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곳에 내가 있었다-574화 (574/669)

#574.

“어! 여기서 보네요.”

성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정미가 슬며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했다.

“내리시는 거예요?”

“네? 네.”

성진의 말에 정미가 애써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할머니 돌봐주셨던 분들에게 인사드릴 겸 잠깐 들렀어요.”

“아-네.”

“네.”

“여기 있는 직원들하고 많이 친했나 봐요. 할머니 돌아가셨는데도 자주 오고.”

“워낙 할머니를 잘 돌봐주셔서요. 여기에 오래도 계셨고요.”

“네.”

고개를 끄덕이던 성진이 갑자기 엘리베이터 표시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내려오던데. 거긴 다 사무실만 있지 않나요?”

“……할머니 입원비 정산할 게 좀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성진의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정미가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 네. 이런 곳은 많이 비쌀 텐데 여기 입원비 감당하려면 고생이 많았겠네요.”

성진이 화려한 로비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뭐”

“좀 저렴한 곳으로 옮기지 그랬어요.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죄송한데 제가 좀 바빠서.”

정미가 성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아- 네. 네. 바쁘시면 가보셔야죠.”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성진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씩 웃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정미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아! 잠깐 만요.”

‘X발 또 왜.’

성진의 말에 정미가 인상을 구기며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저 어젯밤에 전화했었는데. 문자도 남기고 연락 못 받았어요?”

“네?”

구겼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돌린 정미가 잘 모르겠단 얼굴로 되물었다.

“퍽치기 사건 때문에 추가로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는데 전화도 안 받으시고 연락이 없으셔서요.”

“죄송해요. 제가 어제 야간알바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그리고 제가 평소에 무음으로 해놔서.”

“아- 네. 바쁘시면 그러실 수 있죠.”

“그런데 저한테 추가로 여쭤보실 게 있나요? 전 그때 다 말씀드렸는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간단한 몇 가지니까 그렇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요.”

“네.”

“여기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오셨겠네요?”

“……네.”

성진의 말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정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여기 오다 보니까 버스정류장도 여기서 한참 걸어 나가야지 있고, 버스도 잘 없는 것 같은데. 저희가 태워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성진의 말에 정미가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부담가지지 마시고 같이 타고 가세요. 어차피 저도 나가는 길이라 서요.”

“진짜 괜찮아요.”

“사양하지 마세요. 다 돕고 사는 거죠.”

우연히 제 발로 들어온 정미를 절대 놓칠 수 없는 성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정 미안하시면 같이 차 타고 나가는 김에 잠깐 경찰서에 들러서 대답 몇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한번은 경찰서 오셔야 하는데 따로 나오시는 것도 번거로우시잖아요.”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

‘이 새끼. 나 여기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거야 뭐야.’

제 발로 경찰서에 갈 수 없는 정미가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오래 안 걸려요. 제가 무조건 30분 안에 끝내드릴게요.”

“그래도 제가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여기서 버스 기다리다 몇 번 갈아타고 나가는 것보다 저희 차 타고 나가서 경찰서 들렀다 가도 그게 더 빠를걸요. 같이 타고 가는 거로 하세요.”

“…….”

더 이상 성진의 호의(好意)를 거절하는 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

정미가 마지못해 무언(無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제가 사무실에 놓고 온 핸드폰 금방 가지고 내려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이이잉-

“어디 가시면 안 돼요.”

“네.”

성진의 신신당부에 애써 옅은 미소를 짓던 정미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지이이잉- 탁.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X발.”

***

잠시 후 요양원 주차장.

“어서 와요.”

성진에게 미리 연락을 받은 최 반장이 굳은 얼굴로 차를 향해 걸어오는 정미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김 형사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이렇게도 다 만나네요.”

“……네.”

철컥.

“서로 아는 사이니까 따로 인사는 필요 없죠?”

마치 보란 듯 뒷좌석 문을 연 최 반장이 기영과 정미를 인사시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어색한 인사를 나누자.

“뒷좌석 불편하면 앞에 탈래요?”

그 모습을 옆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최 반장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정미를 바라봤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편하게 앞에 타요. 내가 뒤에 탈게요.”

뒷자리에 앉아 무슨 작당을 할지 모른다 생각한 최 반장이 자연스럽게 정미를 조수석에 태웠다.

“……네.”

탁.

“가자.”

손수 조수석 문까지 닫아준 최 반장이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운전석 앞에 서 있는 성진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네.”

살짝 설렌 표정의 성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에 올랐다.

***

경찰서로 가는 적막한 차 안.

“너무 조용한데 라디오라도 틀까요?”

“그냥 조용히 가시죠.”

성진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기영이 짜증을 냈다.

“아니 심심해 보이셔서. 핸드폰도 안 하시고.”

“참 오지랖 넓으시네요.”

경찰서에 가면 핸드폰 제출은 당연한 일.

정미와 메시지도 주고받을 수 없는 기영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오지랖이 아니라. 배려죠. 배려.”

백미러로 기영의 표정을 살핀 성진이 마치 지금 기영의 마음속이 보이는 듯 피식 웃었다.

“오늘은 무슨 알바 가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최 반장이 앞쪽으로 슬쩍 고개를 빼며 정미에게 물었다.

“……식당 알바요.”

정미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열심이네요. 복학준비도 해야죠.”

“네 뭐.”

“요즘 돈 많이 벌고 쉬운 알바라고 위험한 일들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정미 씨는 진짜 착실하네요. 나이도 젊은데.”

최 반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정미를 칭찬했다.

“아니에요.”

“그런 알바해 보라고 연락 온 적 없어요?”

성진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보이스피싱 수금책이나 전달책 아니면 모집책 같은 알바요.”

“…….”

정미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해봤어요?”

“아니요.”

거듭된 성진의 질문에 정미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기심으로라도 그런 곳에는 절대 발도 들이지 마세요. 진짜 인생 망칩니다.”

“…….”

자신을 향한 성진의 시선을 애써 피한 정미가 입을 꾹 닫았다.

“정미 씨가 어떤 사람인데. 넌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기분 나빴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성진이 일부러 긁은 정미의 속을 마치 최 반장이 기다렸다는 듯 위로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조용히 좀 가시죠.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뒷자리에 앉은 기영이 앞 좌석 사이로 살짝 보이는 정미의 굳은 표정을 살피며 목소리를 높이자.

“그래. 김 형사 조용히 가자. 말은 경찰서 가서 많이 해야지.”

최 반장이 기영과 정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경찰서 취조실.

“그 돈 지금 어디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 돈을 왜 나한테서 찾아요!”

성진의 말에 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계속 이렇게 발뺌할 거예요?”

“아니 내가 시켰다는 증거가 있냐고요.”

“모든 사람들이 일관되게 홍기영 씨를 이번 사건을 시킨 사람이라고 지목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양아치 고삐리 둘 말만 듣고 이러는 게 말이 되냐고요!”

“식당 주인도 있잖아요.”

“지금 말장난합니까!”

“이거 보이죠.”

성진이 자기 쪽을 향하고 있던 노트북 화면을 기영 쪽으로 돌렸다.

“이게 뭔데요.”

“이 스파이더맨 헬멧 쓴 사람 보이죠.”

노트북 CCTV 화면 속 스파이더맨 헬멧을 쓰고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요.”

“이 사람이 식당에서 바꿔치기한 가방을 가지고 배달한 곳이 어딘지 알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럼 잘 봐요. 식당 골목에서 나와서 한 20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이 서초역, 그 앞에 오토바이 세운 뒤에 배달함에서 꺼낸 가방 가지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죠.”

도로 곳곳 CCTV에 잡힌 스파이더맨 헬멧 배달원의 모습을 해설하듯 설명하던 성진이 움직이던 마우스를 멈추며 기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들고 내려가는 가방은 그쪽이 더 잘 알죠? 퍽치기 사건 당일 그쪽이 승현이에게 돈 담으라고 줬던 가방이니까요.”

“지금 가방 하나 똑같다고 이러는 겁니까? 이런 싸구려 가방은 세상에 널렸어요. 그럼 이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은 다 범인입니까!”

성진이 화면 속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가방을 보며 핏대를 세웠다.

“아- 참 짜증이 많으신 분이네. 일단 다음 화면 보고 짜증 좀 내요.”

“후-”

“지금 가방 들고 지하철 내에 있는 무인 택배보관함으로 걸어가서 가방 넣는 거 보이죠.”

노트북 화면 속 여러 각도에서 찍은 지하철역 내부 CCTV 화면에 스파이더맨 헬맷을 쓴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차례대로 보였다.

“그런데요. 이게 나랑 무슨 상관있습니까.”

탁.

하지만 기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성진이 거칠게 엔터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다음 날 새벽 6시 서초역 무인 택배함 앞 CCTV 영상이에요.”

“후- 이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합니까?”

“금방 끝나요. 금방. 어! 나온다. 이 사람 보이죠.”

성진이 노트북 화면 속 낯선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네. 그런데요.”

“지금 무인 택배함 열고 이 모자하고 마스크로 얼굴 가린 사람이 가방 가져가죠.”

“그런데요. 도대체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탁.

“이거 그쪽이죠.”

낯선 남자의 화면에서 영상을 멈춘 성진이 기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이 시간에 뭐 했어요?”

성진이 CCTV 화면 위쪽에 찍힌 [06 : 05 : 45] 시간을 가리켰다.

“뭘 하긴요. 잤죠.”

“집이 잠실이죠.”

“네.”

“서초동하고 가깝네요.”

“아니 집 가까우면 범인입니까?”

기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짜 이날 새벽에 서초역 가서 가방 안 가져갔어요?”

“안 가져갔어요! 아닌 난 저 시간에 서초역 가지도 않았다고요!”

“정말 안 갔어요?”

“네! 몇 번을 말합니까.”

“증명할 수 있어요?”

“내가 잔 것까지 증명해야 합니까!”

“좋아요. 그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출퇴근은 뭐로 하세요? 지하철로 하세요?”

한발 물러선 성진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까 요양원 오셨잖아요. 거길 어떻게 차 없이 출근합니까.”

“그럼 지하철은 잘 안 타시겠네요.”

“후-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지하철 타고 안 타는 게 중요합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서초역 자주 가시나 해서요.”

“아니요. 안 갑니다. 갈 일이 없어요. 거긴요.”

“진짜 잘 안 가는 거 맞죠. 확실하죠?”

“그렇다니까요!”

“좋아요.”

몇 번이나 기영의 대답을 들은 성진이 취조실 유리 벽 쪽을 바라보자.

잠시 후.

철컥.

취조실 문이 열리며.

“안녕하세요.”

노트북을 한 손에 든 나연이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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