 미리 알리기라도 하듯 사무실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홍 실장. 빨리 회장님 모시고 들어와.”
“네.”
“후-”
홍 실장이 밖으로 나가자 깊게 심호흡을 한 정미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문 앞에 섰다.
“오버한다 또.”
그러자 정필이 정미의 행동에 못마땅한 듯 콧방귀를 뀌면서도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을 매만졌다.
그 순간.
쾅-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골프복 차림의 60대 초반의 남자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정필이 회장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정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회장을 반겼다.
“내가 못 올 때 왔나?”
회장이 정미를 살짝 흘겨봤다.
“아닙니다.”
정미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서정필이.”
회장의 시선이 정미에게서 정필에게로 향했다.
“네. 회장님.”
딱히 혼날 일이 없다 생각한 정필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요즘 편하지?”
“네?”
갑작스런 회장의 말에 정필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전화하는 애들 관리나 하고, 수금은 아랫놈들이 다 해주고. 넌 아주 편하잖아. 안 그래?”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리 와.”
회장이 정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네?”
“이리오라고.”
“……네.”
잔뜩 긴장한 정필이 조심스럽게 회장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
짝.
회장의 손이 정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회 회장님.”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정필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정미 옆에서 잘 보필하라고 했어 안 했어!”
짝. 짝.
이번엔 회장의 양 손바닥이 다시 정필의 양쪽 뺨을 때렸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정필이 몸을 벌벌 떨며 연신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짝. 짝. 짝.
“정미가 미친 짓 하면 네가 말렸어야지! 그러라고 네가 나한테 돈 받아 처먹고 있는 거 아니야!”
회장의 고함이 사무실 안을 울렸다.
“…….”
‘X발.’
차라리 자신을 때리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마치 정필이 자신의 보호자 같은 거지 같은 상황에 정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내가 용서받을 짓을 하지 말라고 했지!”
짝. 짝.
회장은 마치 정미에게 보란 듯 정필에 대한 손찌검을 멈추지 않았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더 이상 이 불편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는 정미가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이 새끼가 잘못한 거야.”
꺼지라는 듯 정필의 얼굴을 밀친 회장이 서늘한 미소로 정미를 바라봤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무슨 실수를 했는데.”
정미의 대답에 회장이 소파 상석에 앉으며 물었다.
“요양원에 절대 피해 가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시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겠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땅에 박을 듯이 숙이며 바짝 엎드렸지만, 가슴 속에선 끓어오르는 화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니야. 일은 재밌게 해야지 네가 현장에 나가는 걸 내가 뭐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네가 현장 나가서 직접 노는 게 재밌으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
“…….”
“그 대신 돈만 깔끔하게 벌어와. 그러면 된 거야.”
회장이 다리를 꼬며 정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이번 달 입금액은 저번 달보다 2배 이상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정미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지킬 수 있어?”
회장이 정미와 정필을 향해 소파에 앉으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는 게 아니야.”
“…….”
서늘한 회장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정미가 긴장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스스로 명을 재촉할 뿐이거든.”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시는 일도 깔끔하게 다 처리해놓겠습니다.”
“내가 뭘 걱정하는데.”
“신경 쓰시는 모든 일 마음 쓰시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
“믿어도 되는 거야?”
“네.”
“넌 뭐 할 말 없어?”
정미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던 회장의 시선이 정필을 향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흠 흠.”
갑자기 자신을 향한 회장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 정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에휴- 잘 좀 하자. 잘 좀.”
회장이 정필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네.”
정필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미야.”
“네.”
“내가 너한테 왜 내 밑에서 일하라고 했는지 말해준 적 있나?”
회장이 다리를 꼬며 정미를 빤히 바라봤다.
“없으십니다.”
“지금까지 나한테 돈 빌리러 온 애들 중에 네가 제일 당당했거든.”
“…….”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회장의 한마디에 10년 전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 거짓말처럼 펼쳐지자 정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세상 물정을 몰라 겁이 없던 건지 아니면 자신감인지. 연 이자율 4000%라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빨리 돈이나 달라는 모습에 세상에 뭐 이런 게 다 있나 했지. 하하하하.”
하지만 회장은 혼자 신난 얼굴로 무릎까지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는 철이 없었습니다.”
‘저 새끼 앞에서 왜 옛날이야기를 하고 진짜.’
가뜩이나 자신을 얕잡아보는 정필의 앞에서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는 게 영 탐탁지 않은 정미였다.
“그런데 말이야. 얘가 약속대로 정말 딱 일주일 만에 원금하고 이자를 가지고 오는 거야.”
“회장님 쑥스러운 옛날이야기는 그만해주시죠.”
“그래서 내가 이 돈을 어떻게 가져왔냐고 물었더니 얘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정미의 간곡한 부탁에도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밀이래. 하하하하. 완전 골 때리지 않냐? 하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필이 회장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정미의 속을 살살 긁었다.
‘저 새끼가 진짜.’
아까 회장에게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뺨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는 정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제안했지. 내 밑에서 일하라고.”
“지금도 저에게 제안해 주신 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미가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게 벌써 근 10년 전이네. 시간 참 빨라 그치?”
“네.”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며 잠시 뜸을 들이는 회장의 모습에 정미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이 모든 잘못을 덮어줄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
서늘한 회장의 한마디에 정미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10년 탑을 쌓아 올린 것도 나고, 그 탑을 한순간 무너트릴 수 있는 것도 나라는 걸 잊지 말라고.”
“앞으로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미가 허리를 접을 듯 숙이며 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정미야. 우리 10년 쌓은 탑을 여기서 무너뜨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리고 내가 널 딸처럼 생각하는 거 알지?”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하자. 믿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회장이 정미의 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정필이 질 수 없단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넌 그냥 시킨 일이나 잘해.”
“……네.”
회장의 말에 입꼬리를 내린 정필이 불만가득한 시선으로 정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 그런데 경찰들은 어떻게 할까요. 최정미가 경찰 앞에서 실수를 좀 해서 아무래도 좀 귀찮게 파고들 것 같습니다.”
‘저 새끼가 진짜 끝까지.’
애써 죽여 놓은 회장의 화(火)에 다시 기름을 부으며 일부러 자신을 난감하게 하려는 정필의 야비한 술수(術數)를 정미가 모를 리 없었다.
그 순간.
짝.
“야이 새끼야. 정 대표가 네 친구냐! 최정미가 뭐야! 최정미가!”
회장이 정필의 조인트를 발로 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죄송합니다.”
정필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호칭 똑바로 해라. 이름은 나만 부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일은 정미이가 알아서 하겠지. 아까 자기 입으로 책임진다고 했잖아. 안 그래?”
“네.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미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회장과 눈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
인혜의 병원 원장실.
“오셨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 반장과 성진을 향해 채린과 인혜가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미안해요. 차가 좀 막혀서.”
최 반장이 지친 얼굴로 두 사람의 인사를 미소로 받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두 분 다 엄청 피곤해 보이시네요. 무슨 차 드릴까요.”
“하암- 진짜 피곤해요. 전 커피 부탁드립니다.”
소파에 쓰러질 듯 앉은 성진이 인혜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부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반장님은요?”
“괜찮아요. 그냥 물이나 마실게요.”
최 반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못 찾으신 거예요?”
채린이 궁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응.”
성진이 기운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요. 채린이에게 이야기 들었는데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인혜가 성진에게 커피잔을 건네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는 짓이 그냥 푼돈이나 뜯으려는 보이스피싱이나 하는 놈들이 아닌 것 같아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커피잔을 받은 성진이 입꼬리를 내렸다.
“골목 CCTV에서는 뭐 좀 찾으셨어요?”
“아니. CCTV가 하나도 없어.”
커피잔을 입에서 뗀 성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진짜 골목에 CCTV가 하나도 없다고요? 요즘에 그런 곳이 있어요?”
인혜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있더라고요. 도로 방범 CCTV는 고사하고 집이나 가게에 설치한 CCTV도 없어요.”
“혹시 골목 입구나 출구 비추는 도로 CCTV 있으면 오고나간 오토바이나 사람들 찾아보면 뭐 나오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확인해봤는데 딱 그 골목만 안 비추더라.”
채린의 말에 성진이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답답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전답사를 제대로 한 것 같은데요.”
인혜가 팔짱을 끼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보통 놈들이 아니에요.”
성진이 찻잔을 입에서 떼며 눈가를 찡그렸다.
“가방 바뀐 걸 확인해야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혹시 놓친 CCTV가 있지는 않을까요?”
“안 그래도 내일 다시 한번 가서 확인해 보긴 할 건데요. 오늘 봐서는 없었어.”
“그냥 아까 잡은 그 애들 둘 기억 속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성진의 말을 들은 채린이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성진이 최 반장의 반응을 살폈다.
“흠-”
물론 기억 속에 들어가서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겠지만 항상 채린이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 최 반장이었다.
“설마 지금 저 걱정해서 고민하시는 거 아니죠?”
미적지근한 최 반장의 반응에 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당분간 쉬는 게 좋을 것도 같고…… 또 너무 네 도움만 받은 것 같기도 해서.”
최 반장이 솔직한 심정을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말끝을 흐리자.
“무슨요. 저도 같은 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섭섭해요.”
채린이 손사래를 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도.”
“기회만 만들어주세요. 제가 알아 올게요.”
채린이 최 반장과 눈을 맞추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